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게임: 삶의 여러 가지 모습

생각하다가족독립

서바이벌 게임: 삶의 여러 가지 모습

진영

솜솜

어머니는 59년생이다. 

경남에서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살림 밑천이 어쩌고 하는 소리라면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여상을 졸업해 공장에 다니며 남동생들 도시락을 싸다가, 스물넷에 맞선을 보고 좋다싫다 말해볼 새도 없이 아버지와 결혼했다. 이듬해에 딸을 낳은 어머니는 어머니라면 다 한다는 그 각오를 했다. "이 아이는 절대로 나처럼 살게 하지 않을 거야." (※ 그런데 놀랍게도 3년 뒤 아들도 낳았다.)

왕비와 공주 놀이

어머니는 모든 삶의 모습이 당신처럼 살거나 혹은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살거나의 딱 둘뿐인 줄 알았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그 모양이었던 원인을 '부모가 딸이라고 공부를 시켜 주지 않아서'인 것으로 진단했다. 딸에게 피아노를 한 대 사 주는 것으로 로망 실현의 첫 테이프를 끊은 어머니는 몇년 뒤 그 피아노를 팔아서 받은 돈으로 다시 흰색 침대를 사 주는 것으로 왕비와 공주 놀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딸이 중학교에 입학한 때부터, 마치 전시에 적군의 병사가 쏘아보내는 총알을 피하라고 아군에게 외치는 것처럼 딸에게 공부를 하라고 소리질렀다.

어머니는 공부가 무엇인지 몰랐다. 동기 부여나 진로 지도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냥 막무가내로 공부를 하라고 새된 소리를 지르고, 겁에 질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딸애가 엎드려 잠이 들면 또 절망하여 소리를 질렀다. 사실 그 딸은 공부를 곧잘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이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도 몰랐다. 모의고사를 봐서 일등 했다고 성적표를 가져가면, 넌 내신 성적이 엉망인데 모의고사만 잘 봐서 뭣에 쓰냐고 저주했다. 대입 전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 학부모는 입시 시장에서 좀처럼 활약이 어려워 보였다.

마침내 딸은 고3이 되었다. 넌 공부도 못하니까 뭣 해서 먹고 살 거냐, 그냥 굶어 죽어 버리라는 말을 밤낮으로 듣던 딸은 수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교1등을 했다. 놀랍게도 서울대 빼고는 다 갈 수 있는 저주받은 성적이었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몇 군데 시험을 봤고 전부 합격했다. 하지만 여러분, 지방의 딸들은 서울대를 갈 성적이 못 되면 연고대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국립대에 가야 한답니다! 딸은 거실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을 했으면, 우리 집은 돈이 충분히 없으니까 딸을 서울 사립대에 보내는 결정을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을 했으면 애초에 원서를 제대로 쓰지 않았겠느냐고 항의하자 어머니는 말했다.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넌 공부 열심히 안 했을 거잖아?" 정말 악마 같았다. 아버지는 옆에서 거들었다. "부모들은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까불고 있네! 지방대라도 보내 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라."

그들처럼 살지 않는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딸이 당신들처럼 살기를 바라지는 않으나 반드시 당신들이 바라는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당신들이 바라는 딸의 삶은 부모 슬하를 벗어나지 않고 조신하게 지방국립대를 졸업해 얌전한 자리에 취업을 하고 자랑할 만한 데에 시집을 가는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각오가 지향한 바와 디테일한 측면에서는 조금도 일치하지 않으나, 어쨌든 지금 그 딸은 전혀 어머니처럼 살고 있지 않다. 아버지 젊은 시절에 다니던 회사에 입사했지만 아버지처럼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실패한 양육이나, 딸 된 나로써는 이만하면 꽤 성공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머니처럼도 안 살고 아버지처럼도 안 살며, 그들이 바라는 대로도 안 산다.

※ 딸과 세 살 터울로 태어난 아들은 이상하게 안 시켜도 공부를 잘 했다. 딸에게는 패악을 부려야 했지만 아들은 순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집안의 모든 계란을 아들의 바구니에 담기로 했다. 대입에 성공해 기숙사로 떠난 아들은 그러나 감시하는 어머니가 없자 금방 옆길로 샜다. 뻔하게도 게임에 빠진 거다. 그 학교는 한 학년에 이런 케이스가 꼭 한둘은 있다고 했다. 선행학습을 통해 1학년 진도를 다 빼고 들어온 특목고 출신 동기들에게 어차피 밀릴 싸움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한두 학기 쉬는 동안 영어 공부라도 하라며 학원비를 쥐어줬다. 당시 대학 졸업반의 딸은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학비를 벌겠다고 부촌의 입시학원으로 알바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알바를 위해 집을 나서려던 딸은 아들의 방에서 터져나온 어머니의 비명을 듣는다. 담배 쩐내가 가득한 아들의 가방에서 약간 헐린 학원비 봉투가 고스란히 나온 것이다. 아들은 영어학원에 간다며 집을 나서 동네 피씨방을 전전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딸에게 당신은 지금 꼭 죽어버릴 것 같다고, 제발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딸은 알바를 가려고 챙겨들었던 가방을 내려놓고 아들의 등짝을 발로 걷어찼다. 빌어먹을 새끼. 게임을 하고 싶으면 니가 돈 벌어서 해. 어머니는 계란을 영 잘못된 바구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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