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암스테르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서바이벌 게임>의 첫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냈다. 일주일짜리 여행자용 패스를 내고 트램에 올라타 읽을 줄도 모르는 글자들을 눈으로 더듬어 내릴 역을 찾았고, 카운터에 섰을 때만 영어를 조금 말하며 일주일을 살았다. 이런 곳을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상상 같은 것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대신 ‘유럽에 출장와 가죽 재킷을 걸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멋진 나’에 취해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암스테르담 시내의 오래된 길바닥을 걸어다녔다. 주말에는 기차를 타고 파리에 가서 발레 공연을 보았다. 길거리 음식점에서 산 태국식 치킨 요리가 맛없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 일행을 맞이한 것은 국정농단 사태였다. 매주 열린 촛불집회와 이어진 탄핵심판, 대선, 새 대통령의 취임, 그렇게 ‘매우 큰 사건이지만 나에게 해로울 것은 없는 일들'을 기준으로 작년 가을과 겨울, 그리고 올해의 봄까지를 나는 기억한다. 그간 특별히 내 개인의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와 크게 갈등하지도 않았고 치명적인 패배를 경험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평온한 내면을 유지하는 가운데 한동안 무기력하다가도 이윽고 맛본 작은 승리로 나는 쉽게 활력을 되찾곤 했다.
불운의 원인
나는 긴 세월 동안, 부모가 나빴던 탓에 내가 받아 마땅했던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했고 부모가 나빴던 탓에 신분 상승의 사다리에 매끄럽게 올라탈 자격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며 나쁜 부모가 허락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좋은 탈출의 기회를 수없이 놓쳤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사랑을 받기는커녕 얻어맞기만 해 옆사람이 모자를 고쳐쓰려고 손을 올리기만 해도 잔뜩 움츠려드는 어깨를 해가지고는 하루하루를 헉헉대며 살아내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이 사고 방식이 주변에까지 전이된 나머지 친구나 연인이 내 부모를 원망하는 일도 왕왕 생겼다. 부모가 나를 이렇게 나쁘게 길러놓은 탓에 나의 단점들이 탄생했고 그것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 타인들이 있었다. 심지어 나의 부모들조차 당신들이 현재 겪는 모든 괴로움은 자신들이 나를 이렇게 길러 놓은 탓이라고 여겼다. 이런 사고방식은 나와 내 주변을 완전히 잠식하고 있었다. 사소한 불운을 마주했을 때조차 사사건건 부모에게 이 불운을 들킬 것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불운의 원인을 부모에게 돌려 깊이 원망하곤 하는 것이 내 버릇이 되었다. 그런 생각들에 빠져 있노라면 곧 심장이 빠르게 뛰고 눈물이 솟았으며 손발이 차가워졌고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마 몇십 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나보다. 불운을 마주하면 일단 내적 귀인 - 내가 못난 탓 - 을 시도했다가, 곧이어 외적 귀인 - 나를 못나게 만든 부모 탓 - 으로 전환하는 식으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인식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옷을 샀는데 마음에 들지 않거나 기껏 만든 요리가 맛이 없는 정도의 사소한 불운도 ‘나만의 귀인 오류 시스템’을 작동시키기에 충분했고, 애인이 자기 부모를 나에게 소개하겠다고 제안하거나 내 부모를 소개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은 시스템 가동률을 200%까지 끌어올릴 만한 연료가 됐다. 나는 그렇게 많은 날들의 모든 불행을 부모 탓으로 돌리며 눈물 콧물을 흘리는 걸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사실 나쁜 부모와의 나쁜 경험들은 과거에 일찍이 종료되었으므로, 갖가지 불행의 원인을 과거의 나쁜 경험들로 몽땅 귀착하게 만드는 인지적 오류,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된 고통이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둔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만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때는 특정하게 짧은 한순간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상담의와 마주앉아 문답을 나누던 도중에 강렬한 에피파니를 느꼈다거나 하는 식으로 내가 그동안 세상을 인식해온 방식에 대해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스스로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네 계절을 별일 없이 살아내고 나서 뒤돌아보니 문득, 지난 가을 이전의 나와 얼마간은 달라진 자신이 보였다. 눈이 크게 뜨이는 발견이었다.
중심축
‘나이 먹을 만큼 먹어놓고도 모든 불운을 엄마 탓하기 좋아하는 힙스터들이 서울 시내 외래 정신과의 주 수요층을 구성한다'는 농담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아동 학대 피해자로 정체화한 사람이 위와 같은 귀인 오류 - '엄마 탓’의 학술 용어 - 의 덫에 갇히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 덫에 갇히지 않기 위해, ‘엄마 탓하는 찌질이’로 여겨지는 것이 싫어서 스스로가 받은 피해를 없었던 셈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나도 한때는 그랬던 것 같다. 한때는 어린 시절의 불행을 없었던 셈쳤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 없겠다고 느껴 길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까지 부모 탓으로 돌려 보다가, 그렇게 오른쪽으로 한번 왼쪽으로 한번 휘청한 끝에 결국 나는 지금의 중심축을 발견한 것 같다.
<서바이벌 게임>은 격주간 20회, 총 40주에 걸쳐 연재되었다. 마감일에 두 개의 원고를 보내 놓으면, 한 편은 4주 뒤에 나머지 한 편은 6주 뒤에 발행되는 식이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오늘의 글을 제외하고 나머지 19편을 쓰면서 나는 늘 울었다. 남들을 웃기려고 집어넣은 요소들에 만족해 큭큭거린 때도 있었으나 대체로 원고를 마무리해 보내던 순간의 나는 늘 울고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특별히 괴로웠던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대단히 연민했던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반사적으로 눈물이 울컥울컥 났다. 그렇게 보낸 글이 4주 뒤, 혹은 6주 뒤 발행되면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 보는데 신기하게도 원고를 보내던 당시의 울컥하는 감정이 다시 따라붙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4주, 혹은 6주 전의 상태가 감정 과잉으로 느껴지지도, ‘현자타임'이 찾아와 수치스럽지도 않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종의 치료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현대 의학이었다. 아무리 몰두해도 특별한 원인이 없는데 가슴이 미어지고 손발을 까딱할 수 없겠는 때에 이유를 찾으려고 머리와 가슴을 쥐어뜯는 대신 해당 증상을 ‘우울증’으로 이름붙일 줄 알게 된 것, 그리고 약물의 복용으로 그 증상을 말끔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은 것은 내 소중한 자산이다. 의사가 처방한 소량의 항우울제는 나에게 조금도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고, 마치 밀가루약인 것처럼 농담하면서 1년을 먹었다. 상담도 투약도 모두 중단한 지금, 때때로 또다시 가슴이 미어질 듯한 때가 찾아오지 않는다곤 못하지만 병원에 가고 약을 먹으면 제거될 증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상태가 호전되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복잡한 가정사가 나에게 가할 고통이 이것으로 완전히 종료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최근 들어 가장 자주 사로잡히는 순간은 미래에 있을 이 가족의 장례식이다. 노환을 앓는 외조모가 돌아가시거나 혹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순간들에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래도 장례식에는 가야지, 하고 생각하는 날이 있고 산 사람을 위한 의식에 불과한데 왜 참석해야 하느냐고 회의하는 날이 있다. 이것 역시 좌우로 흔들리는 증상의 일부다. 때가 닥치면 나의 축을 잡겠지. 닥치기 전까지는 안녕히 지내려고 한다. 독자 여러분도 부디 안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