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 되는 그 순간들이 모두에게 어땠는지 늘 궁금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언어로 쏟아져 나오는 그 순간들을 멀리서, 또 가까이서 응원하고 싶다. 두 번째 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하다가, 말하기에 대해 계속 얘기하면서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써 보려고 한다.
말이 빠르시네요
그저께는 국회에 다녀 왔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가정폭력전문상담원교육을 듣고 있고, 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국회 방문 일정이 있었다. 일정 중에 방문한 헌정기념관 한 켠에는 ‘발언속도가 가장 빨랐던 의원’의 이름과 얼굴이 붙어 있었다. 기념관의 안내문에 따르면 국회의원 평균 발언 속도는 분당 300자, 숙련된 속기사의 최대 속기능력은 분당 320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 ‘발언속도가 가장 빨랐던 의원’은 분당 약 468자를 말했다고 하고, 심지어 이 사람 때문에 그 후 국회에서는 속기사 두 명이 동시 속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속도가 얼마나 빠른 건지 궁금해서 더 작은 단위로 계산했더니, 초당 7.8자를 말하는 셈이었다.
처음 이 전시물을 봤을 때, 머릿속에 나와 주변을 둘러 싼 여러 말하기들에 대한 평가가 떠올랐다. 그래서 왠지 재미가 있다는 기분이 든 나는 ‘친구들한테 보여줘야지!’ 하고 각도를 잘 잡은 사진까지 촬영했다. 실은 지난 글에서 적었던 것처럼, 나는 자기소개 자리에서 말이 별로 많지 않았던 그 시절이 무색하게 언제나 어디서나 “말이 빠르시네요”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실 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속에 넘치는 말들을 꺼내는 게 어려웠던 사람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이렇게 생각이 너무 많아서 언제나 메모를 하고, 입 여는 자리에 가면 1인용 냄비에 라면 두 개 간신히 끓일 때 물 넘치듯 말하는 내가 그때는 그랬던 이유라면 간단하다.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고, 내가 내보인 내 삶을 제대로, 진지하게 읽어 준다는 보장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입을 떼는 일은 당연하게도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은 모두가 내 말을 제대로 들어 주는가? 그렇진 않다. 사실 “말이 빠르시네요”라는 말만큼 많이 듣는 말이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인데, 처음에는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얼떨떨했지만, 이제는 그 속뜻을 안다. 그런 평가에는 (네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고, 실은 네 말을 한 마디도 못 알아 들었지만) "말을 참 빠르게 잘하시네요"라는 식으로, 괄호 안의 소감이 함께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작 말의 내용에 대한 평가와 반응 없이 내게 너무 쉽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을 빨리 할 필요가 없어서 말을 빨리 안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많이, 쉽게 주어지고,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눈치 보며 급하게 그걸 내려 놓을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들. 그들로부터 이루어진 내 말하기에 대한 이런 평가는, 마치 63빌딩 아쿠아리움에서 돌고래쇼를 보고 난 관객들이 “돌고래가 참 쇼를 잘하네!” 하고 박수를 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걸 알고 나서 나는 주변에 유독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면서도 말하기 속도가 빠른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쭉 둘러 보고, 그들과 나의 공통점, 차이점을 찾아 보게 되었다.
하여간,사진을 찍어서 친구들에게 SNS로 공유하고, 그 게시물에 “잘못된 만남 정도의 속도인가”, “ 뭐 아웃사이더였나” 같은 댓글이 달리는 동안은 나도 같이 웃었는데, 그놈의 생각이란 걸 또 계속 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말이 빠르시네요” 같은 평가로 쉽게도 넘겨버리는 이 사회가 이 ‘발언속도가 가장 빨랐던 의원’의 말은 속기사 한 명이 기록 처리할 능력이 안 되니까 두 명이나 붙어서 기록으로 남겨주고, 이렇게 국회 내 기념관에 삼선 의원 경력까지 함께 기록된 안내문을 써 붙였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발언속도가 가장 빨랐던 의원’과 내가 어쩌면 좀 비슷한 처지였을지도 모른다는 그 유추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그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봤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판사 출신 아저씨였다. 그럼 그렇지.
엄마
말이 엄청 많지만 그 말을 사람들이 좀처럼 제대로 받아 주지 않는 어떤 사람을, 꽤 잘 안다. 나도 한때는 그의 말을 듣는 걸 몹시 귀찮아했다. 그는 나를 낳고 또 인간을 넷이나 낳았는데, 이제는 그 애들이 그만 모두 스무 살이 넘고 거의 모두 그 사람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지금까지 이런저런 말을 참 많이 하면서 살아 왔다.
엄마라는 이름에는 불필요한 감정과 편견과 논란의 여지들이 잔뜩 들러 붙어 있어서 나는 웬만하면 그를 직접 부를 때도, 내 친구들에게 그에 대해 말할 때도 그의 이름을 쓰는 식으로 그에게 이름을 돌려 주려 애쓴다. 하지만 공개된 곳에 실명을 쓰는 걸 허락 받을 만큼 우리가 정치적으로 긴밀한 사이가 아니어서, 이럴 땐 곤란하다. (환갑을 바라보는 그는 태극기 집회에, 30대를 보내는 나는 낙태죄 폐지 집회에 참여하는 것.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열망, 행동력, 그리고 두 집회의 성격, 그쪽과 이쪽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 시선, 평가, 이런 것들이 우리의 닮음과 차이와 거리를 말해 준다.)
