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갈리아’의 전신인 ‘메르스 갤러리’가 생겨났던 2015년경,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를 비롯해 보배드림, 이종카페 등 남초 커뮤니티가 여성 전용 커뮤니티 “여성시대”이하 (여시)를 힘을 합쳐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여성 비율이 그나마 높은 ‘오늘의 유머’에서 ‘개념녀 인증’이 잇따라 일어났다.
삑, 개념녀입니다
포스트잇 등으로 주민등록증에서 다른 숫자는 모두 가리고 여성을 뜻하는 ‘2’라는 숫자로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밝히며 ‘나는 여시에 반대합니다’라고 여성스러운 글씨로 적은 사진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남성들이 이 여성은 개념녀라고 판정을 내리고 열렬히 치하했다. 댓글에서 그들은 이런 여성이 진정한 여성이다, 정말 이런 여성이 우리 커뮤니티 회원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여성들에게 배워야 한다, ‘이퀼리즘’이 옳다는 것을 깨달은 배운 녀성이다, 등등 온갖 찬사를 아까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저 자매들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일순 서글펐지만 놀라운 일도 아니다 싶었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남성 편에 붙는 것이 그나마 꽃길처럼 보이니까. 게다가 그녀들은 나를 자매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테고 말이다. 심지어 한국보다 여성 인권이 선진적일 것으로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반페미니즘 진영에서 만든 동영상에 그림으로 그린 듯이 온화하고 행복한 주부가 등장해서 이렇게 말한다.
전 제 남편과 아이를 사랑해요. 전 제 남편을 존중하고 존경하고요. 저에게는 페미니즘이 필요하지 않아요.
이런 여성들을 보수가 사랑하는 ‘개념녀’라 칠 수 있을 테고, 나는 한때 진보 진영의 ‘개념녀’로 불린 적이 있는데 그런 민망한 대접을 받은 이유 중 한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내가 한창 가벼운 몸으로 살기 위해 숱한 노력을 쏟던 시절이이었는데, 이명박을 전생의 원수처럼 여겼던 나는 당시 촛불시위에 개근하는 것은 물론 갈 수 있는 모든 시위에 모조리 참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해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조간 기사를 클릭하다 뜬금없는 신문 기사를 보고 당황하고 말았다. 기사의 제목은 ’촛불 다이어트 열풍? 저지선 뚫은 ‘모델녀’ 화제’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어느 신문에 실린 것인데, “촛불시위에 참여한 한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이 단독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어 화제다”로 시작하는 기사다. 그 ‘모델녀’가 나였다.
지난 17일 ‘OECD장관회의’가 열린 서울 강남 코엑스 앞 촛불시위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한 젊은 여성이 정문 턱밑까지 진출했다. 이 회의는 방송통신위원회 주관으로 최시중 방통위장은 언론장악을 하려 한다는 의혹으로 네티즌들의 퇴진요구를 받고 있다.
이 여성은 미니스커트에 부츠를 신고 모자와 선글라스도 쓰는 등 한껏 치장한 차림새였다. 당황한 경찰은 급히 그녀 앞을 가로막았으나 밀치거나 끌어내지는 않았다. 여성은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Of the Corrupt, By the Corrupt, For the Corrupt’(부패의, 부패에 의한, 부패를 위한)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중략)
이번 촛불시위가 일반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특성으로 하는 만큼 패션 차원에서도 시위 문화를 바꿨다는 평가다. 운동화에 편한 바지, 질끈 묶은 머리와 눌러쓴 모자 같은 전형적인 ‘투쟁복’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촛불시위 초기부터 화장품, 패션 관련 카페 회원들이 보여준 ‘화사한’ 차림은 화제가 됐다.
‘촛불다이어트’란 우스갯소리도 처음에는 연이어 '밤샘시위'를 지켜보느라 살이 빠진다는 의미에서 “시위 참여 패션을 위해서”라는 적극적 의미로 확장되는 양상이다.
‘촛불 다이어트’라니, 한껏 치장이라니! 저 날 나는 한껏 꾸민 차림새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두 실용적인 이유였다. 미니스커트가 아니라 스커트처럼 보이는 짧은 반바지였고, 부츠는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이라 레인부츠 대용으로 쓰는 만원짜리 ‘비니루’ 부츠였고, 선글라스는 화장을 하기 귀찮아 안경으로 사용하는 도수 있는 선글라스를 쓴 것이었으며 모자를 쓴 것은 지저분하게도 머리를 안 감아서였다.
정부의 언론 장악을 규탄하는 시위대 쪽을 경찰이 막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회사에서 가져온 ‘결제’라고 쓰여 있는 서류철 안에 손 팻말을 들고 느릿느릿 경찰들을 뚫고 정문으로 진출했다. 아무도 심상하게 걸어 들어가는 나를 막지 않았다. 서류철 안에는 이명박 정부의 부패에 관해 영어로 쓰여 있는 손 팻말이 들어 있었는데, 정문 앞에 도달해 그걸 꺼내 들자 경찰들은 몹시 당황하더니 서로 한참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그러고 나서 OECD관계자들이 드나드는 정문 바로 앞이라 그런지 나를 끌어내지는 않고, 내 앞에 전경 대여섯 명을 붙여 아주 우스꽝스러운 미니 저지선을 만들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이 사진을 보고도 나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 당황스러웠다. 열심히 집회에 참석하면서 개념녀라는 인증을 아낌없이 받았고 그럴 때마다 그들이 그 말을 나에게 칭찬이라고 하는데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개념녀, 개념녀, 개념녀. 그놈의 개념녀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저 때보다 30kg정도 체중이 늘어나 살이 터져 임산부보다 심하게 튼살이 생길 정도로 퉁퉁한 지금의 내가 저런 퍼포먼스를 한다면 과연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개념녀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오히려 OECD에 참여하는 외국인들이 많은데 나라 망신이라고 썩 꺼지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오크가 별짓 다 한다’ ‘뚱땡이가 지랄이다’라며, ‘코엑스 모델녀’는 커녕 ‘코엑스 멧돼지녀’라고 불리며 조롱을 당하지 않았을까? 한때 무척 가벼웠고, 지금은 무척 무거워져 사람들의 대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달라지는지 모두 경험한 내 눈에 한국은 정말 극심한 비만 혐오 국가로 보인다. 집 밖에 나가기 무서울 정도로. 사실 지금 나는 만나자고 하는 이들을 너무나 만나고 싶지만 거의 나가지 않는다. 나를 알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냐’고 경악하고, 나를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표정에서 “예쁘다던데 아니네”라는 실망감이 역력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금만 친해져서 방심했다가는 “살 빼면 예쁠 텐데”라는 훈수가 훅 치고 들어온다.
나도 알아, 알아, 알아, 잘 안다고. 다만 그럴 수 없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