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그 흔한 말을 반대로 생각한 지 좀 됐다. 그 말인즉슨, 건강하지 못한 몸에는 건강하지 못한 정신이 깃든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생애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지 못한 몸을 지니고 있는 지금, 나는 내 정신 역시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듯 이 모든 것은 물론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변하면서 내 정신 역시 서서히 부서졌다. 내 몸을, 그리고 내 정신을 고쳐야 한다고 결심한 후, 나는 이 과정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몇 년 동안의 가혹했던 개인사, ‘외모코르셋’을 단단히 차고 있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내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털어놓는 작업은 쉽지 않았고, 앞으로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나의 상황은 실로 좋지 않다. 내가 지금 뚱뚱하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뚱뚱하면서 건강만 하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요즘 한국에도 아름다운 플러스 모델들이 등장하고 있는 판국에 건강하기만 하다면 지금 가진 괴로움의 8할은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픔에 빠져 게으르게 지내느라, 옛날 어르신들이 ‘자리 보전한다’라고 하는 그 표현 그대로 누워 지내느라 무거워져 버린 나는 고도 비만, 고지혈증, 당뇨 고위험군, 수면 장애를 동반한 우울증 환자다. 만성이 되어 버린 PTSD를 지닌, 너무나 무거운 한 명의 여자, 그게 지금의 나다. 가장 말랐을 때의 딱 두 배의 몸무게가 된 지금은 심지어 220mm 사이즈의 작은 발이 내 체중을 감당하지 못해 발을 헛디뎠다가 발목 인대가 시원하게 파열되는 바람에 인대 재건 수술을 받느라 병원 신세까지 져야 했다. 봄이 오면 하고 싶었던 운동도 목발 신세를 지느라 한동안 요원하다.
각자의 사연
예전에는 체구가 큰 사람을 보면 과식을 하거나 운동을 안 하나?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면 몸이 좀 가벼워질텐데, 하고 국영수 튼튼히 공부하고 EBS 방송으로 공부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이제는 다르다. 어디 건강이 안 좋은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고 각자의 사연을 생각한다. ‘어쩌다가.’ 친절과 관심을 가장한, 잔소리와 호들갑이 따라오는 바로 이 질문. 특히 예전 몸무게가 지금의 절반이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다들 물어본다.
아니,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요?
이런 질문이 나오면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끝으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모두 각자의 ‘어쩌다가’가 있다. 마른 사람은 어쩌다 말랐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만 - 대신 그들에게는 해골 같다, 살 좀 쪄라, 더 먹어라 등 나름의 ‘고나리질’이 따른다 - 살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고백할 때까지 들들 볶이곤 한다. 한국에서 다이어트는 국민스포츠다. 전혀 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아 나 이제 그만 먹어야 되는데, 나 이제 살 뺄 거야, 하며 도대체 어디에 빠질 살이 있다는 건지 자기 몸에 대해 불평하는 건 이게 바로 스포츠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뚱뚱한 사람이 살 빼는 과정을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하며 찬탄을 보내고, 살 쪘다가 빠진 사람이 무슨 노벨상이라고 탄 것 처럼 상찬을 받고, 다이어트를 결심한 여성들이 카페 등에서 인체골격처럼 마른 여성들의 사진을 ‘다이어트 자극짤’이라고 올리는 스포츠. 그러다 보니 체구가 큰 사람을 당당하게 모욕한 다음 ‘저 사람이 살을 빼도록 내가 자극해 주었다’라며 훌륭한 선행이라도 한 것처럼 구는 꼴을 봐야 한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고 남들이 안부를 묻는 옛날의 그 날씬한 여자는 아마 지금 내 살덩어리 안에서 오래 전에 질식해 죽은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 ‘어쩌다가’를 설명하기 싫어서, 나는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고마운 이들의 초대에도 응하지 않고,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망가진 인생을 살았고,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내 몸에 새겨졌다. 마치 흉터처럼 내 몸 여기저기를 차지한 좋지 못한 것들을 보면서, 과연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 왔다. 중학교 시절부터니까 꽤 오래된 셈이다. 