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주의적인 세상은 뭘 해도 목표를 요구한다. 요즘 운동을 한다고 말했을 때도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식스팩 만들 거야?” “몇 kg 뺄 거야?”
나에게 운동은 집안일과 같다.
집안일에는 목표가 없다. 나는 다이어트를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고, 보디빌딩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상을 조금 더 활력있게 유지하려는 갈망에서 운동을 한다. 가급적 정돈된 집을 유지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애석하게도 이런 경우, 집안일과 마찬가지로, 운동의 효과는 주로 운동의 부재로 증명된다. 너무 바쁘거나 아파서 1주일 이상 운동을 하지 못하면 그제서야 꾸준한 운동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성취가 하나 있다. 중량이다. 예전에는 1kg짜리 아령을 들고 밀리터리 프레스 10번만 해도 괴성을 지르곤 했는데, 이젠 3kg으로 1세트에 20개씩 3세트를 한다. 데드리프트는 50kg, 레그프레스는 80kg까지 늘었다. 아마 혼자서는 이렇게 쑥쑥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트레이너가 옆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현재 할 수 있는 최대한에서 딱 한 번 더’ 밀어붙이기 때문에, 꾸준히 중량과 횟수를 늘릴 수 있었다. 여차하면 트레이너가 도와줄 수 있으니 안심하고 파격적인 중량에 도전하기도 했다. 혼자서는 다칠까봐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벤치프레스 50kg 8회를 했을 때 트레이너는 뿌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보통 여자분이 50kg을 들면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호칭이 있어요.”
“뭔데요?”
“힘 센 여자. 이제부터 회원님은 공식적으로 ‘힘 센 여자’입니다.”
PT를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가슴이 벅차올랐던 순간이다. ‘공신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이 떠들고 다니는 주장이라 해도, 나는 이제 힘 센 여자다. 내가 추억의 RPG <마비노기> 캐릭터라면 언제까지나 이름 앞에 두고 싶을 칭호였다.
여성은 힘이 없다는 편견은 다른 편견들보다 훨씬 공고하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인 차이가 이런 편견의 든든한 뒷배다. 물론 평균적으로는 분명히 남성이 여성보다 근육량과 폐활량이 우수해 운동 능력이 더 좋다고 한다. 수많은 운동생리학 연구가 반복해서 확인한 결과다.
하지만 통계와 ‘정상성’을 혼동하기 시작할 때 차이는 차별이 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없다’라는 관찰 결과는 아주 쉽게 ‘힘이 없어야 정상적인 여성이다’라는 여성성에 대한 규정, 굴레, 제약으로 뒤바뀐다.
이런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스포츠 세계다. 여성 운동선수들은 운동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성별 논란’에 휩싸인다. 한국 여자축구 국가대표 박은선 선수, 남아프리카공화국 육상 국가대표이자 2016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캐스터 세메냐가 대표적인 최근 사례다.
기록 전쟁이 치열한 국제육상경기연맹은 1950년 7월부터 오직 여성 선수들에게만 성별 테스트를 해 왔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마찬가지다. 여성 종목에 남성이 나오면 불공평하게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힘 세고, 빠르고, ‘남성적’인 외모의 여성들. 그들의 능력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한계를 넘어섰다. 바로 이 때문에 여성이 아니라는 의심과 싸워야 했다. 적당히 굴레를 쓰고 남성과 한참 차이나는 운동 능력을 보여줘야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인정’된다.
성별 검사가 차별적일 뿐 만 아니라 반인권적이라는 지적은 6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성별 검사에는 크게 외형 검사, 염색체 검사, 호르몬 검사가 있다. 외형검사는 말 그대로 ‘애매한’ 신체부위를 여러 의사가 눈으로 검사하는 것이다. 호르몬 검사는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일정 이상일 경우 ‘여성이라고 하기엔 곤란한 호르몬 수치’로 판단한다. 염색체 검사는 Y염색체가 발견될 경우 남성이라고 간주했다. 이런 검사에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 선수들은 인공적으로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낮추거나, 외성기를 제거해야만 여성 종목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검사는 모두 사생활을 침해하고 수치심을 줄 뿐더러 과학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타고난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많은 여성도 있고, 외성기가 있는 여성도 있으며, ‘여성적인’ 외모와 Y염색체를 함께 가진 사람도 있다. ‘서구적인’ 여성성 개념이 성별 검사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고지대에서 생활하고 훈련한 케냐와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들은 폐활량이 많다. 성별 검사가 전제하는 ‘평균적인 여성’이 서양 기준이라면 당연히 이보다 운동 능력이 뛰어날 것이다.
여성 선수들은 적극 저항했고,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2015년 인도 육상선수 두티 찬드는 타고난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을 경우에도 이를 낮춰야만 경기에 나갈 수 있다는 국제육상경기연맹 규정을 스포츠조정법원에 제소했다(남성의 경우 인공적으로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높인 경우만 문제가 된다). 법원은 찬드의 손을 들었고, 국제육상경기연맹에게 2년 안에 테스토스테론과 경기 능력의 상관 관계를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호르몬에 근거한 성별 테스트는 지속될 수 없다. 아직도 국제육상경기연맹은 과학적인 증거를 가져오지 못했다.
애초에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정확하게 나눠지는 범주가 아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전제로 한 성별 검사들이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이다. 오히려 여성을 이렇게 정의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성별 검사를 요구당하는 사람이 바로 여성이라고.
올림픽 선수들만큼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에서도 힘 센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는 편견은 넘친다.
몇 년 전 만들어진 경찰청 포스터는 이런 편견이 어떻게 여성의 직업과 커리어를 제한하는지 잘 보여준다. 민원신고 182 아래에는 여성이 다정히 웃고 있고, 범죄신고 112 아래에는 남성이 팔근육을 자랑한다. 어떤 다른 설명도 없다. 그저 성별만으로도 충분하다. 여성은 힘이 필요치 않은 일만 할 것이다. 힘이 필요한 일은 모두 남성에게 맡겨질 것이다. 이보다 차별적인 성별 재현도 힘들 것 같다. 충분히 다른 방식의 재현도 가능하다.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범죄수사드라마 <NCIS>에서 가장 신체능력이 뛰어난 캐릭터는 훈련받은 여성이다.
결국 힘 센 여자가 된다는 건 만들어진 여성성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어떤 남자들은 이를 위협적이라고 생각한다. 알고 보니 내 트레이너도 꼭 긍정적인 의미로만 ‘힘 센 여자’ 호칭을 부여한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나는 (다소 허황된) 꿈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꾸준히 운동해서 나중엔 100kg도 들고 싶어요.”
트레이너가 기겁했다.
“헉, 그렇게 많이 들 필요까지야… 막 남자친구도 번쩍 번쩍 드는 거 아니에요?”
“완전 좋다. 멋있다.”
“남자친구가 무서워하지 않을까요?”
“왜요? 로맨틱한데.”
트레이너는 별 독특한 사람 다 봤다는 듯이 당황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이 대화를 얼버무렸다. 글쎄, 성별이 바뀌면 지겨울 정도로 로맨스의 정석이라 불리는 장면 아닌가? 내가 여자고 상대가 남자라는 이유로 장르가 ‘공포’로 바뀐다니. 결국 여성성을 ‘나약함’에 묶어둬야 남성성의 ‘강인함’이 안전하게 유지된다는 의미다. 그러거나 말거나, 힘 센 여자는 남성의 안락함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감출 생각이 없다. 그저 매일 자기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조금씩 밀어서 진전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