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연재를 시작할 즈음과 비교해 그때와 지금 나의 삶에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어머니와 두 번 통화했다. 두 번 다 한시간여 이어진 장시간의 통화였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제법 자분자분한 대화가 오갔다. 어머니는 나에게 김치 보내준 것은 좀 먹느냐고 물었다. 나는 요즘 사람들은 김치처럼 짠 것을 피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오미자즙을 보낼테니 샐러드 드레싱으로 먹으라고, 깨를 찧어서 섞으면 바로 드레싱이 된다고 했다. 나는 하루에 열 시간 넘께 회사일을 하는 1인 가구 구성원이 싱싱한 야채와 깨와 깨 빻는 도구와 오미자즙과 샐러드 먹을 식욕과 여유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혹시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를 읽어봤느냐고 물었다. 나는 요즘 그런 책이 하도 많아서 내가 무엇을 읽었고 무엇을 안 읽었는지도 모를 지경이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그 책을 읽으면 결혼을 안하겠다고 할 만도 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혼해서 잘 사는 이야기를 자꾸 봐야 결혼을 하고 싶을 텐데, 잘 사는 이야기를 자꾸 봐라, 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아무리 고민해도 결혼해서 잘 사는 이야기로 예를 들 만한 아이템이 없었던 모양이다. 누구네가 결혼을 해서 애를 셋이나 낳고는 덜컥 아파서 큰일이 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갑자기 사촌 동생이 어느 대학엘 간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덜컥 대꾸할 마음이 나서 "나도 그 학교 합격했었는데."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아무 대답도 안 했다.
어머니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정치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는 낯설었고, 처음으로 역할 인생에서 벗어나 어머니 개인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심술이 나서 "어차피 새누리당 찍었지 않아?"하고 놀렸다. 어머니는 절대로 아니라고 했지만, 대통령 된 사람 말고 다른 누구를 찍었다고 말 못 하는 걸 보니 아닌 게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어머니도 그걸 알겠다고, 외가가 있는 동네 사람들도 절반쯤은 돌아섰다고 말했다. 나는 그 동네 사람들 돌아섰대봐야 여전히 베트남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을 놓고 인종차별 할 텐데 뭐, 했다. 어머니는 아니라고 전화 너머로 손사래를 치다가, 그런데 요즘 젊은 여자들은 정말 못됐다고 욕 벌어먹을 소리를 했다. 그러면 나는 또 아무 대답도 안 한다.
리듬
어머니는 나에게, 결혼은 안 해도 좋으니 연애는 하고 살라고 했다. 내가 아무 대답 안 했더니 혼자 하하 웃으면서, 연애를 하라고 한다고 예 하고 하겠느냐고 또 웃었다. 어릴 때 말고는, 커버린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못 한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고, 마음대로 되던 때는 아주 어릴 때 그때뿐이었구나, 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못생긴 아기였는지를 새삼 고백했다. 너는 뽀얗지도 않고, 이마는 넙적하고, 배는 올챙이처럼 볼록해서 치마를 입히면 줄줄 흘러내리고... 그런데 요즘 어린애기들을 보면 엄마들이 어찌나 예쁘게 해서 입히는지, 나도 우리 딸 저렇게나 한번 입혀볼 걸 맨날 배 나왔다고 멜빵 바지만 입히고 머리도 제대로 안 묶어 줬다고 후회하는 말을 했다. 이마가 넙적했다는 말을 듣고 발끈한 나는 어머니와 연락 않고 살던 몇 년 새 헤어라인 수술 해서 이제 이마가 동그랗다고 자랑했다. 어머니는 수술 과정을 자세하게 물으면서, 머리 벗겨져서 죽고 싶다고 하는 동창에게 알려줄 거라고 좋아했다. 한참을 받아적더니 어머니는 너 그래서 이제 머리를 길게 기르기도 하냐고 했다. 이마가 넓던 시절의 나는 언제나 앞머리를 가득 내린 숏컷으로 지냈기 때문이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이제 나는 이마에서 머리카락을 슥슥 빗어올려 하나로 묶고 다니기도 한다고, 그렇게 머리를 올려서 묶고 발레를 배우러 간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이고 머리 기르고 파마 하고 그러면 노처녀 같겠네, 라고 했다. 나는 요즘 노처녀라는 말을 누가 쓰냐고 대꾸했다. 어머니는 요즘 꼬맹이들이 발레를 많이 배운다고, 팔짝거리면서 다니는데 그게 분홍색 옷 입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무슨 발레냐고 웃었다. 나는 발레가 원래 그렇다고, 몇 년을 해도 태가 안 난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린애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저 때로 돌아가면 어떨까, 다시 잘 해보면 어떨까, 우리 딸이 저만할 때 나는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를 하는 모양이다. 가정법 과거는 현재사실의 반대. 그래서 나는 가정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모양으로 된 삶, 나머지를 건강하게 살아가야지. 연을 끊고 아무 대화 없이 지내던 몇 년이 무색하게 한 시간 통화를 하고, 일주일 있다 또 한 시간 통화를 하고, 일주일 있다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일요일 아침이라는 핑계로 나는 전화를 안 받았다. 두 번은 받고 한 번은 안 받고. 모든 불행한 가족은 인연을 끊고 지내는 모습마저 다양하다. 이게 적당한 리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