킥복싱
운동 방식 : 평일 저녁 7시, 8시, 9시, 10시마다 트레이너가 수업 진행
편의 시설 : 사물함, 샤워실, 운동복
H는 지금껏 자신이 정적인 운동을 좋아한다고 믿었다.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있는 직업이라 주로 요가로 뭉친 근육을 풀어주곤 했다. 그러다 문득 지겨움을 느껴서 유투브에서 이런 저런 홈 트레이닝 비디오를 보며 따라해봤다. 타바타 같은 운동 영상을 따라하다 우연히 발견한 종목이 킥복싱이었다. 기본적인 자세며 중심 잡기를 알려주는 영상이었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체육관에 가서 본격적으로 배워볼까? 하지만 무술의 일종을 가르치는 체육관이란 허세와 센 척으로 꽉 찬 남자들이 땀냄새나 풍기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떨칠 수 없어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돈 내고 남자들 사이에서 눈치 보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러다 마침 직장 동료 중 괜찮은 킥복싱 체육관이 있다고 해서 따라가봤다.
호기심 많은 H를 맞이한 건 여자 코치였다. 3만원을 내면 일일 수업 체험이 가능하다. 만약 체험이 마음에 들어서 일주일 내로 정식 등록을 하면, 등록비에서 체험비 3만원을 제한다. 유산소와 복근 위주로 기초 운동을 한 뒤, 기본 자세를 알려주었다. 코치는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하는 재주가 뛰어난 분이었다. 리듬감 있는 발동작이 매력적이었다. H는 그날 바로 등록했고, 6개월 뒤 주변으로부터 ‘킥복싱 광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때리는 맛
킥복싱의 가장 큰 장점은 타격기라는 점이다. 수업 중 남자끼리, 여자끼리 짝을 지어서 번갈아 가며 한 사람은 샌드백을 들어주고 다른 사람은 친다. 종목을 불문하고 모든 운동은 일정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며 집중하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를 싹 잊게 해 주는 효과가 있다. 킥복싱은 심지어 때리고 찬다. 아주 직접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 현대인으로 살다 보면 가끔 아무도 해치지 않으면서 폭력성을 해소할 필요가 절실하다. H는 한창 스트레스를 받을 시절엔 구체적인 얼굴을 생각하며 주먹과 발차기를 날렸다고 고백했다.
공격을 하기 위한 기술이다 보니 자세부터 남다르다. 얼굴 근처로 두 손을 올려서 방어하고, 고개는 살짝 숙이고, 눈을 정면으로 치켜 뜬다. 기본자세부터 대놓고 상대를 노려본다. 조금만 눈에 힘을 줘도 여자애가 도끼눈을 뜬다 느니 말이 많던 꼰대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킥복싱 세계에 설 자리가 없다.
요가나 헬스를 할 때 자주 듣던 “이 동작을 하면 이 신체부위가 예뻐져요~” 같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킥복싱 코치는 “이렇게 해야 더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힘을 빼고, 정확한 자세로, 최대한 힘을 살려서 때린다. 지구력도 중요하다. 몇몇 남자 회원들은 처음부터 있는 힘껏 치다가 나중에 가면 힘이 풀려 있다. 코치가 가르치는 대로 정확성에 집중하면 그럴 일이 없다.
세지고 싶어
H는 모범생이다. 선생님의 말을 빨리 이해하고, 참 잘 듣는다. 킥복싱도 코치가 알려주는 대로만 하니까 자세가 금방 좋아졌다. 발의 각도를 살짝 바꾸거나, 스텝의 리듬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바로바로 타격감이 달라진다. 배우는 즉시 바로 써먹는 쾌감이 있다. 코치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서 더 말을 잘 듣게 된다.
H가 다니는 체육관에는 최근 남자 회원과 여자 회원이 거의 5대5 비율이다. 남자들이 쾅, 쾅 소리를 내면서 샌드백을 치고 있는 걸 들으면 괜히 H도 세게 쳐 본다. 남자들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안 진다. 가끔 사람이 모자라 남녀 페어로 샌드백을 들어줄 때, H는 한 발로 서서도 샌드백을 들어줄 수 있다고 한다. 꾸준히 하다 보니 그만큼 코어 근육이 발달했다.
코치도 만족스럽다. 가르치는 실력이 출중할 뿐 더러, 여자다 보니 좋은 점이 많다. 생리할 때는 어떻게 운동하는지 편하게 물어볼 수 있다. 하다 못해 기초 운동이나 스트레칭을 할 때 옷자락이 올라가는 것을 내려줄 수도 있다. 다른 남자 회원들과는 샌드백 너머로 터치할 일이 없어 편하다. 각자 자기 자세에 집중해서 운동하는 분위기다. 코치가 H를 짜증나게 한 건 굳이 인바디를 권유했을 때 정도인데, H가 확실하게 거절한 뒤에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H가 킥복싱을 시작하기 전에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이런 저런 수다를 떨다가 H가 자신의 외모에 대해 한탄한 적이 있다.
“나는 ‘덩치’가 크잖아.”
“누가 그래?”
“다 그래. 부모도 그렇고. 실제로 그렇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났다. H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멋진 여자다. 그런 유치한 말로 공격받을 이유가 없다. H도 머리로는 그런 코멘트를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수한 데미지는 남는다. 그건 H의 잘못이 아니다. 여성이 품위 있는 부피를 가지고 사는 걸 용납하지 않는 쩨쩨한 성차별적 세상의 100% 과실이다.
한창 킥복싱 예찬을 늘어놓던 H가 말했다.
정확성이 중요하긴 한데, 체격도 중요한 것 같아.
나는 이제 커지고 싶고, 무거워지고 싶고, 세지고 싶어.
예전에 H를 공격했던 말들, 덩치라느니 떡대라느니 하는 못된 말들은 이제 더 이상 H를 상처 입힐 수 없다. H는 강해졌다. 그리고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꾸준히 하면 호신술로도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한다. 힘으로는 남자를 바로 제압할 수 없지만, 정확한 타격기를 습관화하면 여차할 때 급소 정도는 ‘효과적으로’ 찰 수 있지 않을까? 리드미컬하고 동적인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 때리고 싶은 게 많은 사람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