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년 초에 요가를 만났다.
내가 다니는 요가원은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요가원 아래층에는 무려 고르곤졸라 피자와 보쌈을 같이 파는 부대찌개 가게가 있고, 최근 옆 건물에 최신 기계를 겸비한 코인 노래방이 들어서 있다.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처음 그곳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 곳이 하나의 동굴같이 느껴졌다. 그 작은 내부에서 나무가 자라고 연못이 펼쳐져있을 것이라 누가 상상하겠는가. 따뜻한 조명이 비추는 동굴 아래 순백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쉬거나 책을 보며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가를 배운 것이 이곳이 처음은 아니다. 중학생 시절 토요일 특별활동 시간에 처음 요가를 접한 이후 수험생활이 끝나고 난 후 무료했던 겨울방학, 대학교 첫 학기에 불어버린 살 때문에 다이어트에 열을 올렸던 여름방학 때도 한두 달 요가를 다닌 적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의 요가는 다이어트를 위한 하나의 수단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쫙 달라붙은 나시에 레깅스를 입고 있는 강사 및 수강생들을 떠올리면 왠지 가기가 싫었다. 말랐지만 볼륨은 없고, 구부정한 어깨에 다리는 O자 형인, 한 마디로 볼품없는 내 몸매가 그들과 비교되는 게 싫었다.
지금 내가 다니는 요가원에서는 승복처럼 생긴 흰색 수련복을 사서 입거나 집에서 가져온 무채색의 펑퍼짐한 옷을 입어야 한다. 몸매가 너무 드러나는 타이트한 옷이나 로고가 너무 크게 박힌 트레이닝복은 입을 수 없다. 그동안 내가 경험한 요가원에서는 누군가는 분명 형광색 끈나시에 큼지막한 대문자 알파벳이 프린팅된 레깅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곳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단순히 다이어트나 몸매 가꾸기를 목적으로 요가를 대하지 말자는 일종의 약속 같은 것이다.
실제로 요가를 한다고 다짜고짜 살이 빠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요가 강사들이 날씬한 몸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오랜 수련이다. 즉, 몸의 피로를 풀고 자세를 바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요가에 접근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러는 편이 요가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한 동기부여가 된다. 내가 요가를 새롭게 만났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편안하다, 그래서 힘이 든다
최근 동작이 어느 정도 몸에 익어 눈을 감고 수업을 들으면서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 있다.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편안하다. 다른 수강생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편안히 나의 자세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끝나고 무엇을 먹을까, 다음 학기 수업을 뭘 들을까, 어제 했던 농담이 정말 웃겼었지. 꿈을 꾸는 듯 몸과 마음이 분리된 기분이다. 정신 차리고 보니 동작을 틀림없이 따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신기할 정도다.
그렇다. 눈을 감고 동작에 집중하기 위해선 오히려 더 많은 정신력을 쏟아야 한다. 가만히 반가부좌로 앉아 있는 자세도 마찬가지이다. 다리를 찢고 원을 그리고 고꾸라 서는 일반 동작들은 어렵고 자칫 다칠 수 있기 때문에 근육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명상하는 자세는 근육에 전혀 자극이 안 가기 때문에 너무 편안해서다른 생각을 하기 쉽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자세가 쉽게 흐트러진다. 어느새 거북목처럼 머리가 앞으로 쏠려 있고 어깨는 굽어 있다. 그래서 편안한 상태에서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사실 가장 어렵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된다. 티비를 보면서 꼿꼿이 앉아있는 사람은 정말 용자다.
요가는 다이어트 운동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요가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저강도 운동이자 스트레칭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요가 동작이 오직 몸을 늘리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요가는 이완하는 동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수축과 이완을 번갈아 하기 때문에 근육에도 많은 자극을 주며, 되려 많은 근육을 필요로 한다. 더군다나 요가는 다른 운동에 비해 속도가 느리다. 속도가 느려지면 그만큼 자세를 유지하는 힘, 즉 근육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몸에 근육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따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요가 수업은 힘이 많이 든다.
