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너와 나: 여자 트레이너

생각하다여성의 노동운동

트레이너와 나: 여자 트레이너

신한슬

처음 PT에 등록할 때 나를 상담한 트레이너는 여자였다. 여성 전용 헬스장이라서 당연하겠거니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헬스장에 여자 트레이너는 딱 한 명이었다.

“저는 여자 트레이너였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죄송해요. 아무래도 한 명이다보니까, 제가 봐서 너무 너무 소심하신 분들은 어쩔 수 없이 제가 맡는데, 웬만하면… 그리고 회원님은 딱 보니까 성격이 활기차서 괜찮으실 거 같아요.”

그렇다. 여자 트레이너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 헬스장의 주요 고객은 여성이다. 여성 회원이 편하게 여성의 몸에 대한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여성 트레이너다. 예를 들어 남자 트레이너들은 내가 생리 때문에 몸이 안 좋다고 말하기만 해도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런데도 여성 트레이너는 공급이 적다. 수요는 많을 것 같은데, 왜 그럴까?

전제가 잘못됐다. 

모든 여성이 여성 트레이너를 원하는 건 아니다. 우리 헬스장에서 여성 트레이너가 인기 폭발인 것은 젊은 여성 비율이 높다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트레이너들에게 물어보니, 헬스장의 주요 수입원인 나이 지긋한 중년 여성들은 남성 트레이너를 매우 선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성 회원들은 어떨까. 수도권의 한 헬스장 체인 지점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A트레이너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을 직접,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가장 흔한 건 여성 트레이너를 무시하는 남자들이다. A가 겪은 바에 따르면 특히 나이 든 남성들은 대놓고 무시한다.

젊은 남자 회원들은 무게를 많이 올리고 싶은데 아무래도 도와주는 트레이너가 여자면 중량을못 들 것 같아 믿음이 덜 가나봐요. 전반적으로 미심쩍어 하는 것 같아요. 근데 나이 드신 분들은 진짜 심해요. 무조건 자기들이 여자보단 더 잘 안대요(웃음).

한 번은 어떤 아저씨가 엉망진창인 자세로 운동을 하고 있어서, 저러다 허리 다칠까봐 가서 조언을 해 드렸어요. 그렇게 하시면 위험하고 이렇게 하셔야 한다고요. 그랬더니 막 화를 내시는 거에요. 네가 뭘 아냐 이거죠. 근데 남자 트레이너가 가서 똑같이 얘기하면 바로 고치시더라고요.

B트레이너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매니저나 다른 트레이너가 ‘남자 회원이 무시할 수도 있다’고 미리 조언을 했다. 일부러 남자 회원들 옆에서 가장 자신있는 운동을 시범 삼아 보여줬다. 여성은 항상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해야 한다. 남성 트레이너는 누군가에게 무시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도 된다.

두 번째 유형은 성희롱범들이다. 진상 중의 진상들. 소비자라는 ‘갑’의 위치를 이용해서 여성 노동자를 괴롭힌다. 트레이너는 몸이 ‘좋다’보니 더욱 타겟이 된다. 이름을 부르는 대신 ‘엉덩이가 탐스러운 쌤’이라고 부르거나, 운동 자세 시범을 보이는데 근육을 만져본다는 핑계로 갑자기 신체 일부에 손을 댄다거나.

‘퍼스널’ 트레이닝이라서 개인 번호를 교환하는 점도 약한 고리다. A트레이너는 이전에 일하던 여자 트레이너가 그만두는 바람에 담당자가 없어진 한 아저씨 회원을 맡게 됐다. 그런데 이 자식이 수업이 없는 때나 새벽에 문자며 전화를 요청해 같이 영화를 보자느니, 목소리를 듣고 싶다느니 치근덕대는 거다. 얘기만 듣는 나도 분노가 치솟았다. 왠지 그만 두신 분의 속사정도 심상치 않을 것 같다.

