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식이장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사, 풍성한 음식이 차려져 있지만 끼니를 계속해서 걸렀다는 사실은 꽁꽁 숨긴 채 조금 전에 뭘 먹어서 배가 부르다고 거짓말로 둘러대던 기억. 잔뜩 음식을 집어먹고 싶은 식욕을 억누르며 커다랗고 어두운 구멍처럼 입을 벌린 굶주림을 누르던 기억. 목구멍으로 끊임없이 음식을 밀어 넣던 기억. 그렇게 뭘 먹은 후 곧바로 엉덩이와 허리, 배에 투덕투덕 살이 붙는 듯한 기분을 견디지 못하고 변기를 껴안은 채 억지로 먹은 것을 토해내던 기억. 여전히 그런 기억들은 생생하다.
예전에도 식이장애에 대한 글을 관심 있게 찾아보곤 했지만 이 병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독방에 갇힌 죄수와도 같은 고독을 강제하는 병이기 때문에 다른 병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치열하게 알아볼 만큼 기운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식이장애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후, 이 병을 내 경험만 가지고 얄팍하게 다루고 싶지 않아 온 도서관과 서점을 다 이 잡듯 뒤져 식이장애에 대한 책들을 찾아냈는데, 국내에 번역된 책들은 고작해야 네다섯 권 정도였다. 문헌이 한없이 부족하긴 했지만 이 책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병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여성들이 무리하게 날씬해져서 예뻐지려다 걸리는 장애’ 정도로 취급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병증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환자의 95%가 여성인 이 병은 지금도 여성을 시시각각 죽이고 있다.
고작 예뻐지려는 병 아닌
죽음에 이르는 질환
<뉴욕타임즈>가 보도한 바에 의하면 거식증으로 정신의학과에 입원한 여성의 5-15%가 치료를 받는 중에 사망하는데, 이는 모든 정신 질환 중 가장 높은 사망률 수치다. 나오미 울프의 <미의 신화>에 의하면 거식증은 의학적으로 저체온증, 부종, 느린맥, 저혈압, 솜털 증가, 불임, 그리고 끝내 사망을 초래한다. 폭식증은 탈수증, 전해질 불균형, 간질 발작, 비정상적 심장박동, 사망을 유발한다. 거식증과 폭식증이 결합하면 치아 침식, 틈새 탈장, 식도 찰과상, 콩팥 기능 저하, 골다공증이 생긴다. 그리고 역시 얼마든지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지난 글의 마지막에 쓴 것처럼 아직 나는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식이장애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거식증과 폭식증에 시달렸지만 살아남아 당당히 탈출한 이들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죽을 만큼 아름다워지기>라는 책으로, 데뷔한 첫해 바로 유명 디자이너들의 패션쇼 런웨이에 서고 그해의 세계 모델 top20에 선정될 만큼 유망했던 빅투아르 도세르의 이야기다. 모델로 대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는 단지 여덟 달 동안만 화려한 무대에 선 후 런웨이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그 생활이 그를 거의 죽일 뻔했기 때문이었다.
33 사이즈
그는 어머니와 외출했다가 우연히 모델 에이전시 관계자와 마주치게 된다. ‘세바스티앙(셉)’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키가 크고 날씬하며 아름다운 빅투아르에게 ‘차세대 클라우디아 쉬퍼’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며 타고난 톱모델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처음에 빅투아르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바칼로레아와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 입학 준비로 바빴고 평소 모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셉’이 일하는 에이전시는 실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였고 클라우디아 쉬퍼 뿐만이 아니라 나오미 캠벨, 신디 크로포드, 린다 에반젤리스타 등 쩌렁쩌렁하게 패션계를 호령하던 슈퍼모델들을 돌봤던 곳임을 알게 된다. 마침 시앙스포 입학시험에서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지 못한 빅투아르는 가장 젊고 아름다울 때 국제적인 생활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아 보기로 마음먹는다.
에이전시에서는 빅투아르의 사이즈를 재는데 가슴과 허리, 엉덩이가 각각 82, 62, 91cm로 인치로 환산하면 34-24-36의 환상적인 몸매였지만 모델로서는 충분히 마르지 않았는지, 에이전시 관계자들은 ‘이래서는 어떤 옷에도 들어갈 수 없다’며 한숨을 쉰다. 이 ‘옷에 들어가는 것’은 모델들이 모든 것에 앞서 지켜야 할 강령이다. 그들은 엉덩이 둘레가 절대로 90cm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무조건 88.5cm를 넘지 않도록 하라고 엄하게 명령했다. 이른바 ‘비시즌’인 지금은 55사이즈 정도로 살이 쪄도 괜찮지만 패션쇼에 서기 위해서는 무조건 44, 가능한 33사이즈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33사이즈는 초등학교 아동 정도의 사이즈로, 키가 178cm였던 빅투아르에게는 ‘무리’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작은 사이즈였지만 본래 노력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이것을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빅투아르의 부모님 역시 넌 한다면 하는 아이라며 격려했고, 그에 힘입어 빅투아르는 성인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굉장한 모험’으로 시작하겠다고 결심한다.
