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로 산다는 것 3. 인생_수정_최종수정_마지막_진짜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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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한낮의 우울’을 쓴 앤드류 솔로몬의 우울증 관련 TED 강연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자신이 우울증 상태라면, 회색베일 속에서 부정적 생각으로 흐려진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을 가리고 있던 행복의 베일이 벗겨져서 진짜 세상을 보게 되었다고 여기죠.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생명체를 없애야 한다고 믿는 정신분열증 환자라면 오히려 치료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우울증 환자는 자신이 보는 것이 진실이라 믿기 때문에 치료가 더 어렵습니다. 진실도 거짓말을 합니다.

나도 비슷했다. 이 세상은 너무나 힘든 일들로 가득하고 그걸 견디면서 살기엔 너무 괴로우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을 매일 했고 그게 맞다 생각했다. 맞잖아, 다들 살기 힘들어 하잖아. 아주 밋밋한 일상에 가끔 행복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올 뿐이잖아. 인생은 그런 거잖아. 그런데 그만 살고 싶어 하는 게 왜 이상해? 왜 나빠? 오히려 그게 현명한 생각 아닌가? 그 생각이 깨진 건 이메일 상담을 거쳐 전화 상담을 했을 때였다. 내가 현재 느끼는 감정들을 말했을 때 상담원은 딱 잘라 ‘집에서 나오면 해결될 문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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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잘라내야 하는 것

집에서 살 때는 밖에 있어도 불안함, 두려움, 슬픔, 괴로움 등의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왜냐면 결국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 집엔 가해자가 있으니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 일로 나도 계속 힘들고 싶지 않은데, 이 집으로부터 벗어나서 정말 내 자신을 찾고 싶은데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왜 나는 이 집에 태어났지, 왜 태어났지, 죽고 싶다, 이런 생각들만 가득했다. 그 생각들이 점점 확장되고 굳어져서 내 괴로움의 원인을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인생은 원래 고통스러운 거야’라는 생각 속으로 도피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상황을 바꿀 수는 없지만 견디긴 너무 괴로웠으므로 그렇게라도 합리화를 했던 거다.

나는 내 자신이 모든 게 싫고 너무나 무기력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집을 나와 보니 가해자 때문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진작 나왔다면 좀 더 편해졌을 텐데, 요약하자면 돈이 없어서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지 못해 사는 기분으로 보냈던 그 시간들이 아깝고 안타깝다.

흔들리는 물결처럼

집에서의 시간들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쉼터에 가면 뿅 하고 새로운 삶이 펼쳐질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렵고 불편한 일인데다, 지켜야 하는 규칙들도 꽤 많아서 지내기에 아주 편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머물 수는 없기 때문에 미리 퇴소를 준비해야 하는데(즉 나가서 살 공간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 그걸 생각하면 불안해지기도 하고 원 가족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유감스럽게도 경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가족밖에는 떠오르지가 않기 때문이다.

꼭 돈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가해자를 제외한 다른 가족과의 관계는 고민이 많은 부분이다. 집에서 나온 뒤에야 엄마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깨달았다며, 앞으로는 나를 지지해주겠다며 그토록 바라던 말을 했다. 평소 엄마와는 감정적 교류가 거의 없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진작 이랬으면 좋았을 걸, 모든 게 터지고 무너지고 나서야 보이는 건지. 아님 이제라도 엄마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게 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그럼에도 가해자와의 분리가 시급했던 나에게 쉼터는 고마운 공간이고, 여기서 지내는 게 힘들다고 해도 가해자가 있는 집보다는 훨씬 낫다고 느낀다. 일단 가해자로 인한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그것에서만 벗어나도 내가 느꼈던 자살충동, 무기력감, 우울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뚜렷해지고, 더 나아가 외면하고 있었던 다른 감정들이 선명해지고, 어디서부터 어떤 것들을 바꾸어나가면 좋을지 보이기 시작한다. 심리적으로 나아지니 일상생활 전반에서도 달라지는 게 느껴지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퇴소에 대한 불안이 있어도 그걸 견딜 수 있을 만한 힘이 생기기 때문에 숱한 고민들 속에서도 크게 무너지지 않고 잔잔하게만 흔들리면서 버틸 수 있다.

단단해지는 과정

물론 모든 것이 해결된 상태는 아니다. ‘모든 것이 해결된 상태’라는 게 실재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힘들 때가 많다. 모녀가 손잡고 걸어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나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 맞은편에서 걸어오면 나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난다. 마음에 상처가 난 부분이 아주 예민해져서 그 부분을 조금만 건드려도 울컥 한다. 처음에는 집에서 나와서 내가 더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예전보다 더 예민하고 신경질 적으로 변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게 과정이라는 걸 알았다. 더듬어지지도 않는,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고통의 원인들을 조금씩 캐내는 과정이기 때문에 아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계속 견딜 수 있다면, 조금씩 더 단단해져서 삶을 견디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지속될 것이다. 여전히 아프지만 즐거울 때는 크게 웃을 수 있는 이유다. 그러니 가해자의 논리로 생존자들에게 잣대를 들이밀거나 틀에 가두지 않았으면 한다. 생존자들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도 웃을 수 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살아서 계속 만났으면 좋겠다

나는 말없고 낯을 가리는 아이였다. 마음이 힘들면 글을 썼다. 마음이 말을 먹고, 나는 그걸 글로 토해냈다. 글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식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통이 느껴지면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글을 썼다. 그런 내가 멋지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고통은 피하고 벗어나는 게 맞다 생각한다. 그런 극한의 고통이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건 오히려 내가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아서, 앞으로는 되도록 내 고통을 이용하지 않은 글을 쓰려고 한다. 당장은 노력하는 수준이지만, 나아지겠지.

예상컨대 지금과 아주 다르지는 않은 상태로,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불편한 것들을 제거하며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는 집에서 나가기만 하면, 뭘 하기만 하면 내겐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환상을 늘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환상은 깨졌지만 고통이 줄어든 만큼 현실적으로 변했고, 조금 더 단단해졌다. 확실한 건, 집에서 혼자 모든 걸 껴안고 울고 있을 때보다는 고민의 결도, 방향도 달라졌다는 점이다. 힘들고 괴롭지만 그 방향이 더 이상 죽음을 향하고 있지는 않다. 적어도 이런 글까지 써냈는데, 한껏 괜찮은 척 해놓고 죽으면 안될 것 같다. 살아서 계속 만났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와, 우리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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