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상한 아버지와 나쁜 어머니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는 결심을 한 뒤, 가족과 소원하게 지내는 데에 성공한 지인들에게 조심스럽게 그 비결을 물었다.
지인1: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완전 지옥이었죠. 따로 떨어져 사니까 자연스럽게 애틋해지던데요?
(나: 저희 어머니는 부산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제 자취방 냉장고 검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지인2: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냥 연락 안 하니까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시던데요?
(나: 저희 아버지는 제가 전화를 안 받으면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해서 저를 찾는 사람입니다.)
지인3: 결혼하기 전에는 다 그래요! 결혼하고 나니까 아주 편해졌거든요!
(나: 아버지의 권한이 남편에게 이전된 것뿐이잖아요… 그런 이유로 결혼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아무래도 전문가를 찾아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2.
부모 복 말고는 대체로 나는 운이 좋은 편인 것일까? 어쩌다 알게 되어 찾아간 정신과 전문의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 가족 갈등의 끝에는 무엇이 있나요?
선생님: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나: 힐링책 보니까 용서를 해야 치유가 된다던데요.
선생님: 그 이론은 예전 한때… 하여간 지금은 유행이 끝났습니다.
용서를 안 해도 된다니 이보다 더 괜찮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선생님을 50번 정도 만났다.
3.
수능 성적을 가지고 대입을 결정할 때, 나의 부모는 ‘나중에 취업하면 서울에 있는 직장 다니게 될지도 모르니 대학만은 여기서 마쳐라’라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 결정되어 서울로 가려고 하자, ‘서울 남자 만나 서울로 시집가면 영영 남이 될 테니 직장만은 여기서 다녀라’라고 했다.
과거의 나는 저렇게 같은 수법을 반복적으로 써먹어도 통할 것으로 여겨질 만큼 나약한 인간이었다. ‘네가 없으니 못 살겠다,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다’는 말을 믿고 겁에 질리는 나약한 인간. 기성 체제에 완전히 복무하고 있는 나의 부모, 즉 대도시의 아파트에 살며 중형 세단을 몰고 이성애 결혼을 통해 재생산을 하고 지역 사회의 인간관계에 완전히 포함된 그들이 ‘너 없이는 못 살겠다’고 외치는 소리가 어떤 의미를 내포한 것인지는 두 번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것을 지금은 안다.
4.
가족들이 모르게 주소를 두 번이나 옮겼지만, 그들은 흥신소 따위를 통해 내 주소를 알아냈다. 그리고 어느날 퇴근해 돌아오자 현관 앞에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악몽이다. 그러나 충분히 훈련된 나는 그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나: 정신과 치료 받으세요.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나: 당신의 인생이 힘든 건 저 때문이 아닙니다. 정신과 치료 받으세요.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나: 여기서 나가세요. 내 물건에 손대지 마세요.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나: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아냈죠? 담당 공무원 등등 고소할 테니 경찰서에서 봅시다.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나: 접근금지명령 신청한다는 게 농담 같습니까? 여기서 나가세요.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나: 딸을 찾아와 자살협박을 하는 게 당신이 말하는 부모 노릇입니까?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나: 돈 필요 없습니다. 돈은 내가 법니다.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나: 여기서 나가세요.
어머니는 가끔 스티로폼 박스에 김치, 된장 같은 걸 담아서 보낸다. 퇴근해 돌아오면 현관 앞에 그런 게 놓여 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칼과 음식물쓰레기봉투를 가지고 나온다. 가끔 박스 안에는 편지도 들어 있다.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나: 잘게 찢어서 버린다.
몇십 킬로그램짜리 바벨을 들어올리는 힘, 50미터 풀을 몇 번이고 왕복하는 힘처럼 '어머니: 가 뭐라고 말하든’ 내 입장을 고수하는 데도 힘이 필요했다. 성장 과정에서 이 힘을 자연스럽게 기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놓친 많은 기회들, 기회 비용들이 아쉽다. 그러나 자기 연민을 걷어버리고 나면 그 아쉬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홉 살 때부터 체육 시간에 선크림을 발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정도의 아쉬움이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바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