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먹고 살기는 바쁘다. 오전 일찍부터 과외를 하고 원고를 쓰려고 카페에 들어 와 앉았다. 다른 원고 하나를 마무리해서 보내고,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붙잡고 이 원고 아이디어 메모를 붙잡고 있는데 바짝 붙은 옆자리에 커플이 들어와 앉았다. 둘의 대화가 너무 시끄러워서 이어폰을 끼고 원고 작업을 계속 하려고 했지만 오늘따라 이어폰을 안 가지고 왔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둘의 대화를 듣고 앉아 있었다.
여자는 하이힐을 신고 왔는데, 앉자 마자 발이 너무 아프다며 올리브영에 가서 신발에 붙이는 패드를 사다 달랬다. 남자는 “누가 그런 신발을 신고 오래?” 했지만 선뜻 카페 밖까지 나갔다 왔다. 이후 둘은 핸드폰을 들여다 보거나 여자가 화장을 고치며 별 내용 없는 대화를 계속 했다. 여자가 뷰티 유투버 말투를 따라하면서 남자의 눈썹을 정리하고 파우더 팩트를 남자의 얼굴에 두드려 주더니, 셀카를 여러 장 같이 찍기도 했다. 어떤 건 “‘장애인’처럼” 나왔다느니, 여자 얼굴에 왜 수염이 있냐느니, 사진을 좀더 ‘톤업’하면 수염이 잘 안 보여서 괜찮다느니, 실물을 못생기게 찍는 카메라라느니 하면서 서로 놀리면서 웃고 떠들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친인척들 얘기를 하고, 지나가듯 결혼 얘기도 했다. 정말로, 그냥 보통의 커플이었다.
이 커플들이 왜 ‘보통’이라고 생각하냐면, 나의 이전 연애들도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비혼지향생활공동체를 만들었고 탈연애선언 프로젝트를 하고 있지만 그때 나는 지금과는 좀 다른 사람이었다. 당시 내 삶의 중심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연애였다.
공부, 아르바이트, 연애
이십 대 후반까지 내 삶은 크게 세 축으로 돌아갔다. 공부, 아르바이트, 그리고 연애. 이 중에서 공부와 아르바이트는 재밌어서 한 건 아니니까, 내가 재밌다고 생각한 건 연애 하나뿐이었다. 첫 대학을 다닐 때 모든 학기를 장학금을 받고 또 수석 졸업을 할 만큼 학과 공부를 나름 열심히 했다. 아르바이트는 학업을 하는 시간을 뺀 거의 모든 시간을 이용해서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어떻게든 비는 시간대를 이용해서 연애 상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주변에서는 “공부하고 알바하는 것만큼 연애도 열심히 하는 애”라고 평가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2014년, 메갈리아가 생기기 딱 일 년 전에 나는 햇수로 여섯 해를 지속해 오던 마지막 ‘정상연애’에 실패했다.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커플들이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식의 연애 말이다. 그 이후로 나는 웬일인지 내 삶의 모든 것이 망가졌고, 더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때 정말로 죽으려고 했고, 죽지 못해서 살았다. 몇 년 전이지만 비교적 기억이 잘 난다. 그때 듣던 노래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노래들을 틀면 그때의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 그렇게까지 마음이 많이 아픈데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었고, 겨우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다시 눈물이 나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빼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못했다.
그때 나는 앞의 학교를 마무리하고 다른 공부를 하려고 학교를 옮긴 차였다.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면서 독학해서 어렵게 들어간 학교는 연애 실패 후에 학교를 점점 제대로 못 나가게 되면서 결석일수가 너무 많아져 중도휴학해야만 했다. 옮긴 학교도 첫 학기는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는데, 전에 휴학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중도휴학을 하면 장학금을 그만큼 뱉어내야 한다는 걸 몰랐다. 한 번에 백이십만 원이나 하는 큰 돈을 얻을 데가 없어서 곤란해 하다가, 아르바이트하던 곳의 사장님에게 어렵게 전화해서 돈을 빌렸다. 그러고 나니까 월세랑 식비도 내고, 그 돈도 갚아야 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는 날은 아마도 죽는 날이었다.
