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배우고 여자가 가르친다. <트레이너와 나> 시즌 투를 연재하면서 만난 여성 ‘운동러’들이 입을 모아 원했던 환경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공통적으로 던진 질문들 중에는 이런 질문도 있었다. “여자 코치도 있나요?” 홈 트레이닝, 필라테스, 폴댄스의 경우 여자 코치가 대부분이었다. 함께 운동하는 동료들도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그걸 장점으로 꼽는 여성이 많았다. 킥복싱, 스포츠 클라이밍, 테니스, 주짓수, 스쿠버다이빙의 경우 여자들끼리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이 쉽지 않았다. 이런 운동을 하는 여성 ‘운동러’들은 그만큼 간절하게 여성 코치를, 여성 동료를 원했다. 이미 여성 코치가 있는 경우에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코치도 만족스럽다. 가르치는 실력이 출중할 뿐 더러, 여자다 보니 좋은 점이 많다. 생리할 때는 어떻게 운동하는지 편하게 물어볼 수 있다. 하다 못해 기초 운동이나 스트레칭을 할 때 옷자락이 올라가는 것을 내려줄 수도 있다. 다른 남자 회원들과는 샌드백 너머로 터치할 일이 없어 편하다.
- 트레이너와 나 시즌 투 1. 킥복싱
한국에서 여자 테니스 코치를 본 적이 없다. 여자 코치면 더 좋을 텐데, 쉽게 찾기가 어렵다. 뛰어난 여성 선수들은 많은데, 여자 코치는 찾기 어렵다.
- 트레이너와 나 시즌 투 6. 테니스
여성 동지들이 늘어난 뒤부터 항상 여성 전용 도장을 만들자는 얘기를 함께 한다. 그래서 우리도 브라탑만 입고 훌훌 벗어 던지면서 편하게 하자고.
- 트레이너와 나 시즌 투 8. 주짓수
여자가 배우고 여자가 가르친다. 그 ‘이상’이 현실이 됐다.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여가여배)’라는 이름의 비정기 원데이 클래스가 탄생한 것이다. 2018년 7월1일에 열린 제1장 ‘나를 지키는 주짓수’를 시작으로 9월1일 제2장 ‘농구… 좋아하세요?’를 거쳐 11월10일 제3장 ‘넘어지지 않는 스케이트보드’까지. 각각 무술, 구기, 주행 내지 액션 스포츠로 종류도 다양하다. 여가여배 클래스에 2번 이상 참가한 3명을 인터뷰해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제1장 주짓수
N씨와 O씨는 모두 주짓수라는 종목에 끌려 여가여배를 신청했다. N씨의 경우 어릴 적 태권도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는 누군가와 몸을 부딪히는 운동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짓수라는 종목에 관심이 가면서도 쉽게 시도하진 못했다. O씨는 마른 체형 때문에 주짓수를 선망해왔다. 체급과 관계 없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술이 주짓수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 체력이 약해 다른 사람과 겨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도전하지 못했다.
여가여배 주짓수 클래스는 두 사람의 진입장벽이 모두 해결된 환경이었다. 여자들끼리 여자 코치에게 배우니 남자들과 몸을 부딪히지 않아도 된다. 아무래도 남자들과 섞여서 하는 것보다는 여자들끼리 대련하는 것이 대체로 체급과 체력도 비슷하다.
수업은 배경 강의, 몸 풀기 운동, 기술 강의로 진행됐다. 동그랗게 모여서 앞구르기, 뒷구르기, 구르고 일어나기 등 간단한 동작으로 몸을 푼다. N씨는 “주짓수는 공격 기술보다 공격을 받았을 때 방어를 통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무예”라는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특성을 살리고, 클래스 제목도 ‘나를 지키는 주짓수’였던 만큼, 호신술로 유용할만한 완결된 연결 동작을 배웠다.
모든 호신술의 첫 번째 동작은 자신을 방어하는 말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위협하는 남성이 다가올 때 큰 소리로 “오지 마세요. 저리 가세요.”라고 외치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은 팔을 잡혔을 때, 목을 조르려 할 때 각각 상황에 맞는 방어 동작을 구분동작으로 익혔다. 마지막에는 지금까지 배운 구분동작을 연결해서 한꺼번에 실습했다.
