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는 왜? 10. 키(cm)-120이라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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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는 왜? 10. 키(cm)-120이라는 기준

진영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발레는 탐미적인 예술이고, 무용수는 어떤 정해진 기준대로의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관객들은 그 특정한 기준을 보기 위해서 돈을 내는 거니까요.
(The audience is paying to see a certain standard.)

- 캐서린 모건(Kathryn Morgan)

남들은 발레를 몇 년 배우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발끝으로 서서 한두 바퀴 도는데 나는 스튜디오 한가운데 두 발로 똑바로 서 있는 것도 잘 못했다. 정보의 바다를 뒤져보면 원장님이 알려주지 않은 어떤 팁이라도 있을까봐, 한때는 땀에 젖은 레오타드를 갈아입지도 않고 노트북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 검색해 보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캐서린 모건을 알게 됐다. 그녀가 어떤 경력을 가졌는지도 모른 채, 살집이 조금 붙은 상체를 보며 ‘전직 발레리나였나보다’ 정도만 짐작하고 몇 개의 영상을 보았다. 그러다 곧 나는 캐서린 모건에게 빠져들었다.

캐서린 모건은 세 살 때 발레를 시작했고, 17살의 나이로 뉴욕 시티 발레에 입단했다. 발레뿐인 인생, 바로 그 자체였다. 그리고 입단하고 4년 후, 그녀는 갑상선 기능 저하증 진단을 받았다. 하루종일 컴퍼니의 연습실에 있으면서 8시간의 리허설을 소화하는데도 계속해서 체중이 불어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끔찍한 편두통에 시달렸고, 늘 탈진해 있어 평소대로의 운동량을 소화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발레단의 책임있는 그 누구도 캐서린의 건강을 염려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신 그녀는 “너 살 쪘어”라는 소리만 계속해서 들었다. 진단을 받고 2년이 지났을 때, 그녀는 <한여름밤의 꿈>에서 주역을 따냈지만 더 이상은 발레리나로 잘해낼 수 없겠다는 생각에 발레단을 떠났다. 건강을 회복하는 데 한동안 집중한 끝에 완치 판결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고, 최근 휴스턴의 RAFA(로얄 아카데미 오브 파인 아트)에서 지도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축구 경기만큼의 열량
축구선수만큼의 식사?

원래 타고나기를 마른 몸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가느다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굶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하고 활기차 보이면서 동시에 마른 몸을 가지는 것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같이 마른 외모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일부러 굶어야 한다. 하지만 발레리나들은 무대에 서야 하므로, 힘이 없어 쓰러져서도 안 되고 피부가 거칠고 눈이 퀭해서도 안 된다. 발레 전막 공연에 참여하는 것은 축구 경기 전후반을 뛰는 것과 같은 열량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발레리나들도 축구선수만큼의 식사를 하지는 못한다.

키(cm)에서 120을 빼라거나 130을 빼라거나 하는, 발레가 발레리나에게 요구하는 체중 기준이 있다. 꼬마아가씨가 발레를 배우러 학교나 학원에 찾아가면 선생들이 이를 요구하고, 발레단에 입단하게 되면 예술 감독이나 안무가가 이를 요구한다. 의상실에서 실과 바늘을 들고 기다리는 담당자도 이를 요구하고, 당연히 관객들도 이를 요구한다. 심지어 발레라는 춤 자체도 이 기준을 요구한다. 코어의 힘으로 상체를 풀-업 시킨다느니 몸의 중심을 찾는 법을 배우고 균형감각을 향상시킨다느니 하지만, 마르지 않고서는 무릎과 발목의 관절이 발레라는 춤을 감당할 수가 없다. ‘포인트 슈즈’가 발레를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장치라고 설명하지만, 발레는 발레리노들에게는 이 무서운 신발을 신기지 않는다(코믹 발레에서는 제외하고. 남성이 여성의 롤을 수행하면 어째서 자동으로 ‘코믹’해지는지는 모를 일이다.)

동물과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서커스는 메인스트림에서 퇴장한지 오래인데, 여성에게 키-120이라는 기준, 긴 다리와 목, 짧은 상체와 작은 머리를 요구하는 발레는 어째서 2018년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는가? 조지 발란신이 남긴 격언인 “발레는 여성이다” 따위를 착즙하며 죽은 백인 남자들이 남긴 작품을 재해석하는 것으로는 역부족이다.

영국 내셔널 발레단의 예술감독 타마라 로조는 2012년, 영화 <블랙 스완>을 언급하며 발레는 이제 더 이상 영화 속 ‘니나'와 같은, 거식증에 시달리는 무용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마치 유럽의 런웨이가 44 사이즈 이하의 모델을 무대에 세우지 않기로 한 것처럼, 저체중의 무용수들을 컴퍼니에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한 흐름 때문인지,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하는 많은 발레리나들은 화장을 지우고 운동복을 입은 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영상들을 올린다. 그녀들은 마치 나이키-우먼 모델 같다. 나는 발레가 만약에 죽지 않고 부활한다면 그 해답은 여성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여성들이 ‘정말로' 발레를 지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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