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는 왜? 8. 안나보다 낙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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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는 왜? 8. 안나보다 낙랑

진영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발레요?

개인적으로는 정부가 평창동계올림픽의 일환으로 편성한 여러가지 문화 프로그램 중에 발레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다. 조직위가 예산 20억원을 국립발레단에 배정하고, 발레단이 <안나 카레니나>를 올리기로 했다는 건 더 의외였다. 백조, 지젤, 라 바야데르, 호두까기에도 있는 ‘흰 옷 입고 줄 맞추어서 추는’ 군무도 없고, 쿵짝쿵짝 눈요기하기 좋은 캐릭터댄스도 없는 드라마 발레를? 평창올림픽 개막 100일 전인 2017년 11월, 회의와 기대를 동시에 품은 관객들 앞에 국립발레단이 <안나 카레니나>를 올렸을 때 ‘무대장치도 없는 드라마발레인데, 20억을 어디에 쓴 거지?’하고 의아해하는 관객들도 없지 않았다. (라이선스 비용으로 절반 정도를 쓴 것이 아니겠는가 추측된다.)

강수진 단장에게도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었겠으나, 무엇보다도 이번 기회에 라이선스를 확보해 발레단의 레퍼토리를 확장하자는 욕심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이른바 ‘어른의 사정’이고, 올림픽 프로그램을 지켜보는 국내 관객 입장에서는 ‘하필 외국인 손님들을 모셔놓고 죽은 러시아 작가가 쓴 치정극을 보여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창작 레퍼토리,
없는 게 아닙니다만

일부 언론은 ‘한국 발레단이 제대로 된 창작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 억 소리 나는 헛돈을 쓴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국립발레단은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발레 <왕자 호동>과, 신예 안무가 강효형의 모던발레 <허난설헌-수월경화>를 가지고 있다.

<왕자 호동>은 저절로 울리는 신비한 북 ‘자명고’를 둘러싼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국립발레단의 초대 단장이었던 姑 임성남 단장이 안무를 맡아 1997년 초연하였으며, 국립발레단의 부예술감독을 역임했던 문병남 감독이 2009년 재안무해 새롭게 선보인 바 있다. 2009년의 제작발표회에서 연출가 국수호는 “조선에 춘향이가 있었다면 고구려에는 왕자호동이 있다”고 했고, 당시 낙랑공주 역은 2007년 로잔콩쿨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돌아온 박세은이 맡았다. 언론은 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을 ‘국가브랜드 공연 프로젝트 1호’로 명명하고 큰 기대를 보였다.

2017년에 초연한 국립발레단의 <허난설헌-수월경화>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의 삶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모던발레다. 허난설헌 역의 여성 무용수가 시 속의 화자로 무대에 등장하고, 무용수들은 허난설헌의 붓글씨나 시 속 사물들의 이미지를 춤으로 표현한다. 발레단의 여성 감독 강수진이 젊은 여성 안무가 강효형을 지원하여 조선의 여성 시인 허난설헌의 삶을 춤으로 풀어내게 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다소 난해하다는 평도 있으나, 많은 관객들이 ‘공연을 보고 나서 왠지 눈물이 났다’는 이야기들을 하는 작품이다.

국립발레단만이 이런 창착 레퍼토리를 보유한 것은 아니다. 유니버설발레단도 1986년 초연한 <발레 심청>을 가지고 있다. 발레단의 초대 예술감독을 지낸 에이드리언 델러스가 서점에 갔다가 동화책을 보고 한국인의 효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을 계기로 탄생한 작품이라고 한다. 물론 인신공양(그것도 미성년의 여성을!)이라는 테마가 2018년의 관객들에게 편안하게 다가올 리 없다는 한계가 있으나, 인당수에 몸을 던진 춘향을 환대하는 용궁 가족들의 캐릭터 댄스를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어떠냐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치면 여자가 새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말이 되는가.

안나보다 낙랑

개막식에 등장한 인면조가 큰 사랑(?)을 받은 것을 보아하니,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배신하는 딸’ 이야기를 올림픽 문화 프로그램으로 편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해 외로워하던 안나가 불륜에 빠지고 죄책감에 못이겨 기차에 몸을 던지는 이야기보다는, 죽음도 불사하고 구국의 결단을 내리는(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낙랑이 훨씬 더 미래적인 캐릭터 아닐까. 국립발레단은 2015년을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않고 있다. 대신 평창의 무대에는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허난설헌-수월경화>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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