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하면 돌아오는 사람들의 반응은 선선한 편이다. 젊은 여성 둘의 생활이라는 게 아기자기한 인상을 주는 모양이다. 어쩐지 귀여워하는 느낌이랄까. 여기에 함께 산 지 5년이 넘었다고 하면 조금 놀란다. 싸우지 않느냐는 말 다음으로 많이 듣는 질문은 “친구는 결혼 안한대?” 다. 줄곧 “글쎄요. 저희 둘 다 아직은 별 생각이 없어서요” 로 가볍게 일관해 왔지만 어느 순간 질문이 울컥 올라왔다. 왜 우리의 현재를 건너뛰고 미래를 물어보지? 지금 나와 친구가 꾸려나가고 있는 생활은 결혼 전의 일시적인 소꿉장난에 불과해보이는 걸까?...
결혼은 안 할거에요? 직장 동료가 묻는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 복잡한 거짓말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런 거 관심 없다고 해야 할 것만 같다. 나이를 몇 살 더 먹자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한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꿈꾸는 표정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너는 그런 거 관심 없잖아. 친구들은 내가 결혼을 별로 안 하고 싶은 줄 안다. 젊은 날의 내가 ‘사랑은 이데올로기고 연애는 성역할 수행’이라고 바락바락 우기던 게 기억에 남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예전엔 정말 결혼을 꿈꾸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삶이 좋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는 게 즐거웠다. 우리 엄마도, 엄마...
결혼을 삶의 선택지에서 제거하면서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지워버린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었다. 임신과 출산, 양육. 국가에서 아무리 출산력 지표를 만들고 나를 가임기의 자궁으로 보아도, 출산과 육아는 내게 완전히 비현실 이다. 결혼의 기미도 없는 딸에게 갑자기 손주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치는 아빠에게 화도 안났던 것은 너무 터무니 없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손주라니. 그게 무슨 소리람. 코로 웃어 넘기는 내 옆에서 아기라면 껌벅죽는 엄마도 손사래를 쳤다. 나는 서울에서 친구와 둘이 살고 있는 30대 초반의 여성이다. 월급을 받아서 월세를 낸다. 내가 나를 먹이고 입히고 기르는 이 일인분의 경제에 아...
문제는 집이다. 얼마 전에 지역에서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여성 비혼공동체 멤버분의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 가장 답을 구하고 싶었던 것은 솔직히 주거안정 문제였다. ‘집은 어떻게 하셨나요?!’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는지 강연 중에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초지종을 들으며 나는 ‘역시나’, ‘이럴 수가’, ‘부럽다’가 섞인 복잡 미묘한 탄식을 조그맣게 내뱉고 말았다. 살고 있던 지역에 거주기간 50년이 보장되는 반영구 공공임대주택이 생겼고 비혼 멤버 중 한 사람이 신청해서 입주했다. 직접 들어가보니 다른 멤버들도 입주할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한 결과 한 명씩 같은 아파트단지에 들어와 모두 가까이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월...
아주 가까이에서 여자친구의 눈을 들여다봤던 적이 있다. 해질 녘의 눈부신 햇빛 때문에 한층 더 연해보였던 갈색 눈동자는 언제나 또렷한 심상으로 떠오른다. 나는 작년까지 그 부드러운 질감의 연애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헤어질 때 비겁하게 굴었던 스스로를 외면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동성과의 연애 경험이 있다는 걸 숨기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벨기에였던가. 나중에 동성결혼이 합법인 나라에 가서 살자고 농담처럼 이야기했을 때 마음 속에 떠올랐던 당혹감도 생각난다. 이별을 생각하진 않았지만 ‘우리 둘 다 좀 먼 미래엔 남자를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희미하게 스쳤던 것 같다. 여성 둘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게 단지...
