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게임: 메타 인지

생각하다독립가족

서바이벌 게임: 메타 인지

진영

나는 가정 내 학대 피해자를 돕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학자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대 피해자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얼마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연재를 시작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크게 두 방향이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을 조금 더 메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누구나 자기 탓을 한다. 내가 말썽을 피워서, 내가 빌미를 줘서, 내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그 사람들에게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보여 주어서 결국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임을, 당시 가해자가 어떤 생각으로 당신을 괴롭혔던 것인지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게 하고 싶다. 나머지 하나는 피해자들이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돕는 것이다. 부모와의 인연을 끊어도, 가족이 없어도, 비상연락망에 적어넣을 어른의 전화번호가 없어도 괜찮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내 잘못이면 어떡하지?

노이로제 환자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망상 중 하나가 ‘내 몸에서 냄새가 나면 어떡하지?’라고 한다(실제로 몸에서 냄새가 나는 지하철의 남성들은 이런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강박적으로 몸을 씻어대고 옷을 갈아입는다. 교복을 입던 시절, 나는 밤늦게 귀가해서라도 욕실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 교복과 체육복을 꼭 빨았다. 아주 조용히 몰래 빨아서 말려야 했는데, 들키면 쓸데없이 외모에 신경을 쓴다고 야단을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급우들의 비행과 비교해 보면, 머리를 염색하거나 용돈으로 아이라이너를 사서 야단을 맞았다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체육복을 세탁하다가 ‘멋 부리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공부는 안 한다’고 야단을 맞았다는 애는 없었다. 굉장하지 않은가? 반면 남동생은 스스로 체육복을 빨 필요가 없었다. 엄마가 남동생의 시간표를 외우고 있어서 매번 세탁한 체육복을 챙겨주었다.

열몇 살의 내가 저런 일을 겪으면서 ‘메타 인지’를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한참 늦된 애였다. 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도 나의 잘못, 체육복에 냄새가 배게 만든 것도 나의 잘못, 욕실에서 대야 끄는 소리를 내서 엄마를 깨운 것도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정말 미웠다. 그래서 더욱 주눅든 애가 됐다. 아무 것도 아닌 일도 일단 숨기고 봤다. 밖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가족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비빌 언덕이 없는 나를 크게 해치지 않고 이만큼이나 지내게 해 준 사회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엄마는 왜 누나한테 화풀이 해요?"

반면 나의 남동생은 이 광경을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본 덕분에 정확한 관찰을 할 수 있었다. 동생이 중학생, 내가 고등학생이던 어느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푸닥거리가 벌어졌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라고 해 봐야 입은 옷과 입지 않은 옷을 한데 넣어둔 것(서랍을 한 칸밖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에게 선물한다면서 편지지를 쓰지 않고 잡지를 오려 편지봉투를 만든 것(이게 유행이었습니다만) 등등이었는데 남들이 봤다면 내가 집문서를 가져다가 도박이라도 한 줄 알았을 것이다. 

여튼 그 일상적인 푸닥거리를 지켜보던 동생은 그날따라 뭔가 결심한 바가 있었는지 엄마에게 “엄마는 왜 누나한테 화풀이 해요? 지금 다른 거 때문에 기분 나빠서 누나한테 화풀이 하는 거잖아요?”라고 말했다. 통쾌한 한 방이었다. 엄마는 키가 자기보다 큰 아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자 꽤 충격을 받은 것처럼도 보였다. 영화 속 에피소드였다면 그 날 이후 부모나 내가 각성해서 상황을 ‘메타 인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한참이나 그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성인이 되었고, 그러고서도 또 한참이나 다종다양한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나에게 이런저런 가족 이야기를 들은 한 지인은 나더러 진영님 너무 착했고 순진했네요, 하면서 ‘그런데 저기 혹시,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건 언제 아셨어요?’ 했다. 참 나… 그건 여섯 살 때 알았다고요. 유치원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니 선물을 챙겨 보내달라는 말을 들은 엄마가 겨울용 내복을 포장해서 보냈기 때문에. 남동생은 변신 로봇을 받았다. 나는 로봇 눈을 붙이고 놀았다. 

진영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서바이벌 게임

이 크리에이터의 콘텐츠

독립에 관한 다른 콘텐츠

가족에 관한 다른 콘텐츠

핀치클럽에 가입하세요

핀치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여성의 삶,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
더 많은 여성 작가 작품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핀치클럽 한정 정기 굿즈는 물론,
크리에이터와의 대화 등 핀치의 행사에
우선 초대 혜택이 제공됩니다.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핀치클럽이 되세요

핀치클럽 월 9,900원 - 더 나은 여성의 삶을 위한 연재 콘텐츠가 무제한!

핀치클럽 알아보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