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사람에 대한 혐오(펫 셰이밍)는 여남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 같지만, 사실 세상의 시선은 뚱뚱한 남성에게 훨씬 너그럽다. 44, 55, 66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다 내 돈 내고 내 옷 사러 갔는데도 마치 그쪽에서 내게 옷을 팔아 준 듯한 고마움을 느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여성복과 달리 좀더 유동적이라 모욕을 느낄 일이 보다 적은 남성복 시장이 그렇고, 풍성한 몸집을 가진 남자는 있어도 날씬하다 못해 말라깽이가 아닌 여자는 후덕한 어머니나 할머니 역할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연예계가 그렇다. 무거운 남자들은 여전히 섹시하다고 여겨지며,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헐리우드 배우 중에도 비교적 뚱뚱한 편인 폴 지아매티, 잭 블랙, 제임스 갠돌피니 등의 남배우들은 몸값도 높으며 작품성 있는 영화에서 대중성 있는 영화까지 두루 캐스팅되곤 한다.
뚱뚱해도 '내면이 아름다운'
이를테면 잭 블랙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라는 영화에서 무거운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이 무거운 여자 역할은 기네스 팰트로가 맡았는데, 늘씬한 그는 이 역할을 위해 엄청나게 뚱뚱한 여자로 보이도록 특수 분장을 했다. 그 특수 분장을 하고 거리에 나가 본 그는 지금까지 몰랐던 뚱뚱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압력과 모욕에 대해 충격을 받고 그에 대한 발언을 수차례 한 적이 있다.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이었다가 우연히 최면에 걸려 내적 아름다움을 갖춘 여성만이 아름답게 보이게 되어, 훌륭한 인격을 갖춘 여성이나 고도 비만인 체격 때문에 그 장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 로즈마리 샤나한(기네스 펠트로 역)을 사랑하게 된 할(잭 블랙 역)은 최면이 풀려 로즈마리의 본모습을 알게 된 후에도 그의 마음에 이끌려 남은 인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니까, 이런 영화가 말하는 것은, 무거운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훌륭한 인격과도 같은 대단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구구절절한 당위 없이 무거운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눈에 재미있고 웃기다는 것 말고 외모 면에서는 아무런 매력이 없어 보이는 잭 블랙 같은 남자는 얼마든지 기네스 펠트로 같은 여성의 사랑을 받고, <로맨틱 홀리데이>같은 영화에서는 기네스 펠트로 못지않은 미인인 케이트 윈슬렛과 로맨스 연기를 펼친다.
로맨틱 코미디의 개연성은 캐릭터의 매력일 텐데,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 역)는 선이 굵은 수려한 영국 미인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의 바람둥이 동료를 짝사랑하며 아파하다가 짜리몽땅하고 뚱뚱한 마일즈(잭 블랙 역)과 사랑에 빠진다. 상심한 케이트 윈슬렛과 타이밍 좋게 로맨틱한 ‘홀리데이’를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 천생연분의 짝이 되는 것이다. 케이트 윈슬렛은 모두 알다시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주연한 영화 <타이타닉>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는데, 당시 비쩍 마른 보통 여배우들보다 조금 더 풍만한 체격이라 영화에서 케이트 윈슬렛이 조금 더 가벼웠으면 판자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올라가서 둘 다 살 수 있었다는 둥, 그녀의 체격에 대한 비아냥이 영화 외적으로 무척 많았다.
매력의 균형은 어디로
최근 개봉한 영화 <롱 샷>은 젊은 여성 대통령 후보인 샬롯 필드(샤를리즈 테론 역)가 어릴 적 아르바이트로 베이비시팅을 해 주었던 전직 기자 프레드 플라스키(세스 로건 역)에게 자신의 바이오그래피를 쓰게 하면서 재회하여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인데, 영화 자체도 그다지 만듦새가 좋지 않아 재미가 없었지만 두 사람의 매력의 균형이 너무 맞지 않아 불쾌하기까지 했다. 샤를리즈 테론이 누군가. <매드 맥스>의 퓨리오사 아닌가! 그렇게 지적이고 아름다운 그녀가 왜 퉁퉁하고 별 매력 없는 세스 로건과 사랑에 빠져야만 하는가? 이쯤 되면 ‘무해한 수준의 음모’라는 말에 머리에 맴돌 정도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트콤 <프렌즈>에서 날씬하다 못해 삐쩍 마른 요리사로 등장한 주인공 중 하나인 모니카의 고교 시절에 대한 묘사는 전형적인 비만 혐오다. 무거운 여자로 분장하고 끊임없이 먹어대면서 주책스러운 성격에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으며 절제력이 전혀 없는 뚱보인 그는 지금의 깔끔하고 일 중독자에 모든 일을 철저하게 완수해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자와는 전혀 다른 혐오스러운 모습이다.