나이에 호들갑 떠는 게 늘 싫었다. 뭐하나 내 뜻대로 할 수 없던 십대 시절에 “그때가 좋을 때다” 소리를 듣는 것도, 겨우 스물 한 살이 된 동갑내기들이 “우리는 헌내기야”라며 자조적인 코드를 만들어 공유하는 것도, 함께 활동해 온 동료를 ‘친구’라고 소개하면 “아 둘이 동갑이야?”라는 질문이 돌아오는 것도 늘 어이 없었다. 스물 아홉살의 겨울, 아빠는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흥얼거리며 놀리듯 서른 살이 되는 소회를 물었지만 내 안에 그런 것이 있을리가....
나는 가정 내 학대 피해자를 돕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학자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대 피해자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얼마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연재를 시작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크게 두 방향이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을 조금 더 메타적 으로 인식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누구나 자기 탓을 한다. 내가 말썽을 피워서, 내가 빌미를 줘서, 내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그 사람들에게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보여 주어서 결국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임을, 당시 가해자가 어떤 생각으로 당신을 괴롭혔던 것인지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게...
두 번째 에피소드( 서바이벌 게임 - 길모어 걸스 )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왔던 지점으로 되돌아가 본다. 2014년 6월의 일이다. 누군들 그 시절이 편했겠냐마는, 나는 잠을 못 잤다. 잠을 자는 것이 삶에 꼭 필요한 휴식이며 밤이면 잠자리에 가만히 누워서 몸과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새벽까지 뉴스 사이트를 새로고침하다가 두어 시간 눈을 붙인 뒤 출근을 했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지 않고 휴게실에 숨어 있었다. 원양어선을 타던 큰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것은 내가 아홉 살 때였다. 친척들은 나머지 아들, 즉 우리 집 거실에 대책반 비슷한 것을 꾸렸다. 놀랍게도 가장 가까운 유가족인 큰어머...
알려주고 말았다 지난 회에서 이야기한 바, 나는 지난 여름 집 앞으로 찾아온 어머니에게 내 소중한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말았다. 왜 그래야만 했던가 손톱을 깨물고 입술을 깨물며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다. 부모와의 절연을 시도한지 2년만에 전화번호를 트고 말아버리게 된 것이다. 내 번호를 받아가며 어머니는 본인이 많이 변했다고, 정말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절대로 예전처럼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미 앞 문장 1/2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짐작하셨겠지만, 사람은 안 변한다. 어머니는 예전과 다름없이 아무 시간에나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못하면 원망하는 메세지를 보냈다. 2년간 왕래가...
어머니는 59년생이다. 경남에서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살림 밑천이 어쩌고 하는 소리라면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여상을 졸업해 공장에 다니며 남동생들 도시락을 싸다가, 스물넷에 맞선을 보고 좋다싫다 말해볼 새도 없이 아버지와 결혼했다. 이듬해에 딸을 낳은 어머니는 어머니라면 다 한다는 그 각오를 했다. "이 아이는 절대로 나처럼 살게 하지 않을 거야." (※ 그런데 놀랍게도 3년 뒤 아들도 낳았다.) 왕비와 공주 놀이 어머니는 모든 삶의 모습이 당신처럼 살거나 혹은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살거나의 딱 둘뿐인 줄 알았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그 모양이었던 원인을 '부모가 딸이라고 공부를 시켜 주지 않아서...
두 번 연재를 시작할 즈음과 비교해 그때와 지금 나의 삶에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어머니와 두 번 통화했다. 두 번 다 한시간여 이어진 장시간의 통화였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제법 자분자분한 대화가 오갔다. 어머니는 나에게 김치 보내준 것은 좀 먹느냐고 물었다. 나는 요즘 사람들은 김치처럼 짠 것을 피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오미자즙을 보낼테니 샐러드 드레싱으로 먹으라고, 깨를 찧어서 섞으면 바로 드레싱이 된다고 했다. 나는 하루에 열 시간 넘께 회사일을 하는 1인 가구 구성원이 싱싱한 야채와 깨와 깨 빻는 도구와 오미자즙과 샐러드 먹을 식욕과 여유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