하나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주민센터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같이 하고 있었다.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앉아 있는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했다. 공부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을 붙잡고 강의를 하는 일은 에너지가 아주 많이 드는 일인데 그때 나는 에너지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우선 강의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먼저 화장실에 들어가서 충분히 울었다. 눈물을 충분히 ‘빼냈다’는 느낌이 들면 눈물 자국을 지우고 파우더 팩트로 꾹꾹 눌러서 얼굴을 말짱하게 보이도록 만든 다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칠판을 소리나게 두들기며 목소리를 높여서 “숙제들은 다 했어?”로 시작해서 “다음 시간에 꼭 여기까지 풀어와”로 끝내는 두 타임의 강의를 마치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졌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는 또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그때, 그리고 또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내가 가장 난감하고 곤란했던 건 이런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힘든 이유를 그 누구에게도 잘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통속적인 유행가 가사들이 모두 내 맘 같았고, 그 가사들은 모두 이별이 정말로 슬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작 그렇게 설명하기엔 스스로 너무 쪽팔렸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정말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겨우 연애가 망한 것 때문에 학교도 못 다니고 장학금을 돌려 줘야 하고 그걸 갚아야 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로 나약하게 굴었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내 삶은 하나도 완벽하지 않았다. 단지 완벽하다고 믿었던 연애 하나만 빼고. 나를 둘러 싼 환경들 중 완벽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물론 경제적 지원이 거의 전무한 집안 환경 탓이 컸다. 엄마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복지제도 안에 우리 집 식구들을 밀어 넣고 서류에 걸리지 않는 너무 많은 일을 했지만, 다섯 남매를 먹여 살리고 공부를 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를 부양하는 데에 지쳐서
나는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늘 세 가지 이상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보통은 평일 정규 시간대에는 시간표를 짜고 남는 시간에 근로장학을 하고, 저녁 시간대에 과외를 하고, 주말에는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이었다. 그밖에도 외주로 일을 받아 교정교열이나 서평 원고, 학교 홍보지와 인터넷 언론 기사 같은 걸 쓰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회는 나의 노동을 ‘학생 아르바이트’라며, ‘프리랜서 일’이라며 ‘남성생계부양자’의 노동과는 다른 것으로 후려쳐 왔지만 스무 살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나의 생계를 부양하는 사람이었다.
그 무렵 내가 문예창작학을 공부한 다음 다시 여대의 영문과에 들어간 것은 내가 해 본 그 많은 일들 중에 가르치는 일이 시간 대비 가장 고효율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 생각에 한국엔 영어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영어 관련 전공생이 밥을 굶을 일은 없어 보였다. 그 생각은 맞아 떨어져서, 전공을 옮긴 후 나는 서서히 다른 아르바이트들을 그만 두고 한 동네에 입소문을 내 과외를 서너 개 구했다. 그렇게 주민센터 방과후 교실의 강사 자리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불안정한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그 삶은 사서 고생하고 노력하는 아름다운 ‘청춘’의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삶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게는 완벽한 연애와 완벽한 결혼, 그 이후의 완벽한 가정이 필요했다. 그 말은, 그때 나는 이성애-정상가족 중심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 남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완벽하고 싶은 사람이었고, 연애는 그렇게 노력하는 내 삶을 엄마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만들어 줄 유일한 카드였다.
하여간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사랑에 실패한 게 아니라 내 삶을 ‘정상성’의 트랙 위에 올려 놓는 데에 실패한 것이었다. 이때의 경험이 내게 너무 큰 고통이었음을 남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다가 여러 번 실패했고, 타인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았다. 그리고 그런 시기를 한참 더 많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정말로 알게 되었다. 고통은 원래 남들에게 설명할 수 없고, 아무리 많이 설명해도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고, 그래서 고통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눈을 쉽게 가리는 감정의 장막을 들추고 우리 각자의 고통이 발생하는 구조를 좀 더 자세히,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