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너와 나: 무거운 여자

생각하다운동

트레이너와 나: 무거운 여자

신한슬

트레이너가 종종 양말을 벗고 올라가게 하는 기계, 인바디의 측정 결과에는 BMI라는 것이 나온다. 다이어트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거나 자신이 비만일까봐 두려워하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 봤을 단어다. 체질량지수(Body Mass Index)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몸무게를 키의 제곱으로 나눈 숫자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에 따르면 높은 BMI는 높은 체지방량을 의미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 개인의 건강이나 체지방량을 진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 과체중

트레이너는 인바디 결과에 나온 BMI를 바탕으로 내가 ‘과체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CDC 홈페이지에 내 키와 몸무게를 넣으면 ‘정상’이라고 나온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똑같은 키와 몸무게가 태평양을 건너면 정상이 되고 한반도에 있으면 과체중이라니.

이런 차이가 생긴 건 2000년도부터다. 17년 전까지는 내 체중도 한국에서 정상이었다! 당시 대한비만학회는 아시아 태평양 비만 진단 기준을 발표해, BMI 지표 상 저체중, 정상체중, 과체중, 비만 구간을 WHO가 정한 세계 비만 기준보다 낮게 설정했다. ‘아시아인은 인종적으로 체중이 적은 상태에서도 당뇨병 등 만성질환에 쉽게 노출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기준이 만들어진 당시 자료가 불충분하고 부분적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비만 기준이 너무 낮아 실제로는 사망률이 가장 낮은 BMI 구간이 비만 구간에 포함되기도 한다. 통계적으로 가장 건강한 사람들도 비만으로 취급한다면 무엇을 위한 비만 구간인지 모를 일이다. 이런 배경에서 일본검진학회가 2014년 BMI 관련 비만 기준을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한국도 일본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다시 정상 체중이 된다.

미용 체중

이쯤 되면 숫자 놀음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 술 더 떠 ‘미용 체중’이라는 유령이 인터넷을 오랫동안 떠돌고 있다. “정상 체중이 곧 미용 체중은 아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신장별 정상 체중과 미용 체중의 범위를 비교한 표인데, 대부분 10kg 정도 차이나게 적어 놓는다. 정상 체중이 58kg이라면 미용 체중은 48kg이라는 식이다. 몸무게가 정상이라고 안심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가장 옷을 입었을 때 예뻐보이는 체중을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 같은 소리다. 일단 ‘무게(weight)’와 ‘모양(shape)’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나는 실제로 58kg이었을 때와 48kg였을 때 사이즈만 좀 줄었을 뿐 체형 자체는 비슷했다. 튀어나온 뱃살이나 허릿살 같은 게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건강으로 말하자면 58kg일 때가 훨씬 활력있고 튼튼했다. 보기에도 더 탄탄한 몸이었다.

BMI 자체가 비과학적이라는 비판도 많다. 몸무게만으로는 체지방과 근육 비율을 알 수 없다. 내장지방이 많은 ‘마른 비만’은 근육질인 운동선수보다 훨씬 가볍다. 근육과 지방의 밀도 차이 때문이다. 근육은 부피에 비해 무겁다. 지방은 무게에 비해 크다. 기름은 물보다도 가볍다는 걸 생각해보면 금방 와닿는다. 근육이 늘어나고 지방이 줄어들면 체중은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다. 특정한 몸의 모양을 목표로 하는 다이어트를 하면서 체중계의 숫자만 쳐다보고 있는 건 어불성설이다.

'여자는 50kg가 넘으면 몬스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면 죽을 때까지 외모를 가꿔야 한다는 둥, 여자라면 미용에 신경 써야 한다는 둥, 외모에 관심이 없으면 여자도 아니라는 둥 끔찍한 얘기를 아무데서나 듣는 한국에 살면서 이런 숫자들을 보면 일단 마음이 뜨끔하게 마련이다. 내 몸무게가 정상 체중 구간에 들지 못하면 내 몸이 비정상이 된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내 몸무게가 미용 체중 구간에 들지 못하면 내 몸이 못생겼다는 선고를 받은 것 같아 속상하다.

대체 누가 ‘미용 체중’ 따위를 만들었을까? 일본 미용잡지에서 가져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만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여자 몸무게라곤 48kg밖에 모르고, 여자라면 키가 170cm여도 60kg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만들지 않았을까.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빠진다면, 이런 틀에 여성의 몸을 가둘수록 유리한 다이어트·미용·패션 업계에서 만들어 낸 말일지도 모른다.

숫자에 맞추어 변한 여성의 몸

실제로 한국 여성들의 몸은 ‘정상’과 ‘미용’을 앞세운 위협에 영향을 받아 변했다. 2015년 12월, 제7차 한국인 인체치수조사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를 처음 시작한 1976년과 비교했을 때 남성의 평균 체중은 전 세대에서 꾸준히 높아진 반면, 여성의 평균 체중은 10대를 제외하고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보고서의 표현대로 ‘식생활이 서구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비만율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2015년 전체 남성 비만율은 34%, 여성 비만율은 18%로 2배 차이였다. 무거운 여성의 몸을 죄악시하는 극단적인 다이어트 강박 사회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젊은 여성의 몸이 가벼워지고 있다. 2015년 기준 남성의 비만율은 세대에 따라 뒤집어진 U자형 곡선을 그리고 있다. 30대 후반에 피크였다가 조금씩 줄어든다. 반면 여성의 비만율은 M자형 곡선을 그린다. 18세부터 줄어들기 시작해 20대에 굉장히 낮아졌다가 다시 서서히 늘어난다. 20대 초반 비만율은 6%에 불과하다. 이 비만율은 세계 표준과 일본에 비해 너무 ‘빡빡하게’ 설정됐다고 비판받는 바로 그 아시아 태평양 BMI 지수를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다!세계 표준을 적용했을 때 한국 20대 여성의 비만율은 0%에 근접할지도 모른다.

무거운 여자

나는 운동을 하면서 체중계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 숫자는 내가 운동으로 얻고자 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 숫자는 나를 정의할 수 없고, 나의 아름다움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조금만 살이 찌면 예쁘게 맞는 여성복을 찾기 힘든 한국의 성차별적 의류시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거워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 당장은 쉽지 않더라도,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미용 체중’ 같은 헛소리를 시원하게 무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정한 구간에 맞지 않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자. 개인의 ‘정신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몸이 위축되지 않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마야 앤젤루의 말처럼 “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옹호할 때, 그는 사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으면서, 모든 여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에머 오툴,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서 재인용)

신한슬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트레이너와 나

이 크리에이터의 콘텐츠

운동에 관한 다른 콘텐츠

몸에 관한 다른 콘텐츠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