수퇘지와 암퇘지
최근 김민하 기자가 쓴 <돼지의 왕>이라는 책을 읽었다. 107kg라는 거구에 운동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던 필자가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을 경험하면서 그 운동을 해 본 경험에 대해 쓴 책이다. 나도 몇 년 전 크로스핏을 경험해 본 적이 있어 어떻게 필자가 운동에 발전이 있었고 몸이 변해 갔는지가 궁금해 책을 집어 들고 끝까지 읽고는 복잡한 감정에 빠졌다. 101kg에서 운동을 시작하며 좋지 않은 생활습관과 바쁜 업무로 살이 찐 자신을 반복하여 ‘돼지’라고 부르는 모습에서부터 약간 불편했다. 여자들이 스스로를 돼지라 부르는 것과, 30대의 남자가 자신을 ‘돼지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조금이라도 무거운 여자는 저도 제가 살을 빼야 한다는 것을 알아요, 저도 제가 돼지라는 것을 알아요 암요 저는 돼지인걸요, 라며 자진납세라도 하는 기분으로 자신이 돼지라고 먼저 세상에 이야기한다. 그러나 남자는 그래 내가 돼지다, 내가 돼지의 왕이야, 하며 자신의 체구를 희화화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무거운 여자는 자신의 몸을 희화화할 수가 없다. 뚱뚱한 것도 웃기는 일인데 여자에게는 그것을 웃어넘길 만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뚱뚱한 것은 죄다. 죄는 속죄하고 용서받아야 할 일이지,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필자는 크로스핏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나도 해봤기 때문에 크로스핏이 얼마나 힘겨운 운동인지 잘 안다. 그러나 이 필자처럼 ‘돼지에게 이것은 너무 무리인 동작이었다’라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 살 빼려고 하는 운동이 쉽고 재미있을 줄 알았냐’라는 비판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다들 알다시피, 우리 사회는 남성을 아주 좋아한다. 무거운 남성이 볼멘소리를 해가며 겨우겨우 운동을 하는 것은 어여삐 여김을 받지만, 무거운 여성이 불평을 하며 꾸역꾸역 운동을 하는 것은 경멸을 받는다. 원래 여성은 살이 쪄서는 안 되는 존재인데, 살이 찐다는 원죄를 저질렀으니 조용히 속죄를 해야 하건만 불평을 한다는 죄를 2차로 또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필자는 운동을 마치고 가는 길에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며 맛있는 초밥집에 들러 초밥을 먹는다. 100kg가 나가는 무거운 여자가 크로스핏을 수행하고 운동을 했으니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며 매번 초밥집에 들러 초밥을 먹어치웠다고 공개 운동 일지에 썼다면 그는 무슨 말을 들을까?
필자는 4개월간 크로스핏을 했고 그동안 4kg를 감량했다. 먹을 것을 조절하거나 조심하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자신있게 돼지인 나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며 운동을 권유한다. 4개월간 운동을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4kg 빠진 여자가 나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며 운동을 권하는 내용의 책을 과연 써서 출판이나 할 수 있을까? 자기 블로그에만 써도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이런 책을 출판하고 사람들에게 4개월간 운동해보니 참 좋다며 운동을 권유할 수 있다. 101kg에서 97kg가 된 여자가 운동에 대한 책을 출판할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남에게 운동이 어떻고 저떻고 훈수나 놓을 수 있을까? 남보다 무겁다면, 남자는 ‘돼지의 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무거운 여자는 그냥 돼지일 뿐이다. 같은 돼지라도 수퇘지, 암퇘지 취급이 이렇게나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