실습은 꽤 본격적이었다. 1:1로 짝을 맞춰 번갈아 가며 행위자, 방어자 역할을 맡았다. 두 줄씩 서서 한 쌍씩 번갈아 구분동작을 연습하면서, O씨는 정말 운동부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N씨는 어렸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성인이 된 후로는 누군가와 땅을 구르며 몸을 적극적으로 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같이 참여한 분들과 다 같이 소리 높여 웃고 격려해주며 몸을 사용하는 경험 자체가 즐거웠다.
제2장 농구
농구 클래스는 몸 풀기, 드리블, 패스, 슛, 3:3 또는 4:4 팀플레이로 진행됐다. 가슴 높이로 보내는 체스트 패스, 높이 올려 보내는 오버헤드 패스, 바닥으로 공을 튕겨 보내는 바운드 패스 등 다양한 패스를 배웠다. 여성 농구팀 위캔즈에서 코치를 맡았다. 한 세션에 25명이 참여해 여가여배 중 최다 인원이었다. 코치진까지 합치면 30명이 넘는 여성들이 한꺼번에 모여 농구를 했다.
참여한 인원들의 수준은 다양했다. O씨는 학창시절 단짝 친구와 매일 농구를 했던 ‘실력자’다. O씨에게 팀 스포츠의 매력이 극대화되는 운동이었다. 의도한 대로 패스를 전달하고, 패스를 받고, 서로의 어시스트나 리바운드로 팀이 점수를 올릴 때가 가장 즐거웠다. 내 손을 떠난 슛이 림을 통과할 때 느끼는 쾌감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릴 때는 자주 즐겼던 농구를 대학 진학 이후 잊고 있었다.
O씨는 여가여배에서 한풀이를 할 수 있었다. “농구 코트에 남자가 없다니. 농구 코트에서 제2의 성이 아니라니!” 그 어느 때보다 신이 나서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었다. 드디어 내가 주인공인 운동을 경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을 위한 운동 수업이라고 무조건 난이도가 쉬워지는 건 아니다. 언제나 체육을 좋아하고, 남자들 사이에서도 뒤지지 않게 잘했던 O씨에게도 여가여배 경험은 특별했다. 다만 살살하거나 잘 못해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다 같이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찝찝함도, 성별에 대한 의식도 없이 운동 그 자체를 만끽할 수 있었다.
농구 경험자인 O씨는 여가여배 클래스가 농구를 난생 처음 접한 사람에게는 약간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인원이 많아 밀도 높은 코칭이 쉽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각자가 배우는 속도에 맞춰 간 점은 좋았다.
O씨의 걱정과 달리, 농구 초심자들도 여가여배 클래스를 마음껏 즐겼다고 털어놨다. 심지어 농구에 대한 나쁜 기억을 극복하게 해 준 경우도 있다. N씨는 여가여배 클래스 이전에는 농구를 두려워했다. 학창시절에 농구공으로 얼굴을 맞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체육시간에 배웠던 농구는 공이 무겁고 다루기 어려운 스포츠였다.
S씨는 ‘보는 농구’에는 관심이 있었다. 한 때 농구팀의 팬이었는데, 연고지를 옮기면서 관심이 끊겼다. S씨의 반려자는 사회인 농구를 10년 넘게 하고 있다. 몇 번 연습이나 시합에 따라간 적이 있지만 별로 흥미가 없어 응원만 했다.
