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여자가 되면 3. '쿨한 개념녀'가 되지 못해서 미안해

생각하다연애관계

무거운 여자가 되면 3. '쿨한 개념녀'가 되지 못해서 미안해

김현진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내가 외모를, 특히 몸매를 가부장적 사회의 기준을 아예 뺨을 후려칠 수 있도록 이를 악물고 관리했던 행위는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 20대 시절에 절정에 달했다. 2015년부터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의 모먼트가 그때도 있었다면 조금은 그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000년대에 20대가 된 여성들은 그 당시 등장해 마치 역병처럼 창궐하며 어떤 남성들이 요즘도 혐오의 대상을 찾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된장녀’라는 단어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3040 여성들은 ‘된장녀’ ‘김치녀’로 찍히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남성들이 선심 쓰듯 하사하는 ‘개념녀’라는 인증이 반갑지도 않아 이중으로 괴로웠다.

너 된장녀지?

마치 냉전 시절 ‘너 빨갱이지?’ 하는 것처럼 남성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에게 총구를 들이대듯 ‘너 된장녀지?’ 하는 꼬리표를 붙였다. 브랜드 제품을 애호하며 한 끼 백반 값보다 비싼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여성을 비꼬는 ‘된장녀’라는 단어와 남성에게서 뭔가 뜯어내려고만 하고 돈을 내려 하지 않는 여성을 일컫는 ‘김치녀’라는 단어는 2019년인 지금까지도 여성들에게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

지금 3세대 페미니스트들이 하듯 담대하고 사정없이 ‘미러링’을 하며 내가 된장녀든 말든 네가 알 게 뭐야 이 새끼야, 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나 2000년대는 젊은 여성이 건강한 자의식을 형성하기에 그다지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뭐, 여성에게 인류 탄생 이래로 그런 시절은 없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케이블 채널이 늘어나면서 패션 채널 온스타일이 생겨나 여성들은 그 채널을 즐겼지만 외모와 패션에 대한 압박 역시 강해졌고,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가 인기를 끌면서 외계어처럼 낯선 단어였던 지미 추, 마놀로 블라닉 같은 브랜드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글을 써서 생계를 이어 가는 입장에서 도대체 캐리 브래드쇼가 고작 매체 하나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그렇게 많은 명품 구두를 사고 또 뉴욕의 아담한 아파트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는 완전히 판타지의 영역으로 보일 따름이다.

하지만 서로 외모나 성격과 직업이 판이하게 다르지만 진한 우정으로 묶인 여성 네 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중요한 인물 몇 사람을 빼면 거의 모든 남자들을 하룻밤 사랑의 소모품처럼 가볍게 날려 버리고 주역인 여성들에게 이야기가 집중된 드라마는 흔치 않았기에 나와 많은 여성들이 <섹스 앤 더 시티>에 끌렸다. 화려한 뉴욕에서 어엿한 자신의 일을 가지고 치열하게 해나가고, 쇼핑을 즐기고, 때로는 함께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을 하며 밤에는 한껏 화려하게 차려입고 붉은 빛깔의 칵테일 ‘코스모폴리탄’을 마시고, 주말이면 시원한 통유리로 된 카페에 앉아 브런치를 즐기는 그들에게 한편으로는 공감이 갔고 한편으로는 쿨하고 멋져 보였다. 

그러나 최근 출간된 울프소셜클럽 김진아 대표의 책 <나는 내 파이를 구하러 왔지 지구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에 나오는 구절처럼 그 드라마는 보는 우리들을 패션 중독보다 오히려 일종의 연애 중독의 길로 이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또 조깅하고 쇼핑하고 술 마시고 브런치를 먹으면서 끊임없이 하는 이야기는 남자, 남자, 남자 이야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애와 외모에 대한
강박 부추기기

반드시 <섹스 앤 더 시티>의 죄는 아니지만, 지금도 역시 대중매체를 비롯해 사회의 온갖 메시지가 신체 건강하고 멀쩡한 여성이라면 싱글로 있는 것은 이상하다며 반드시 언제나 연애를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을 심어준다. 아마 남성 한 명당 시중을 들고 욕구를 채워 줄 여성 한 명이 반드시 배분되어야 한다는 가부장제가 활발히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한국 텔레비전에서는 <짝> 같은 노골적인 이성애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한창 유행했다. ‘노처녀’가 있을 뿐, ‘비혼’ 같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여자 나이가 25살을 넘으면 ‘꺾인’ 것이고, 팔리지 않는 크리스마스 케익이라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참 쉽게도 말했다.

