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는 왜? 3.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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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는 왜? 3.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진영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39세의 발레리나 황혜민이 지난 11월 26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오네긴> 공연을 끝으로 무대를 떠난다는 소식에 일찌감치 그녀의 마지막 공연을 예매했다. 공연 날짜가 다가오자 일개 관객에 불과한 나까지 덩달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대체 어떤 기분일까? 10살 때 발레를 시작해 24세의 나이로 발레단에 입단, 그 후 39세까지 발레리나로 살다가 은퇴 무대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이라니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 죽일 놈의 발레 이제 다시는 안 해도 된다, 하면서 하하하 웃을까? 입사 소식보다 퇴사 소식에 더 큰 축하를 보내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면 그럴 법도 하다(실제로 황혜민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0년간 유지해온 지겨운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애쉬 그레이로 염색하려고 미용실 예약도 해놨다”고 말했다).

공연 시작 직전, 예술의전당 오페라홀 무대에는 언제나처럼 문훈숙 단장이 먼저 올라와 작품에 대한 짧은 설명을 했다. 고전 발레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포드브라와 턴아웃이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쓰입니다, 하고 늘 그랬던 대로 우아하게 시범까지 보이고 난 문 단장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 것은 “오늘의 무대는 특히”라는 대목부터였다.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십몇 년 근무한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보통의 사장님은 기분이 어떨까? 설마 울진 않겠지’라고 생각했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너무나도 죄송스러워졌다. 오늘은 한국 발레 1세대의 주인공 문훈숙이 한국 발레 2세대의 주인공 황혜민을 보내는 자리인 것이다. 더욱이 황혜민씨는 은퇴 후 미뤘던 2세를 가질 계획이라고도 밝혔다. 즉 ‘미뤘던’ 것이다. 그 마음을 선배 된 사람이 어찌 모를까. 문 단장은 무대를 내려가기까지 내내 울먹였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막이 오르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1막을 보는 내내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나 이 스토리 어디서 봤는데? 여자가 남자를 짝사랑해서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꿈을 꾸다 상상 속에서 춤을 추고, 그러다 현실에서 매정하게 거절당하자 또 회한의 춤을 추는… 아아, 예술의 전당으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집에서 보고 있던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다! 너무나 멀쩡한 여자 레베카가 한 군데도 멀쩡한 구석이 없는 것 같은 조쉬를 짝사랑해서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상상 속에서 춤을 췄다가, 현실의 쓴맛을 맛보고 또 울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인간들은 세대를 거듭하여 조금씩 다른 스타일로 비슷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는구만!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19세기에 <오네긴>을 썼다. 그 내용은 사실 특별할 게 없다. 오네긴은 자기애적 성격장애 환자인데(죄송하지만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책을 좋아하는 소녀 타티아나를 가지고 놀다가 성에 차지 않자 더 큰 자극을 얻기 위해(성격장애가 있으면 이렇게 된다) 타티아나의 여동생 올가를 가지고 논다. 그러다 올가의 약혼자에게 결투 신청을 받는데, 두 발의 총성이 동시에 울린 직후 (신도 매정하시지) 오네긴은 살고 약혼자가 죽게 된다. 15년이 지난 후, 오네긴은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인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타티아나를 찾아가 또 가지고 놀려고 든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더 이상 15년 전의 어린 소녀가 아니라서 오네긴을 싹 거절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네긴>의 주인공 오네긴은 의심할 여지 없는 데이트 폭력범이며 가정 파괴범이고 살인자다. 그러나 그는 19세기에 탄생한 귀족 남자이므로 아무도 그에게 범죄자 딱지를 붙이지 않고, 오늘날의 잘생긴 배우나 무용수가 그의 역할을 맡아 해준다. 복 받은 놈일세! 19세기란 과연 굉장한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다행히 2017년에 방영중인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나쁜 남자’인 조쉬 챈을 별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지적 능력이 평균 이하이고 제대로 된 직장도 없다. 이 설정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레베카 정도 되는 여자라면 훨씬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지 않아?’ 하고 끊임없이 의문을 갖게 만든다. 그 의문이 화면을 뚫고 전달되는지 어쩌는지, 레베카도 조금씩 성장하는 것 같다(아직 시즌3을 끝까지 보지 않았는데, 제발 성장했으면 좋겠다).

고맙습니다

발레단 측에서 관객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이벤트용 배너.

황혜민-엄재용 부부 사이에 2세가 태어난다면, 평범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녀에게도 발레를 시킬 것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황혜민씨는 인터뷰에서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래도 사람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먹은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던데, 이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면 정말 굉장하지 않을까 싶고 막 욕심이 난다. 그러나 역시 상식적인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아이(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가 겪을 고난 또한 눈앞에 그린 듯이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발레를 잘 하거나 혹은 못 하거나, ‘엄마 아빠 믿고 저런다’는 시기와 질투의 꼬리표를 항상 달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가업'을 잇거나 아니거나는 중요하지 않으니,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부디 오늘보다 더 진보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모두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고 정상에 오르기 위해 나머지를 모두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특히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될 것을 두려워 조금 더 소중한 것과 아주 조금 덜 소중한 것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그 아이 앞에 펼쳐졌으면 좋겠다. 황혜민씨, 그동안 발레해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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