나는 1980년대부터 활동해왔던 여성운동단체 ‘또 하나의 문화’의 동인이었던 한국의 제 1세대 페미니스트들을 알게 되어 일찍부터 성차별과 페미니즘에 눈을 떴다. 10대 시절부터 ‘전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휴머니스트예요’라고 이야기하는 여성 유명인들을 경멸했다. ‘지금 여성들의 신세가 좋다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그런 이야길 큰 소리로 했다간 남자들이 절 싫어할까 봐 너무 걱정돼요’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쩌다가’가 찾아온 때이기도 했다. 부모 모두 단신인지라 나에게 키 크는 한약을 어디서 싸게 공동구매해 와서는 닦달을 하며 먹였는데, 키는 고작 2cm 컸지만 두 달 동안 13kg가 쪘다.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 여러 명의 피해자가 나왔다. 적정가보다 굉장히 싸게 파는 한약에 스테로이드 성분을 주입한 것을 키 크는 한약이라고 먹었던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 ‘어쩌다가’가 있기 전까지 늘 마른 체구로 살아왔기 때문에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 줄 알았는데, 한약을 먹기 시작하자 ‘어쩌다가’ 누가 내 몸에 공기라도 주입한 듯이 갑자기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몸이 탱탱 부풀자 먹는 대로 살로 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살이 나를 둘러싸서 그 안의 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10대를 내내 포동포동, 혹은 피둥피둥한 채로 보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자퇴를 선택하고 집에서 혼자 공부하면서 각종 스트레스를 먹는 데 푸는 바람에 10kg 정도가 더 쪘다. 그나마 당시는 지금 같은 걸 그룹 열풍이 불기 이전이었고, 어른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종용하면서 ‘대학 가면 살 빠진다’라는 선의의 거짓말을 해 주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아무도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또래의 아이돌이 이쑤시개처럼 가녀린 팔다리로 한들한들 춤을 추는 광경을 보면서 성장하고, ‘코르셋 교복’ 같은 말이 난무할 만큼 교복에서까지 ‘라인’을 강조하고 있는 지금은 자라나는 10대들에게 훨씬 가혹한 환경이 아닐까 나는 짐작한다.
'어쩌다가'
내보내기
그 시절 두 살 많은 언니 오빠들과 대입 재수 종합반에 다녔던 나는, ‘어쩌다가’를 인생에서 좀 내보내 보기로 굳게 결심했다. 일단 먹는 것을 극단적으로 조절하기로 했다. 학원까지 꾸역꾸역 걸어갔고, 아침은 집에서 평소대로 먹었고, 점심은 200ml 짜리 우유 하나로 때우고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렇게 했더니 3주 만에 8kg이 빠졌다. 포동포동한 돼지 취급을 하던 같은 반 남학생들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래도 날씬한 건 아니었다. 내가 목표로 하는 체중으로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5kg 정도를 더 빼야 했다. 대학에 입학했고, 당시에는 요즘처럼 운동으로 만드는 건강하고 탄탄한 몸매보다 소독저처럼 마르고 가냘픈 몸을 더 쳐주던 때라 근육도 잘 붙고 어깨도 넓은 나는 날씬하단 말을 한 번 들어 보고 싶어서 단식원에까지 들어갔다. 그때 문제의 5kg를 빼긴 했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모르게 그 5kg는 슬그머니 나에게 도로 달라붙었다.
10대 시절부터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했으면서 어째서 그렇게 객관적으로 괜찮은 용모가 되기 위해 공을 들였던 것일까. 이 두 가지는 얼핏 모순되는 것 같지만 당시의 내 안에서는 모순되지 않았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도 지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페미니스트에 대한 경멸은 지금 못지않았다. 요새 ‘메갈 쿵쾅쿵쾅’ 같은 표현으로 페미니스트를 공격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못생기고 뚱뚱하고 매력이 없어서 남자들이 쳐다봐 주지도 않는 불쌍한 여자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적을 치려면 적의 칼로 쳐라, 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들의 칼로 그들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즉, 누가 봐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욕망하게 만들고, 나를 욕망했다는 사실에 그들이 내적 모순과 수치심을 경험하길 바랐다. 막말로 그들이 “내가 페미니스트를 보고 발기하다니!” 하며 괴로워하길 바랐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도 해주지 않음으로써, ‘페미니스트에게 까였다’라는 수치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품이 드는 작업이었다. 다음 글에서 거의 나를 죽일 뻔한 그 작업을 이야기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