또 한창 각종 패션지가 융성하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지하철 신문, 잡지 가판대에서 만 원 이하의 가격으로 쉽게 구입할 수 있으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처럼 잡지책 가격보다 훨씬 비싼 화장품 본품이나 향수 등 다양한 경품을 내걸어 지갑을 열게끔 했던 패션지는 그 종류도 너무나 다양했다. 좋은 부록을 주는 달에는 잡지를 몇 권씩 사재기하는 여성들도 흔했다. 한국은 물론 미국, 프랑스, 일본까지 다양한 나라의 패션지가 발매되었다. 그 패션지들은 젊은 여성들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거의 모든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아무말 대잔치’였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섹시하되 쉽게 섹스해선 안 된다’ ‘멋을 부려야 하지만 멋을 부린 티가 나선 안 된다’ ‘예뻐야 한다, 그러나 예쁜 척을 해서는 안 된다’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성형을 해서는 안 된다, 혹은 들켜서는 안 된다’ ‘화장을 해야 하지만 화장한 티가 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투명화장을 해야 한다’ ‘말라야 한다, 그러나 남자 앞에서는 복스럽게 잘 먹어야 한다’ ‘저렴한 구제 옷 같은 것을 입어도 명품 못지 않도록 패셔너블하게 소화해야 한다’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 그러나 남성 앞에서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현명한 여성이다’ ‘그에게 한턱 내는 쿨한 모습을 보이도록, 그러나 남자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등등 계산대 앞에서 그에게 카드를 살짝 건네주라’는 각종 강령과 충고 등등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목표들이 여성 독자들 앞에 떡하니 제시되었다.

쿨하지 못하게
왜 그래

처음 본 남자와의 섹스하는 것을 아주 정상적인 일로 치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영향과 <코스모폴리탄>처럼 섹스 테크닉을 자세히 설명하는 매체와 짝짓기를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 덕분에 여성들은 성관계에 더 개방적이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꼈고, 남성들 역시 그것을 열렬히 환영하고 은근히 기대했다. 하필 당시 폭풍처럼 몰아친 ‘쿨’이라는 단어의 유행 때문에, 성관계에 쉽게 응하지 않는 여성들은 상대로부터 이런 비난을 들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너 쿨한 앤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성관계를 가진 후 그 여성과 이성 관계를 이어나갈 마음이 없는 남성들 역시 여성이 좀 엉겨 붙는다 싶으면 이 단어를 잽싸게 사용했다. “너 쿨하지 못하게 왜 그래?” 그 때는 쿨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사회는 ‘쿨한 여자’가 되기를 계속 강권했다.

늘어나는 숙제

패션지에서는 ‘그를 유혹하기 위한 제스처 10가지’ ‘침대에서 섹시한 행동 30개’ ‘그가 경험해보지 못한 테크닉!’ 따위의 기획 기사를 실었다. 여성들에게는 숙제가 점점 늘어났다. 패셔너블한 용모를 유지하되 그럴듯한 커리어도 있어야 하고 남성과의 관계에서도 적극적이되 행실은 정숙해야 했다. 거기에다 침대에서 적극적으로 남성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어야 쿨한 여성이라는 ‘요망사항’이 늘어났다. ‘몸짱 아줌마’ ‘동안’ ‘베이글녀’ ‘꿀벅지’ ‘S라인’ 등 당시 유행어가 보여주듯이 여성의 신체는 마치 정육점에서 고기를 부위별로 해체하는 것처럼 신체 각 부분별로 관찰되고 지적당했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요구는 21세기가 되면서 보다 세분화되었다.

과거에는 강수지나 하수빈처럼 하늘하늘하게 마르기만 하면 되었지만, 전지현처럼 몸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여성 연예인이 각광받고 ‘몸짱 아줌마’나 숀 리 등 대중매체에 운동 전도사들이 등장하면서 단순히 체중 조절을 해 마른 몸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 탄력까지 갖춘 몸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숙제가 하나 둘씩 늘어나고, 그 숙제를 쫓아가다 보면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이 있듯 사회에서 합격점이라고 승인 받는 육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뿐인가, 쿨한 여성이 되어야 했다. 이 시절부터 보통 사람의 심성에만 쓰던 ‘착하다’라는 표현이 몸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얼굴이 착하다, 몸매가 착하다…. 마음씨만 고운 것이 아니라 외모도 착해야 했다. 인성이 착한 것만으론 부족하고 외관까지 ‘착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었다. 그렇게 겉과 속이 다 착한 여성만이 ‘된장녀’가 아니고 ‘김치녀’도 아닌 ‘개념녀’로 인정받는 시절이었다.

마치 마녀사냥의 열기처럼 ‘된장녀’를 찾아내 조지려는 열기가 워낙 뜨거웠기 때문에, 여성들은 '된장녀' 혐의를 쓰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건 여성들이 약하고 줏대 없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서 한 출연자가 ‘남성 키 180cm 이하는 루저’라는 장난스러운 발언을 하자 온 대한민국 남성들이 들고일어나 순식간에 그녀를 지하 13층 정도까지 매장시켰다. 고작 남성들의 기분을 의도치 않고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젊은 여성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여성들이 평소 듣고 사는 말의 백분의 일, 아니 천분의 일도 안 되는 그 정도 말을 가지고 한 여성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며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대한민국 여성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여성들은 ‘개념녀’의 범주 안에 있으려고 자동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념녀’의 길 역시 쉽지 않았다. ‘개념녀’라는 치하는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고기를 다 뜯어먹은 뼈다귀를 던져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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