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게임: 왜곡된 기억

생각하다독립

서바이벌 게임: 왜곡된 기억

진영

부모와의 단절을 결심한 나에게 모친은 늘 말했다. 그래도 결국 의지할 곳은 가족밖에 없다고, 밖에서 험한 일이라도 당하면 네 편이 되어줄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고 했다. 과연 그러한지 생각해 봤다.

이때껏 살며 내가 겪은 ‘험한 일’은 대체로 가정 내에서 일어났었고, 그 사실을 가정 밖의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음으로 인해 나는 2중고를 겪어야 했다. 2009년경 트위터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나는 내가 겪은 고통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얼굴도 모르는 ‘트친’들은 나를 다양한 방식으로 위로했다. “님 나이가 00살 정도 아니세요? 7-80년대도 아니고 요즘도 그런 일 겪는 사람이 있어요?”라는 멘션이 기억에 남는다.

내 기억에 짙게 남은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시내에 나가 특별활동 준비물로 십자수 재료들을 샀다. 곧바로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나는 십자수 재료가 든 봉투를 학원 강의실에 놓고 집에 돌아왔다. 책가방 안에 준비물 봉투가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패닉 상태에 빠졌는데, 용돈을 받아서 준비물 2만원어치나 샀으면서 덜렁대고 다니느라 잃어버렸으니 크게 야단맞을 게 뻔했고, 다시 살 돈을 받을 수 없어 빈 손으로 학교에 가면 선생님에게도 야단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이례적으로 엄마가 나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엄마는 차로 나를 학원에 데려다 주고 학원 선생님에게 부탁해 내가 수업받은 교실에 들어가볼 수 있게 해줬다. 다행히 의자 위에 준비물 봉투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그걸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끅끅거리느라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엄마는 내 등을 쓸어내리며 “우리 딸이 착해서, 이런 일에도 놀래서 우네…” 했다. 이 기억이 내가 가정 내에서 겪은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돌봄의 기억이다. 너무나 이례적이어서 그 날의 풍경이 머릿속에 영화처럼 그대로 각인되어 있을 정도다. 거듭 말하지만 평소 나의 부모는 내가 저런 실수를 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언성을 높여 야단을 치고 나를 비난하고, 마치 흥에 겨운 사람처럼 나의 온갖 잘못들을 구슬에 실 꿰듯 줄줄 꿰어올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날은 아마 엄마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었던 거다.

우리가 한때는 얼마나 다정했는데

문제는 내 부모의 머릿속에는 저런 정상적인 에피소드만이 한가득 저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많은 학대 가해자들은 ‘내가 피해자를 얼마나 아꼈는데’ ‘우리가 한때는 얼마나 다정했는데’ 하며 가해 사실을 부정하는데, 책임을 피하려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기억을 저런 식으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가정의 정상적인 에피소드만을 편집해 상영해 보면 일견 화목한 구석이 보이기도 한다.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나는 외출을 하면 시내 유명한 제과점에 가서 엄마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 귀가하기도 하고 휴일에는 아빠가 좋아하는 영화(심형래 감독의 <디 워>였던 게 문제다.)를 예매해 함께 보기도 했다. 부모는 ‘쟤가 어릴 때는 공부를 못 해서 속을 썩였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화목하니 다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전혀 괜찮지는 않았다. 그런 화목한 풍경은 괴롭힘 당한 기억을 씁쓸하게 끌어안고 겉에 설탕을 발라서 목구멍으로 삼키는 데만 문제없게 한 조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엄마는 자신에게 사근사근하게 굴지 않는 나를 여느 때처럼 코너에 몰아붙여 질타했고 견디다 못해 나는 진실을 말해 버렸다. 당신들이 나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이 싫다, 과거의 기억이 대비되어 떠올라 더 괴롭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거리두고 지내자고. 엄마는 나에게 ‘우리가 언제 너를 그렇게 괴롭혔냐, 애가 정신이 이상해졌다, 정신과에 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씀 받들어 나는 정말로 정신과에 찾아갔고 오늘의 결실을 얻기에 이르렀다. 부모 말 들어 나쁠 것이 정말, 하나도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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