그러나 막상 배워보니 농구는 재미있는 운동이었다. 여가여배 1장부터 3장까지 모든 클래스에 참여한 N씨는 그 가운데 농구가 최고였다고 꼽았다. 무엇보다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3~4명이 팀워크를 맞춰 함께 승부욕을 불태우고, 점수를 낼 때마다 기뻐하는 짜릿함이 있었다. 성인이 된 후 대체로 PT처럼 혼자 하는 운동을 했기 때문에 각별한 즐거움이었다. 남자들이 무더운 날 한강에서 몇 시간씩 농구를 하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오로지 경기에만 집중력을 발휘하는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제3장 스케이트보드
유일하게 야외에서 진행된 클래스다. 보드의 구조 배우기, 몸풀기, 그리고 ‘넘어지지 않는 스케이트보드’라는 제목답게, 혼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이 주요 강의 내용이었다. 처음 보드에 올라서서 균형 잡는 법을 배울 때는 보드를 타지 않은 파트너가 두 손을 잡고 앞으로 끌어줘야 한다. 조금 익숙해지면 한 손을 놓고, 마지막에는 혼자 서서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그렇게 번갈아 가며 짝을 지어 연습한다. 혼자서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면 발을 굴러서 보드에 속도를 붙이는 ‘푸시오프’를 배운다. 마지막으로 보드를 탄 상태에서 방향을 바꾸는 ‘틱택’이라는 기술을 배웠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넘어지는 이유는 보드 위에서 양 다리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드 위에 올라가고 내려올 때 발의 위치를 제대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 한 쪽으로 쏠리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보드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게 편하고, 어떤 사람은 왼쪽이 더 편하다. 코치가 먼저 시범을 보이고, 짝과 함께 번갈아 연습을 하면, 코치들이 돌아다니며 1:1로 코칭해주는 방식이었다.
S씨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재미를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는 기분이 있다면 이런 걸까”라고 표현했다. 숨이 차지도 않다. N씨는 보드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씽씽 달리는 게 신이 났다. 한강 바람을 쐬며 스케이트를 타고 질주하는 기분은 해 보기 전엔 알기 힘들다. 넘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을 이겨낸 보람이 있었다.
S씨는 특별히 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잠깐 쉬려고 보드장 귀퉁이에서 사람들이 타는 걸 구경하는데,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2시간 전만 해도 보드에 올라가서 서는 방법도 몰랐던 사람들이 금방 씽씽 달리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마법 같은 풍경이었다.
S씨는 수업이 끝난 뒤 아예 보드를 구매했다. 무엇보다 ‘간지 나는 아이템’이 많다는 것도 스케이트보드의 매력이다. 스트리트 패션, 반스 신발, 예쁜 보드와 헬멧, 보호대. 주짓수, 농구와 달리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이라, 여가여배 수업이 끝난 후에도 틈틈이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실 수업을 들으면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건 아니다.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는 깨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괜찮다는 선생님의 말을 믿고, 더 익숙해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견디고 있다. 언젠가 유투브에 올라온 영상처럼 멋지게 점프하는 그 날까지.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잖아요
여가여배에 참여했던 N씨, S씨, O씨의 만족도는 굉장히 높았다. S씨는 남자들과 섞여서 운동할 때보다 상대적으로 불쾌한 경험없이 다양한 운동에 도전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막연히 '나는 잘 못 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운동도 직접 해 보자 오해였다는 걸 깨달았다. O씨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신체능력을 다시 유감없이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 순간이 얼마나 삶의 질에서 중요한지 되새겼다.
N씨는 '여자가 가르친다'는 부분에서 힘을 얻었다. 여자 주짓수 사범, 여자 농구 선수, 여자 스케이터가 이렇게 멋있다는 걸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혔다. 그들이 해주는 말에서 엄청난 힘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았다. "지금 못해도 괜찮아요. 한 번 해보세요. 꾸준히 연습하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천천히 익숙해지면 돼요." 특정한 운동이 아니라 일상의 많은 상황에서도 좋은 자극이자 격려가 되는 말이었다.
여가여배에서 다뤄줬으면 하는 운동이 많다. 탁구, 아이스하키, 필드하키, 축구, 야구 등이다. 아무래도 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여가여배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모두 입을 모아 "다음 스포츠가 무엇이든 참여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나와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운동도 여성 코치들의 친절하고 프로페셔널한 가르침을 따라 여성 동료들과 함께 웃으며 즐기다보면 생각보다 재밌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이든, 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면,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 또는 학창시절 운동장에 두고 온 나의 모습과 함께 땀 흘리며 웃을 수 있는 값진 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