쾌감
다행히 요가는 나에게 잘 맞는다. 심지어 나는 요가를 통해 성적인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요가를 하는 한 시간 동안 나는 몇 번씩이나 황홀해지는 경험을 하는데 최근 이러한 경험을 ‘요르가즘’이라 이름 붙이기로 했다. 어떨 때 요르가즘을 느끼느냐고? 어려운 동작을 끝내고 마지막에 손끝을 하늘로 쭉 뻗어 합장을 한 다음, 손가락 하나하나를 풀며 팔을 뒤로 밑으로 천천히 내릴 바로 그 때. 어깨와 팔뚝이 만나는 근육이 한껏 수축됐다가 천천히 이완되면서 손끝과 삼두근에 찌릿찌릿한 느낌을 줄 때. 다리를 꿇고 앉아 등 뒤에서 양손 깍지를 껴 바짝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던져 이마를 바닥에 댄 다음 이마와 정수리를 번갈아 앞뒤로 롤링하며 두개골을 자극할 때. ‘Marjaryasana’라고 하는 고양이 자세의 변형 동작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작 중 하나다. 기어가는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다리는 어깨 넓이로 벌리고 그대로 손을 앞으로 스르르 굴려 겨드랑이와 턱을 바닥에 걸고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듯 어깨 뒤쪽과 겨드랑이를 꾹꾹 눌러줄 때, 그때가 바로 황홀경의 순간이다.
요르가즘을 완성해주는 게 있는데 그건 강사들의 조곤조곤한 지도 한마디 한마디다. 좋은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은 요가 강사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데, 그들의 편안하면서 일정한 목소리는 원활한 동작을 위한 필수 요소이며 특히 이완하는 동작을 할 때 큰 도움이 된다. 어깨에 힘을 풀고, 입술과 미간에도 힘을 풀라고 그렇게 나지막이 말씀하시면 나는 막 미간을 다림질한 것처럼 얼굴이 풀어진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 모세혈관에 있는 수많은 작은 세포들까지 온기가 가 닿으며 그럼 나는 버터가 프라이팬 열기에 자르르 녹는 것 마냥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다. 매일 밤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면 행복할 것 같다고 항상 생각한다. 아무튼 그렇게 힘겹게 절정을 넘겼다면 후아- 하고 입으로 길게 숨을 내쉬면 그게 또 아주 좋다. 스스스쓰으ㅡ하고 치아 사이로 가늘고 길게 내뱉는 것도 깔끔한 마무리라 할 수 있다.
긴장을 힘으로 바꾸는 방법
언젠가는 요가를 직접 지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일단 ‘너 요가 잘해?’, ‘다리 찢을 수 있어?’라는 질문을 하고(아니 못 한다), ‘갑자기 꿈이 엉뚱한 데로 갔네’라고 말하는 듯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 앞에서 많은 걸 설명할 수는 없고 설명하기도 귀찮지만 나는 요가란 내가 걸어온 길 위에서 발전적이면 발전적이었지 결코 엉뚱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좋은 자세를 가질 수 있는가는 내 인생 최대의 화두 중 하나였다. 나는 항상 바른 자세가 바른 마음과 정신을 만든다고 믿어왔다(물론 실천했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몸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경계해 왔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엄밀히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성이 다분한 요가를,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단련하는 운동인 요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요가를 통해 내 몸을 빼빼 마르게만 하려고 했던 나를 돌아보고 내 몸의 긴장을 힘으로 바꾸어내는 법을 배웠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내가 꿈꾸는 사회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 요가는 혼자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문고리를 살살 닫는 것, 화장실 슬리퍼를 다음 사람이 신기 편하게 놔두는 것, 숨소리를 남들에게 안 들릴 정도로 최대한 가늘게 내뱉는 것, 이것 모두 참된 요가인의 자세이다. 그런데 이건 요가인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예의이기도 하다. 만일 모든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산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웠을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를 바르게 키워 사회의 모범적인 일꾼으로 내보내고 싶어 하듯, 요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여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타인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바로 요가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아야지. 좋아하면 닮아간다 했으니까, 그래야지. 그럼 여기서 이만 나마스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