단 세 알
에이전시와 만난 후 빅투아르는 집으로 돌아와 체중계 위에 올라간다. 178cm의 키에 58kg이었는데, 보통 여성이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히 멋지고 늘씬한 몸이었겠지만 전 세계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패션모델의 몸이 되려면 반드시 감량이 필요했다. 8주 뒤 뉴욕에서 시즌이 시작되니 그 안에 50kg가 되어야 했다. 인터넷에서 각종 다이어트 지식을 찾아본 빅투아르는 사과를 아주 꼭꼭 씹어 하루에 단 세 알만 먹기로 결정한다. 언제나 목표를 찾고 그것을 뛰어넘는 과정 자체를 즐겼던 그에게는 이것이 단지 또 다른 목표를 찾은 것이라 여겼고, 강한 의지로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늘 그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했던 부모님과 두 남동생 역시 그를 열렬히 응원했다. 1주일 동안 하루에 사과 세 알만을 먹자 순식간에 56kg까지 체중이 빠졌다. 숙소를 함께 쓰는 동료 모델들은 빅투아르만큼 먹는 것을 철저히 참아내지 못했고, 셉은 그녀들에게 암소처럼 보이니 그만 좀 처먹으라고 난폭하게 윽박지른다. 빅투아르가 보기에는 완벽하게 날씬한 여성들이었다. 에이전시에서는 모델이 지켜야 할 사항들을 일러주었는데 그 무엇보다 ‘근육은 금물’이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여자여자’한 가냘픈 모델을 찾으니 수영 같은 것을 해서 어깨가 넓어져선 안 되고 운동은 걷는 것만 하라는 거였다.
빅투아르는 고운 색과 맛깔스런 모양의 사과를 주의 깊게 골라 매 끼니마다 가장 예쁜 접시에 작게 조각내거나 얇게 저며서 스테인드글라스 모양, 부채 모양, 꽃 모양 등 온갖 모양을 내어 플레이팅해 아주 조금씩 꼭꼭 씹어 사과 조각 하나하나를 한껏 맛보며 먹는다. 이렇게 자신에게 스스로가 허락하는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제례라도 올리는 것처럼 거창한 과정을 거쳐 먹는 것은 거식증 환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자신이 배고픔을 정복했다고 생각한 빅투아르는 기록을 갱신한 운동선수처럼 강해진 기분까지 들었다. 1주일에 2kg나 뺐으니 자신이 붙었지만 이내 두려움이 그를 따라잡는다. 매 끼니 사과만 먹으니 당연히 슬슬 지겨워졌다. 그래서 다른 과일로 바꿔 먹기도 했지만 그 과일이 몇 칼로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불안에 시달렸다. 게다가 원인불명의 복통이 종종 찾아왔는데, 생과일만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시엔 알지 못했다. 순조롭게 체중이 내려가다가 52.9kg에서 딱 멈춰 꼼짝도 하지 않고 이틀이 지나자 빅투아르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이것이 ‘정체기’라고 생각한 그는 더욱 걷기로 마음먹는다. 다행히 51kg까지 체중이 빠졌다. 가족들은 빅투아르의 식생활을 조금씩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뉴욕에서 맞게 되는 첫 패션쇼 시즌에 49.8kg가 된다.
목소리가 속삭인다
그런데도 빅투아르는 아직 뺄 살이 많다고 생각한다. 배나 엉덩이를 꼬집어보면 패션위크가 용납할 수 없는 ‘군살’이 잡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여겼다. 이때부터 빅투아르에게 떨쳐 버릴 수 없는 ‘작은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나도 그 ‘작은 목소리’를 알고 있다. 이런 돼지, 저런 음식을 먹었다간 넌 순식간에 돼지가 되고 말 거야, 저 맛있는 걸 딱 한 입만 먹고 참겠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이 암소야, 넌 저걸 한 입 먹는 순간 게걸스레 접시를 핥을 만큼 죄다 먹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지방은 다 투덕투덕 네게 달라붙어 살이 되겠지! 이런 식으로 귓가에서 끈덕지게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는 빅투아르에게도 비슷한 소리를 퍼부었다. 처음에는 그만 먹어, 살쪄, 그만 먹으라니까, 하는 정도였다.
