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파티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로부터 받은 안부인사는 대체로 '고양이는 잘 있냐'로 시작해서 '발레 아직 하고 있냐'로 이어졌다. 나는 아직 발레를 하고 있다.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한 언론 보도를 통해 '발레를 취미로도 배울 수 있다'는 걸 안 게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4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Q1. 운동을 열심히 하면 우울증도 극복돼?
A1. 무사히 학원 문 앞까지 갈 수만 있다면.
대인기피가 생길 정도로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에는 사람을 쳐다보는 게 무서워서 클래스에 가지 못한 날이 많았다. 주3회 수강권을 결제한 주제에 월초 3-4번만 출석하고는 연이어 결석을 하게 니, 나중에는 선생님 얼굴 보기가 부끄러워서 갈 마음이 충분히 드는 날에도 못 가곤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출발을 할 요량으로 학원을 옮겼더니, 수강생들 사이에 견제하는 기운이 있는데다 가끔은 탈의실에서 큰 소리가 나는 말싸움도 오가곤 하는 곳이었던 적도 있다. 너무 무서워서 석 달 동안 50클래스를 수강할 수 있는 쿠폰을 끊어서는 열한 번 가고 나머지를 날렸다.
그러나 학원 문턱을 넘을 힘만 있다면야. 제대로 수업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서 90분동안은 온전히 뇌를 쉴 수 있게 했다. 땀을 흠뻑 흘리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마시는 맥주 한 캔은 천국. 그러나 학원 문턱 넘을 힘은 매일 생기는 게 아니었고, 땀에 젖은 발레복을 뭉쳐서 던져둔 채 일주일을 방치하는 때도 있었다. 우울해서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못 가고, 몸이 아파서 못 가고, 퇴근이 늦어져서 못 가고... 취미발레생들끼리는 이런 스스로를 '천사'라고 부른다. 기부천사. 당신도 많고 많은 천사 중 하나가 되기 싫다면 일단 병원부터 다니셔라.
Q2. 발레하더니 살 빠졌나봐!
A2. 나이를 먹어서 얼굴살만 빠진 것입니다.
체중까지 조절해가며 발레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리고 체중을 줄이면 체력이 떨어진다. xs 사이즈의 레오타드를 입을 수 있으되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으면 살을 빼서 무엇하나? 다만 거북목 같은 게 좀 완화되고(사진을 찍어 보면 티가 난다), 등에 힘을 줄 수 있게 되면서 뱃살을 집어넣을 줄은 알게 되었다. 퇴근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야 해서 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는 팔자도 체중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긴 했을 것이다.
Q3. 이거 봐, 나 진짜 뻣뻣한데… 그래도 발레 할 수 있을까?
A3. 제발 이런 곳에서 그런 동작을 나에게 보여 주지 말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워밍업도 스트레칭도 정규 과정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 ‘손끝이 땅에 닿지도 않아요’ 하면서 스스로를 뻣뻣한 사람으로 여기고 평생을 지낸다. 스스로가 유연하다고 자신하는 성인은 드물다. 그러나 유연성은 배우면 된다. 발레는 빨리 안 늘지만, 스트레칭은 제대로만 배우면 금방 는다.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다. 한국 체육 교육이 잘못했다.
Q4. 돈 얼마나 들어? 많이 들지 않아?
A4. 혹시 장비병 치료약이 나왔나요?
취미발레에서 가장 이상적인 빈도로 여기는 주3회 클래스를 듣는다고 가정하면 수강료는 20만원 정도. 몸에 걸치는 옷이나 연습용 슈즈 같은 것을 사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는 편이다. 수영장 다니는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물론 경력이 오래되면 누구나 일정한 간격으로 ‘장비병’을 앓게 되는데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할 문제. 한 벌에 20만원짜리 커스텀 레오타드를 석 달이 걸려서 받고 너무 예쁘다며 엉엉 울거나 직구를 하도 해서 어쩐지 러시아어를 읽을 수 있을 지경에 이르거나 하게 된다. 물론 정말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할 문제다. 취미발레 '입문'기에는 수강료를 제외하고는 큰 돈이 들지 않는다.
Q5. 그런 옷 입고 하는 거 부끄럽지 않아?
A5. 못 하는 게 더 부끄러워서 괜찮아.
발레를 배우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처음에는 좀 부끄러웠는데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졌다’고 말하는데, 이 벽을 넘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도전을 안 하기 때문에 생기는 편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당장 부끄럽다면 굳이 벗은 것처럼 입지 않아도 된다. 남 앞에 몸매를 드러내는 게 민망한 사람이라면 발레를 추운 계절에 시작하는 게 좀 유리할 것 같긴 하다.
Q6. 4년이요? 그럼 잘 하겠네요? 뭐 할줄 알아요?
A6. 혹시 <백조 클럽> 봤니?
KBS2에서 방영하는 ‘심야의 힐링 발레 교습소' <백조 클럽>에서 오윤아 씨가 발레하는 것을 보도록 한다. 그녀는 어릴 때 전공도 꿈꾸었다고 하고 발등과 유연성 등 신체조건도 타고났고, 연기가 직업이라 감정 표현을 정말 잘 하고, 지금도 취미로 탄츠플레이를 몇 년씩 하고 있고 게다가 엄청난 연습벌레라는 설정이다. 그런데도 이것저것 도전할 때마다 진땀을 흘리지 않는가. 그리고 4년을 배웠지만 나는 오윤아 씨보다 못 한다. 성인들의 취미발레는 바로 이 점이 매력 포인트다. 본래 자기 분야에서는 멀쩡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사람들이(멀쩡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월 20여만원의 수강료를 지불할 수 없다) 다같이 모여서 발레를 너무나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뭘 못해보는 것도, 못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도 상당히 진귀한 경험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계속 못 한다. 정말입니다. 너무나 꾸준히 못 하다보니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이 분들은 이렇게 못 하는데 어째서 이걸 취미로 배우는 거야?’ 하고 의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인 취미 발레의 포인트가 바로 그거라니까요. 못 하지만 계속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