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로도 남편의 ‘컨트롤 프릭control freak’ 증상은 계속되었다.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었지만 언제나 또박또박 논리를 만들어가는 그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하루는 대표님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집에 들어오는데, 내가 전화통화를 하느라 연락 없이 조금 늦게 – 그것도 아홉시 정도밖에 안 된 정도였다 – 들어오자, 현관에서 그는 자신의 상사이기도 한 대표님과 통화하고 있는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소리쳤다.
빨리 끊어 이 XX년들아!
내가 평생 존경하고 어른으로 생각해 온 대표님이 나와 싸잡혀 모욕을 당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처음에 결혼 결정을 보고하려 둘이 찾아갔을 때 대표님은 나를 한쪽으로 끌어당겨 이렇게 말했었다.
너 설마 쟤랑 결혼한다는 이야기하러 온 건 아니지. 제발 그건 아니라고 말해줘.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저런 사람하고 결혼하면 안되겠네요, 어른들 말이 맞네요, 하고. 나의 고향은 대구인데, 대구 어르신들은 종종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한다. ‘얼굴 보자, 이름 짓자.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자신의 얼굴에 적혀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얼굴만 봐도 어느 정도 세상을 아는 어른들이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은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와의 결혼 결심을 밝히기 위해 우리 어머니와 이모들이 모두 참석한 사촌오빠의 결혼식에 그와 동행했을 때 어머니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하라고 어머니가 간곡하게 말했지만 미친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몇 년 전, 지금은 방송인이 되어 떵떵거리며 잘 나가는 남자친구 – 결국 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 와 결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도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사진만 본 건데도 그의 관상을 말씀하셨다. 걔는 말이야, 옛날 서부 영화에 보면 말이지, 시작하자마자 5분만에 죽어나가는 멕시코인 졸개같은 얼굴이야. 그의 인격에 딱 걸맞는 인물평이었는데도 사랑인지 욕정인지에 미친 나는 어머니가 이미 기막히게 내 전남친의 사람됨을 맞춘 적이 있는데도 그 지혜를 무시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그 지혜를 무시한 것을, 그를, 그리고 나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게 된다.
때리지 말라고
나는 살면서 십 수 마리의 유기견을 구조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느 집에도 보낼 생각이 없는 나만의 개가 있었다. 결혼 당시 13살 정도였으니까 노견이었지만, 아직 건강해서 스무 살 정도는 너끈히 살 것 같았다. 그 개는 내 목숨보다, 아니 나 자신보다 소중했다. 보수 기독교인이던 부모님은 ‘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친다’라는 구약성경 구절을 신봉하는 이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구타에 익숙했는데 문제는 이게 언제 맞을지 모른다는 거였다. 영어로 하면 thrash, 라고 해야 할까. 성질이 급한 경상도 기질까지 겹쳐 뭔가 잘못했다 싶으면 따귀가, 때로는 달군 다리미가, 별의별 것이 다 날아왔다. 가정 형편 때문에 부모님은 나를 낳고 더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경상도에는 이런 말도 있다. ‘젊은 에미 만난 내 팔자야. ’ 젊고 기운 좋은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길러 본 적이 없으니 육아에 대한 지혜나 노하우가 없어 아이가 말을 안 들을 때마다 젊은 기운으로 쥐어박고 괴롭게 하니 어린아이가 탄식을 한다는 농담이다.
내 경우에는 농담이 아니었다. 부모의 구타는 내가 21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깊은 우울증을 앓았다. 나는 결국 부모로부터의 구타를 멈추는데 성공했는데, 말 그대로 상처뿐인 승리였다. 내가 체격이 작지 않은데 비해 부모님은 두 분 다 체구가 작은 편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는 맞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침내 이쪽에서도 부모의 손찌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팔을 잡고 꼼짝 못하게 하는 수준에서 이쪽에서도 덤벼 육탄전을 벌였다. 부모님은 탄식하며 나에게 천륜을 거스른 죄인이라며 어쩌면 딸에게 맞는 부모가 자신들 말고 또 있겠냐며 가슴을 쳤다. 나는 나대로 가슴을 쳤다. 제발 나이도 찬 나를 때리지 말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말을 듣지 않는 그들이 내가 드디어 맞서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고 자신들의 신상에 해가 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생기자 그제야 폭력을 그만둔 거였다. 그 사실이 나에게는 견딜 수 없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한 마디로 자신이 맞을까봐 불안해졌을 때에야 폭력을 그만두다니, 우리는 분명 인간이었지만 한없이 짐승에 가깝게 느껴졌다.
이후로도 부모님은 나의 배은망덕함에 대해 몇 번이나 탄식을 거듭했지만 나는 그런 말들을 한 귀로 흘려 버리고 고작 스물 한 살에 비출산을 굳게 다짐했다.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나는 분명히 그 아이를 컨트롤하려고 하다가 때릴 것이다. 내가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내 핏줄에 새겨져 있는 폭력 때문에 나는 반드시 그것을 대물림하고야 말 것이다, 내가 대단히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분명 내 아이를 낳고 그 아이와 갈등이 생긴다면 내 몸에 익은 대로 폭력을 휘두르고야 말 것이다, 라는 확신이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아주 굳게 머리를 들었다. 그렇게 울면서 나는 절대로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피를 이어 폭력이 이미 내 DNA에 굳게 새겨졌으니,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그 폭력의 사슬을 끊어 버리겠다고. 아직은 이성애의 환상에 빠져 사랑하는 남자와 결합해 그의 아이를 낳고 싶다거나 아니면 싱글맘이더라도 아이를 낳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이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꿀 만도 한데, 나는 이미 출산을 영원히 포기하고 있었다.
개
이후 대학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대학 동기던 10살 가량 위의 남자친구(지금은 대기업의 악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아주 같잖다)가 돈 문제는 물론이고 여러 모로 나에게 사기를 쳐서 척박한 삶을 살고 있던 나를 구해 준 것이 그 개였다. 꼬리와 다리가 부러진 채 동네 동물병원에 맡겨져 있던 개를 처음 보자마자 마음이 끌려 내가 키우기로 했는데, 내가 그 개를 본 순간 어떤 ‘각인’이 된 것처럼 개도 나에게 ‘각인’을 한 것 같았다. 마치 늑대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각인된 거였다. 수없이 많은 사랑스러운 유기견들을 길렀지만 어떤 개도 그 개처럼 사랑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어느 날 내가 말대답을 했다며 그 개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