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의 단두대 전당
헬스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좁은 복도를 따라 가면 여러 장의 사진들이 줄지어 붙어 있다. 머리가 없는 여자들의 몸이다. 모두 스포츠 브라와 트레이닝복을 입고 배를 드러냈다. 두 장이 한 세트다. 같은 사람인데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마르고 탄탄하다.
나는 헬스장에 갈 때마다 이 사진들이 무섭다. 전부 머리가 없고 목에서 뚝 잘려 있기 때문이다. 라커룸으로 향하는 5분, 복도 자체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눈, 코, 입은 필요 없어. 뇌도 필요 없어. 너는 몸이야. 여기는 몸만 존재하는 곳이야.’
이 복도는 사실 ‘명예의 전당’이다. 사진이 붙은 사람들은 원래는 ‘왼쪽 몸’이었다. 그러나 가혹한 PT 코스를 거쳐 마침내 ‘오른쪽 몸’을 달성했다. 그 아름다운 성취의 전리품으로써, 몸은 만천하에 전시된다. 몸은 그 자체로 증거이자 목소리다. 그들의 인내, 근면, 성실, 금욕, 시간과 돈의 투자. 하지만 아무도 이 명예를 거머쥔 이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훈련 전의 사진 때문에 얼굴 공개가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끝내 몸만 따로 떼어 자랑하려 하다보니 단두대가 지나간 듯한 ‘명예의 전당’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헬스장에서 여성의 몸을 다루는 방식은 늘 이런 식이다. ‘왼쪽 몸’ 즉 뚱뚱한 몸, 통통한 몸, 출렁이는 몸, 배가 나온 몸은 비교해서 모욕하는 대상이다. ‘오른쪽 몸’ 즉 날씬한 몸, 탄탄한 몸,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모래시계 같은 몸은 비교해서 찬양하는 대상이다.
건강해지려고 운동합니다
내가 헬스를 하는 이유는 머리가 잘리고 배를 드러낸 몸의 이미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트레이너가 나를 만나자마자 맨 처음 했던 질문이 그것이었다.
“회원님, 왜 운동을 하려고 하시는 거에요?”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건강해지려고요.”
하루가 끝나면 허리, 어깨, 목, 손목이 아파요. 항상 피곤해요.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게 힘들어요. 조금만 멀리 출장을 다녀와도 체력 회복이 너무 오래 걸려요. 모두 체중이 줄어들거나 몸의 부피가 줄어드는 것과는 무관한 고민이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트레이너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너는 자꾸 나를 ‘명예의 단두대 전당’에 올리고 싶어 했고, 그 과정에서 아주 쉽게 내 몸을 모욕했다. 내가 그래도 세 번까지는 말실수이겠거니 하고 봐줬다.
세 번의 아웃
첫 번째 아웃은 유산소 운동을 집중적으로 하던 날이었다. 헉헉대며 운동과 숨쉬기를 동시에 하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는 나에게 트레이너는 감히 이런 추임새를 넣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이고, 힘들어! 나도 날씬하게 태어날 걸!”
거기서 딱 그만두고 화를 버럭 냈어야 하는데. 1분 동안 제자리 뛰기가 뭐라고, 바보 같이 계속 운동하느라 화 낼 타이밍을 놓쳤다. 1년 전 일인데 아직도 화가 난다. 치사하게 운동하느라 대답을 못할 때 저런 말을 하다니. 그 때였을 것이다. 세 번째는 참지 않겠다고 다짐한 순간이.
마음 같아서야 세 번까지 참을 것도 없이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하냐고 마구 몰아세우거나 딱 잘라 트레이너를 바꾸고 싶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쉬운 결정은 아니다. 운동을 보조해주는 전문가로서 그는 우수했다. 딱 내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도록 채찍질하는 운동량도, 질리지 않는 다양한 운동 구성도 마음에 들었다. 단지 그는 내가 운동하는 이유가 뭔지 도대체 경청하지를 않았다. 그것만 어떻게 되면 월급의 20%가 아깝지 않은 훌륭한 트레이너다. 만약 단칼에 갈아치웠더니 더 마음에 안 드는 트레이너가 담당을 맡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두 번째 아웃은 인바디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는 내가 소고기도 아닌데 자꾸 나를 저울 위에 올리려고 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쟀는데 지금 월요일이잖아요. 3일 만에 뭐가 바뀌어요?”
“그래도요. 주말에 많이 드셨다니까 ‘벌’로 재야겠어요.”
그는 한 자리수 정도 늘어난 숫자로 내 몸을 정의하는 행위를 ‘벌’이라고 불렀다. 전교 등수를 복도에 붙여서 꼴찌들에게 벌을 주듯이, 그는 내게 충격요법으로 동기 부여를 하려고 했다. 택도 없는 소리다.
“무슨 벌이요? 저 날씬해지려고 운동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럼 왜 해요?”
“건강해지고 싶어서 한다니까요!”
온갖 운동 이름은 다 외우면서 이것만은 왜 죽어도 못 외울까.
세 번째 아웃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사랑하는 나의 약혼자를 모욕했다.
“아무리 그래도 덤으로 날씬해지면 좋잖아요. 남자친구도 좋아하고.”