고민을 해 봐도 뭐라고 달리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여전히 그를 여기서부터는 ‘엄마’라고 적을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깝다. 가명을 쉽게 짓기도 망설여진다. 엄마의 이름은 설상가상 엄마의 아빠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고민 끝에 지은 이름 석 자를 불러주었을 때 그만 사투리 화자들의 조음 능력 및 모음 변별 능력을 사유로 한 의사소통 상의 오류로 덜컥, 잘못 쓰여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이혼을 해내는 날 자신이 갖고 싶은 이름을 새로 갖기를 바라며 엄마를 섣불리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를 저어한다. 남의 선물 포장지를 뜯어버리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될까봐.
엄마에게 나 어릴 때를 물어 보면, 엄마는 늘 ‘갓난쟁이’였던 나를 어디든 안고 다니며 엄마가 말도 못하는 내게 얼마나 많은 말을 걸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엄마가 내게 얼마나 최선을 다해 ‘어른 말’을 걸었는지, 그래서 내가 참 신기하게도 ‘애기 말’을 하지 않고 바로 ‘어른 말’을 했는지, 또 내가 한글은 얼마나 잘 깨쳤는지, 그 후 책을 얼마나 많이 읽어댔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기억이 안 나는 그때의 우리를 상상하면 나는 또 재미가 있는데, 엄마야말로 조그마한 인간인 나와 처음으로 언제나 함께 다니고 내게 말을 많이 걸어서 끝내 말을 하고 글을 읽게 만든 게 좀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는 엄마의 아빠가 일찍 죽고, 엄마의 엄마가 ‘재가’한 다음 집안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바람에 너무 빨리 아이 역할을 그만 둬야만 했고, 그래서 좀 외로웠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 삼아 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 때문에 덜컥 결혼까지 해 버렸고.
가난뱅이
조그맣던 내가 어느덧 자라서 말을 잘하게 되고 나는 금세 엄마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뿐 아니라, 나는 방언이 그다지 특색 없는 지역에서 거의 모든 음운을 정확히 발음하는 화자로 자랐기 때문에, 엄마의 독특한 사투리 억양 같은 것을 따라하면서 놀리기도 했다. 십대 시절에는 특히 성격이 너무 나빠서, 그날도 뭐라뭐라 아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말을 하는 엄마에게 “지금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문장성분에 맞게 다시 말해 봐”라고 한 적도 있다. (그리고 미안하게도 엄마는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한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 내가 아주 못됐긴 했는데, 그랬던 데는 이유가 있긴 있었다. 얼마 전 정희진의 강연을 들으러 갔을 때 학교에서 아이가 조금 조는 정도가 아니라 내내 자는 아이가 있으면 교사가 그 애를 유심히 관찰해서 혹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게 아닌지 알아 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학창시절에 늘 너무너무 잠이 많은 애로 꼽혔는데 그 이유는 아마 일상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 살아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이사를 너무 많이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잠깐 교회를 할 때는 월세를 밥 먹듯이 밀려서 주인집 할머니가 거의 매일 고함을 지르며 교회 겸 집에 내려와 큰 소리로 욕을 했다. 결국 그때의 생활은 모두 빚이 되어 나중에는 부도난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채권추심단의 방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는 엄마 남편은 엄마의 거의 모든 말을 무시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엄마의 평판을 깎아 내리고 너무너무 망신을 주고 나의 엄마같지 않은 부분, 예를 들면 공부를 잘 한다는 부분과 ‘여자다움’을 칭찬했는데, 나는 그 중간에 끼어서 둘의 말 중 어떤 것이 더 ‘객관적인 말’인지를 판단하느라고 너무 많은 정신력을 소모했다. (덕분에 객관과 정상에 대한 강박이 있고 스스로 ‘아이’라고 인식한 적이 거의 없는 이상한 애로 자라났다.)
‘가난뱅이’는 ‘여성’만큼이나 나의 큰 정체성이다. 나는 교복을 입기 전까지 집 근처 아파트 단지 의류수거함에 있는 옷을 주워서 입었고, 혹시 내가 입은 옷을 버린 그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같은 반에 있을까 봐 좀 눈치를 보면서 학교에 다녔다. 누군가 못 보던 옷을 입고 나타난 내게 “새 옷 샀니?”하고 물어보면 곤란해서 대답을 못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와 새벽에 외투를 입고 별을 보면서 손을 맞잡고 입김이 잔뜩 나는 채로 우유 보급소에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와 요구르트를 주우러 다닌 때는 사실 일고여덟 살쯤의 나이라 좀 신났던 기억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도 어릴 적 내 삶의 위치를 잘 설명해 주는 풍경이기도 하다.
내 삶 직면하기
매를 많이 때리고, 굶기고, 어딘가에 아이를 가둬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사건들이 가정폭력의 대표적 이미지이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재현하고 서술할 수 없는 폭력도 무수히 존재한다. 물론 내 학교 선생님들은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너무 식상한 말이지만, 폭력은 폭력을 만들어 낸다. 이런 해석의 틀을 갖게 된 건 이제 내 경험이 자원이 되었기 때문이고, 내가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겠다. 페미니스트로 나 자신을 인식하고 경험을 재구성하게 된 것은 이런 데 도움이 되었다. 엄마 남편과의 관계를 끊어 내면서 통념과 감정에 속지 않고 감정의 장막 너머를 또렷하게 뜯어 보는 데에, 또 엄마와 나의 엉망이었던 관계를 다시 풀어나가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보폭을 맞춰 나가는 데에. 지금도 넘쳐나는 엄마의 말들에서 어떤 말을 귀담아 듣고, 의미값을 찾아내고, 때로는 적절한 응답을 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페미니즘의 힘이었다.
그런 힘을 기르게 해 준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언니’ 최현숙에게 이 글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녀의 생애구술사 작업물들을 따라가며 그의 시각으로 세상과 사람을 다시 들여다 본 그 경험과 시간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직도 가난과 폭력, 여러 ‘비정상’들로 가득차 자칫 자기연민에 빠지기 쉬운 내 삶을 똑바로 직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