옛날 옛적에,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왕자님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주체적으로’ 희생했다.백설공주는 사냥꾼의 경고를 듣고 숲으로 도망쳤고, 일곱 난쟁이들을 위해 가사노동을 하며 생존을 위해 싸웠다. 미녀와 야수의 벨은 데이트폭력범인 가스통을 가차없이 거절하며, 무시무시하게 생긴 야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디즈니 동화들을 ‘착즙’하려고 애써보면 이렇다는 얘기인데, 아무리 애써도 해석의 여지가 없는 캐릭터도 있다. 바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다.
이야기의 배경은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왕궁이다. 어렵게 자식을 얻은 오로라 공주의 부모는 갓난쟁이 딸이 언젠가 주체적인 어른이 되리라는 것을 벌써부터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정확히는 딸이 섹스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부모의 소원을 대신 들어주기 위해 오로라 공주에게 저주를 내리는 마녀 카라보스는 “이 아이는 열다섯에 물레 -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에 페니스를 들이밀 수는 없으므로 - 에 찔려 죽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를 보다못한 라일락 요정은 “물레에 찔리면 잠이 들고,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에 깨어나는 걸로 하자”고 협상한다.
왕과 왕비는 딸이 섹스를 할까봐, 즉 물레에 찔릴까봐 왕실 내는 물론이고 백성들에게까지 물레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물레를 못 쓰니 실은 이웃나라에서 수입해다 썼는가보다. 그렇게 그들은 갓난쟁이 오로라를 열다섯살이 될 때까지 정성들여 키운다. 그리고 오로라의 생일날, 왕과 왕비는 네 명의 왕자를 초대해서 오로라에게 결혼할 남자를 고르게 한다. ‘저 왕자들도 물레를 하나씩 가지고 있을 텐데, 괜찮은 건가요?’ 싶은 의문도 잠시, 그 유명한 ‘로즈 아다지오’가 시작된다.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한쪽 다리를 뒤로 높이 들어올리는 ‘아라베스크’는 발레에서 가장 유명한 동작일 것이다. ‘에티튜드 데리에’는 언뜻 보면 이 아라베스크와 유사한데, 다만 뒤로 들어올린 다리의 무릎을 살짝 굽힌다는 게 다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나들의 다리는 한없이 길어 보인다. 오로라는 자신의 열다섯번째 생일 파티에서 ‘로즈 아다지오’를 추면서, 이 춤이 절정에 이르면 지탱하는 다리의 발끝에 온 몸을 싣고 올라선 채 나머지 다리를 ‘에티튜드 데리에’로 뒤로 높이 든다. 그 상태로 오로라는 왕자와 손을 잡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돈다. 그렇게 돌고 나면 다음 왕자가 온다. 그러면 이전 왕자는 인사를 하고 떠나고, 오로라는 다음 왕자의 손을 이어 잡는다. 균형감각이 뛰어난 발레리나는 손을 이어 잡는 순간이 여유롭고, 그렇지 않은 발레리나라면 보는 관객이 다 불안할 지경이다. ‘잠미녀’에서 이 유명한 ‘에티튜드 데리에 발란스’ 장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관객들마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별 탈없이 네 명의 왕자가 오로라를 한 바퀴씩 돌리는 데 성공하면 공연장은 안도의 박수소리로 가득 차게 된다. 오로라는 이렇게 네 명의 이웃나라 왕자들과 공평하게 한 번씩 춤을 추고 난 뒤, 생일파티의 불청객인 카라보스가 건넨 물레에 찔려 백 년의 잠에 빠져든다. 왕자가 키스를 하러 올 때까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디즈니 버전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잠에서 깨어난 공주와 왕자가 즉시 사랑에 빠져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원작으로 알려진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해와 달과 탈리아>에서는 잠자는 여자를 지나가던 왕 - 유부남이었다 - 이 강간하고, 여자는 잠든 채 쌍둥이 아이를 출산한다. 잠든 여자의 뱃속에서 나온 두 아기는 배가 고팠지만 젖을 빨 수가 없어 여자의 손가락을 빨고, 그 통에 손에 박혔던 가시가 튀어나오면서 여자는 잠에서 깨어난다. 100년동안 누워서 잠만 잤는데도 깨어나자마자 여전히 아름다운 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2018년에 그대로 먹혀들 리 만무한데, 차라리 심신상실 상태의 여성을 지나가던 왕이 강간했다는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릴 지경이다.
공연이 끝나고, 오페라홀을 빠져나오는 관객들이 더러는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로즈 아다지오 그거, 너무 힘들어보이지 않아? 왜 생일을 맞은 애한테 선물은 안 주고 그런 걸 시켜? 그런 걸 시키니까 애가 힘들어서 100년 동안 자버리는 거 아냐?” 그렇다. 2018년의 관객들에게 고전 레퍼토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서사가 유효하게 먹힐 리가 없다. 스토리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무용수의 기량만 즐기려고 마음먹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국립발레단이 공연하는 마르시아 하이데 - 여성 안무가이다 - 버전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훌륭한 선택일 수 있다. 특히 남성이 연기하는 마녀 카라보스가 아주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