“제 남자친구는 지금 제 몸매가 딱 좋대요. 더 통통해도 좋대요.”
“그걸 믿어요?”
야구는 아웃이 세 개면 ‘체인지’다. 나는 야구팬으로서 여기서 담판을 짓든지 트레이너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웃으면서 말했지만 내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살을 뺄 생각이 없다. 나는 지금 아름답다. 내 몸에 만족한다. 날씬해지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 트레이너는 ‘그래도 더 날씬해지면 좋지 않냐’고 거푸 묻다가 끝내 나와는 ‘말이 안 통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로는 주말에 뭐 먹었냐고 물어보는 일이 없어졌다.
놀랍게도 트레이너들은 ‘날씬해지려고 운동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걸 엄청나게 어려워한다. 처음에 분명히 운동의 목적을 명확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대부분의 고객님’이 날씬해지고 싶어서 헬스장에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긴 것 같다.
실제로 헬스장을 찾은 다수의 여성이 목이 잘리더라도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한 몸을 갖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를 근거로 트레이너들은 소비자의 욕망에 충실히 복무하는 서비스업자일 뿐이라며 항변할 수도 있다. 즉 여성이 주체고, 트레이너나 헬스장은 도구라는 도식이다. 그리고 건강하고 예쁜 몸을 갖고 싶다는 데, 뭐가 잘못될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들은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설명해 왔다.
수잔 보르도의 저서 <참을 수 없는 몸의 가벼움>은 거식증과 ‘몸 만들기’를 예시로 어떻게 문화가 여성의 몸에 드러나는 동시에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지 서술했다. 운동과 식이를 통해 다져진 몸은 거식증으로 깡마른 몸과는 달리 건강하고 올바른 몸의 이데아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르도는 크게 다르지도 않다고 본다. 두 경우 모두 여성의 몸은 출렁이지 않고, 탄탄하고, 평평하고, 매끈해야 한다. 그런 몸이 숭배된다. 지방, 군살, 뱃살(내장의 흔적만 보여도 뱃살이라고 한다!), 머핀탑, 허벅지살, 종아리알, 팔뚝살, 허릿살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며 부끄러운 존재다. 결국 여성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남는다. 해골만 남기거나, 근육으로 온 몸을 꽉 조이거나. 강박적인 다이어트와 보디빌딩, 두 극단은 이어진다는 게 보르도의 주장이다.
보르도는 이것을 한 편으로는 후기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문화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욕망, 자본, 시간은 무한하다. 더 권력있는 것, 더 좋은 것, 더 완벽한 것을 향한 끊임없는 자기계발. 그렇게 최고의 성과를 생산한다. 덜렁이는 것, 거추장스러운 것, 결점이 없는 ‘미니멀한 몸’.
동시에 이런 문화는 끊임없이 여성의 몸을 통제한다. 모욕적일 뿐만 아니라 으름장을 놓는 듯한 헬스장 광고, TV 속 여성들, 잡지 속의 포토샵 된 몸, ‘극세사 다리’, ‘11자 복근’, 작은 몸에만 맞는 ‘프리 사이즈’ 옷들, 명예의 단두대 전당. 이 과정을 통해 억압적인 ‘여성성’이 재생산된다. 시간, 공간, 일상적인 움직임의 조직과 통제를 통해 우리 몸은 훈련되고, 특정한 모양이 되고, 남성성, 여성성, 자아, 욕망을 새긴다(수잔 보르도, <참을 수 없는 몸의 가벼움>).
보르도의 지적 중 또 하나 재밌는 점은 마른 몸이든 탄력있는 몸이든 모두 극단적으로 추구했을 때 유방과 엉덩이와 풍만함이 사라지면서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몸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거식증에 걸린 사람과 보디빌더의 이미지가 그렇다. 바로 거기에서, 여성들은 불가능한 요구를 맞닥뜨린다.
여성은 사회적인 ‘여성성’을 충족하면서도 ‘군살 없는’ 몸매가 되어야 한다. 굴곡지면서도 가늘어야 한다. 탄력있게 근육이 발달하되 굵어선 안 된다. 그래서 인터넷에는 “허벅지 단련하는 운동을 하면 허벅지 굵어지나요?” “하체 운동하면 다리 알 생기나요?” “수영하면 어깨 넓어지나요?”라는 여성들의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트레이너들도 이런 모순적인 규범을 전적으로 수용하며 재생산한다. “이 운동은 승모근이 튀어나오지 않아요”라며 회원님들을 안심시키거나, “너무 많이 하면 허벅지 굵어지니까 여기까지만”이라며 최대한의 힘을 기르기보다 몸의 이미지를 다듬는데 주력한다.
나는 이런 불가능한 요구를 수용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반(反)다이어트주의자다. 내 몸의 가장 예쁜 점은 올록볼록하다는 거다. 최대한 짜낸 시간에 하는 최소한의 운동이 내게 주는 성과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제 다른 사람이 깜짝 놀랄 만큼 무거운 가방을 메고도 어디든지 다닌다. 정수기 생수통 정도는 전혀 무겁지 않다. 똑바로 허리를 세우고 일하는 게 좋다. 운동을 한 주만 걸러도 어깨가 뭉친다. 나는 운동으로 내 몸의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일상을 더 잘 살아갈 힘을 기른다.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