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못 자겠다며 정신과를 찾아가서 매주 한 차례씩 상담을 받고 약을 먹으며 지낸지 두어 달째. 주5일 출근하던 직장이 있었고 아기자기한 원룸에서 각각 여우같고 토끼같은 고양이를 두 마리나 모시고 있었는데도 나는 심심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무기력한 것이었지만 나는 내 상태를 몰랐다. 정 심심하면 이불에 붙은 고양이 털이나 떼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론 성에 안 차고, 사람을 만나긴 싫고(무섭고), 그런데 마침 주말에 특히 심심하니까 주말 아르바이트를 해보자! 집 근처에 카페가 많으니까 카페 알바를 하면 될 거야! 나는 씩씩해! 이러면서 주중에도 출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비교적 건강한 사고를 하게 된 지금은 이 스케줄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무리가 온다.)
주말 알바를 하던 카페의 사장님은 사람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 타입의 호인이었다. 나에게도 술을 자주 권했는데, 내가 좀처럼 취하지를 않자 넌 그렇게 뭘 조금도 내려놓을 줄을 몰라서 늘 우울이 있는 거라고 했다. 아니에요! 위가 약해서 취하기 전에 토하는 것뿐이라고요, 참나! 하지만 나는 알바생에게 술이나 먹이는 사장님에게도 싹싹하게 굴고, 토요일 아침 출근해서는 사장님들이 벌여놓은 불금의 술판을 치우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다시 말하자면 그 시절은 내 인생 가장 깊은 암흑기였는데도, 내 팔다리에는 활기가 넘쳤고 사람들을 대하며 생글생글 웃고 어린애가 지나가면 막대사탕을 줬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활기 속에 지내던 어느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맨날 온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별 거 아닌 병을 혼자 숨기고 키우다가 증세가 악화되어 병도 커지고 병원비도 커졌다고 했다. 이 때가 상담을 받으러 다닌 지 석 달쯤 되었을 때인가보다. 나는 약간 맷집이 생겨 있었다. 그래서 당시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일이 이 꼴로 되었으니, 사람들은 나더러 당장 본가로 내려와 앞이 안 보이게 된 아버지의 수발을 들라고 하겠지? 그럼 난 죽어버릴거야, 라고. 이는 얼핏 자살 예고처럼 들릴는지 모르나 전혀 위험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생애 최초로 주체적인 선택을 한 것뿐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아버지는 응급수술에 성공해 시력을 잃지 않게 됐다. 주체적인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어 한숨을 돌린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상황이 개선되자 새로이 분노했다. 그리고 또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내가 받지 않자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나의 가족 해체 스토리에서 키-포인트 역할을 하는 바로 그 메세지, "나는 너희 아버지와의 가족 관계를 없애고 싶다."였다. 좋았어! 난 문자메세지를 캡쳐해서 아버지에게 보냈다. 보셨죠? 알아서 하세요. 저도 두 분하고 가족 관계 없애고 싶네요. 연락하지 마세요! 나는 곧 가족을 비롯해 모든 일가친척들의 전화번호를 차단했고, 너무나 신이 났다. 내가 이런 반항을 할 줄 안단 말이야? "연락하지 마세요!"라니 나에게 이런 배짱이 있었어? 그리고 마침 어머니가 그런 책잡힐 말을 문자메세지로 보내주다니! 다음 상담 때 쪼르르 달려가 선생님에게 이러쿵저러쿵 일러바쳤다. 선생님 저 잘했죠? 선생님은 예의상 잘 했다고 해 주었다.
내가 계속해서 연락을 거부하자 아버지는 회사로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선생님에게 쪼르르 일러바쳤다. 나름대로 멋들어지게 답장을 쓰고, 역시 선생님에게 보여드린 뒤 칭찬을 받았다. 어머니는 동생을 앞세워 직장으로 찾아오기도 했고,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에게 쪼르르 일러바치면, 선생님은 늘 나에게 잘 했다고,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어요, 하고 칭찬해 주었다. 지금에 돌이켜 생각하면 그게 무슨 칭찬받을 일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 한들 상담자에게 칭찬받으려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담자(나)의 삶도 참 구차하고 박복했다, 싶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난다. 노파심에 덧붙이는 말씀으로, 아무리 내가 주어라고는 해도 '쪼르르 일러바쳤다'는 식의 표현은 꽤나 경박하게 들릴 터다. 어떻게든 그 시절을 통과해온 자의 여유려니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
억지로 끊어내버려 이제는 그리운 부모도 없는 고향 대신에. 선생님의 진료실이 있던 이태원의 해질녘은 나에게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이다. 상담을 예약한 날 저녁이면 한강을 건너 덜 넘어간 해를 뒤로 하고 창문 없는 그 방에 들어가서는, 이윽고 예약된 시간이 끝나서 밖에 나오면 완전히 깜깜한 밤이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바깥으로 나오면 갑자기 소란스럽고 국적 불명의 풍경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은 취하러 가는 길이거나 취해서 춤 추러 가는 길이거나 했다. 나는 그들을 거슬러 길을 헤치고 올라가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았다. 약사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어서 쎄로켈, 아티반 같은 게 적힌 처방전을 갖고 오는 사람을 붙들고 자꾸 스몰토크를 시도했다. 약봉투를 받아 나오며, 건강한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즐겁게 지내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인가 하며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버스를 타서는 새롭게 울기도 했다. 집에 가면 밥을 안 먹고 그대로 모로 누워 약을 삼키고 잠을 잤다. 참으로 괴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뚫고 지나온 보람이 있는 시기였다. 정말이지 선생님, 이번에는 꼭 볕 잘 드는 진료실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