“미친… 확 잘라버릴…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별 수가 없었어요. 제가 일하던 헬스장은 기본급이 낮고, 회원 수에 따른 성과급이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했어요. 심지어 몇 명이 팀으로 묶여서 성과를 측정해요. 제가 실적이 나쁘면 다른 사람들도 손해를 봐요. 그 중에는 아이 아빠들도 있으니까… 돈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불안정한 여성 노동자로서 여자 트레이너가 성폭력에 대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회사가 제대로 된 곳이라면 많은 것이 바뀐다. B트레이너는 일을 시작할 때 “성적인 농담을 던지는 남자 회원이 있다. 그럴 경우 회원이라고 웃어 넘기지 말고 기분이 나쁘면 당당하게 제지하라. 회원들에게 운동을 지도할 때도 몸을 만지기 전 반드시 ‘자세 좀 봐 드려도 될까요?’라고 말해라”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회사가 성폭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면 많은 것이 바뀐다.

불행히도 어떤 헬스장들은 회원들을 돈으로만 보고, 트레이너들을 돈 버는 기계로만 본다. 더욱 불행한 건 그런 곳이 실제로 돈을 잘 벌기 때문에 체인점도 늘리고 규모를 키워 간다는 것이다. 같은 ‘헬 회사’의 노동 조건 하에서도 여자 트레이너는 더 불리하다.

같은 직업, 더 많은 일, 더 많은 희생

일단 한 달에 1주일은 컨디션이 안 좋다. 생리 휴가가 없는 헬스장이라면 양이 많은 날, 땀을 흘리며 하루종일 운동해야 한다. A트레이너는 생리 휴가는 커녕 명절에 하루씩, 여름휴가 3일을 제외하고는 휴가가 전혀 없는 헬스장에서 일했다. 약을 먹고 참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회원은 여성이 많은데 트레이너 수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적으니 그만큼 일도 늘어난다. A트레이너가 일하던 헬스장의 트레이너 15명 중 여성은 단 두 명이었다. 둘이서 남성용보다 훨씬 큰 여자 화장실, 탈의실, 샤워실을 모두 청소했다. 남자들은 돌아가면서 할 수 있어 일이 줄었다.

이렇다보니 A트레이너는 결혼한 남성 트레이너는 많이 봤지만, 여성 트레이너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결혼을 생각한다면 트레이너로 오래 일하기 힘들다.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도만 가능하다. 명백하게도 가정은 여성에게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저 같은 경우 아침 7시 오픈이면 6시50분까지 나와서 준비하고, 중간에 수업이 없을 땐 혼자서 운동하시는 회원들한테 가서 PT를 하도록 ‘꼬셔야’ 했어요. 그래야 헬스장이 돈을 벌고, 저도 수업료를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거든요. 밤 늦게 청소까지 끝마쳐야 일이 끝나요. 이걸 주 6일 동안 변변한 휴가도 없이 하려니 너무 힘들었어요.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한다는 건 불가능 할 거에요. 여자들은 결혼할 때 많이 그만둬요. 지금도 일하는 분들은 일하다 보니 결혼을 못했거나, 할 생각이 없거나.”

“남자들은요?”

“남자들은 결혼 한 뒤에 더 열심히 일하죠.”

“여성이 임신이나 출산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가 다시 돌아가서 일할 수 있나요?”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헬스장에서 일했던 건 경력으로 쳐 주지 않아요. 그냥 아르바이트 했었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요. 남자들은 그만 두고 자기 헬스장 차리는 경우도 많이 봤는데, 여자는 그런 경우를 못 봤네요.”

대부분의 한국 헬스장은 많은 비정규직과 소수의 정규직으로 수익을 창출하며 운영된다. 소수의 정규직이 될 수 있을 때까지 버티기에 유리한 건 남자다. 구조적으로 그렇다. 이런 구조의 업계가 비단 헬스장만은 아니다. 노동 조건이 개선되어도 여성이 불리한 구조는 지속된다. 우리가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무엇보다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매달려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 그 증거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남자들의 세상인 헬스 트레이너들 사이에서 더 힘겹게 살아남고 있을 여성 트레이너들을 한번쯤 생각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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