점점 작은 목소리는 커졌고 더 많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빅투아르는 뭐라도 먹으면 모조리 실패라고 생각했다. 이 극단적인 생각 역시 섭식장애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사고방식. 살을 빼려면 아예 굶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적당한’ 수준의 음식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위액이 위 점막을 파고들 때까지 굶주림을 꽉 눌러 참거나 이미 먹었으니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하고 자책하듯 폭발적으로 먹어 버린 다음 변기에 쏟아내는 것. 뭔가를 먹고 나면 그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자기혐오 역시 이 병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굶주림에 못 견뎌 정말 아주 적은 분량의 음식을 먹었을 따름이지만 그것을 자제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몸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었지만 빅투아르의 마음은 무거워져만 갔다. 몸이 가벼워지는 만큼 빅투아르는 자기 존재가 공중에 흩어져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모델이라는 세계에 대한 도전에서 발을 빼기에는 늦었다.
가냘파진 몸에 아울렛에서 발견한 랄프 로렌의 12세용 아동복 원피스가 완벽하게 맞자 기뻤고, 멋진 청바지를 입자 두 허벅지 사이에 )( 이런 괄호 모양의 어여쁜 빈 공간이 생겼다. 빅투아르는 33사이즈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어디에나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체중계를 사주면서 절대로 52kg 이하로 체중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약속하라고 했지만, 그건 패션을 잘 모르는 이가 하는 쓸데없는 근심걱정으로만 들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향 프랑스 파리를 떠나 가족과 떨어져 낯선 뉴욕에서 생활하는 빅투아르는 곧 혼자서 미지의 세계에 맞서게 된다는 생각에 모델로써 완벽한 몸무게에 완벽한 사이즈를 갖췄는데도 불안감을 뿌리치지 못했다.
'먹지 않음'
그리고 빅투아르는 그 망할 놈의 ‘작은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순간들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 즐겁게 온 가족이 고급 레스토랑에 왔지만 빅투아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없고, 판을 깨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건만 음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겁에 질려 가족들을 당황시키고 만다. 이것 역시 거식증 환자들이 전형적으로 겪는 어려움이다. 모두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소외되고,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은데도 음식을 거부하느라 전혀 즐기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 채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지만 그래도 마음 놓고 먹을 것을 즐길 수 없다. 고작 찐 야채 한 접시를 먹었을 뿐이었지만 빅투아르는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먹었다고 느꼈고, 곧장 화장실로 뛰어가 게워낸 후 기막힌 생각을 해낸다. 매끼 식전에 완하제(변비약)를 일정량 먹으면 음식이 신체기관에 남아 있을 틈 없이 밖으로 나갈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후로 빅투아르는 아무도 모르게 완하제를 먹기로 한다. 하지만 완하제가 내장을 뒤집는 감각 역시 고통스러웠고, 그는 항불안제와 항우울제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은 채 뉴욕으로 날아간다.
뉴욕에 와서 첫 번째로 체중계에 올라간 순간, 47.1kg라는 숫자에 빅투아르는 으쓱해진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웠고, 완하제의 효과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기쁨도 잠시, 사람들과 뭔가 먹을 일이 생길 때마다 그 망할 놈의 ‘작은 목소리’가 빅투아르를 들볶았다. 조금이라도 몸무게가 늘 것 같거나 외로움을 달래려고 과일을 먹거나 밤이면 완하제의 양을 늘렸다. 그거면 다 해결됐다. 늘 모범생 소녀의 삶을 살았던 빅투아르의 생활 습관은 모델로서도 모범적이었는데, ‘먹지 않음’이야말로 모델에게 가장 요구되는 모범이었다. 셉은 빅투아르의 동료 모델들에게 잔소리를 한다. 빅투아르 좀 봐라, 쟤는 안 먹잖아... 이렇게 처먹으면 어쩌려는 거야! 그리고 셉이 점심식사에 초대해 자신이 먹고 싶은 대로 우적우적 음식을 해치우는 동안 빅투아르가 시금치 이파리만 깨작거리자 진정한 프로의 태세라며 다른 모델들이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사실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먹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작은 목소리’는 수시로 나타나 넌 저 옷에 들어갈 수 없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보통 여성들도 그렇게 살고 있지만, 모델들이야말로 ‘옷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한 업무인 사람들이니 몸이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몸이 자신을 입는 생활이 가능하도록 스스로를 엄격히 통제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