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여자가 되면 22. 이중기대

생각하다

무거운 여자가 되면 22. 이중기대

김현진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뷰티 유튜버 활동을 하다가 ‘탈코르셋’ 행렬에 동참하여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라는 유튜브 동영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배리나의 책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를 읽었다. 어려서 종양 제거 수술을 해서 누워 지내느라 살이 찔 수밖에 없었던 배리나 역시 ‘무거운 여자’였고, 무거운 여자라서 괴로웠다. 그렇지만 나보다 한참 동생뻘인 20대 초반의 그는 존경스럽게도 무거운 여자에게 당연한 듯 주어지는 경멸과 비웃음에 절대 지지 않고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저는 예쁘지 않아요, 라는 겸손이 아니라 그래 나는 예쁘지 않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라는 탈코르셋 선언이다.

책의 거의 모든 부분에 공감이 갔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캐나다 유학 시절 연기력을 인정받아 배우의 꿈을 꾸게 된 그가 한국에서 배우 오디션에 지원했다가 무거운 여자라는 이유로 낙방하는 장면이었다. 주최측에서는 당연한 듯이 무거운 여자의 자리 따위는 무대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기죽지 않고 그들은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아주 재능 있는 배우를 잃은 것이라고 선언한다. 거리에 나가 보면 크고 작은 키에 온갖 체형의 여성들이 있건만 어째서 무거운 여자의 자리는 없을까.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의 한국판 공연을 준비하면서 제작자 측에서는 통통한 여성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러한 역할에 부합하는 배우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하나같이 말랐다 싶을 만큼 날씬한 여성들만이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마른 체격의 여성을 캐스팅해야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정말로 그 역을 맡을 무거운 여자를 열렬하고 진지하게 찾았을까? <헤어스프레이>같은 이례적인 작품에서나 무거운 여자가 등장하지, 대부분의 작품에 무거운 여자의 자리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무겁다 = 모성?

저번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잭 블랙이 사랑하게 되는 기네스 펠트로는 말랐다 싶을 만큼 늘씬한 여성이다. 하지만 배역은 고도비만에 해당할 만큼 무거운 여자이므로, 기네스 펠트로는 무거운 여자로 보이기 위한 특수 분장을 했다. 예쁘고 날씬하지 않은 여성을 거의 경멸에 가까울 만큼 싫어하며 상대도 하지 않던 잭 블랙은 어떤 착오로 무거운 여자인 기네스 펠트로를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착각하게 되고, 나중에 그녀가 무거운 여자인 것을 알게 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무거운 여자인 것이 상관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만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공공연히 밝히는 남자 주인공을 감화시킬 정도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여성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여자는 보통 자기 관리를 못하고 보는 사람에게 시선 공해가 된다며 경멸을 받고 생판 남에게도 살 좀 빼라는 주문을 받는 경우가 흔하지만, 의외로 전혀 다른 종류의 압박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이 무거운 여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는 척 할 때 사용하는 단어들을 생각해 보자. 풍만하다, 풍성하다, 넉넉하다, 둥글다. 부드럽다, 복스럽다.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다, 애 쑥쑥 잘 낳게 생겼다... 이것들을 과연 칭찬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단어들은 언뜻 무거운 여자를 좋게 평가해 주는 척 하면서 그들에게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을 강요한다. 풍만하고 풍성하고 넉넉하고 둥근 것은 곧 ‘모성’이다. 모성은 너그럽고 자기희생적이며 한없이 부드러워야 한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무거운 여자 기네스 펠트로가 미인이 아니면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잭 블랙의 사랑을 얻어내는 것은 더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인품 때문인데,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거운 여자는 인격이 아주 빼어나게 훌륭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일러스트 이민

무겁지 않으면
착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무거운 여자를 찾기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닌데, 그 드문 경우 중 하나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방영된 미국 드라마 <체인지 디바Drop dead diva>다. 원래 주인공은 24살의 모델 뎁인데, 그녀는 날씬하고 아름다운데다 그레이슨이라는 멋진 변호사 남자친구까지 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건만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이 사고로 사망한 뎁의 영혼은 우연히 같은 시간에 사망한 과체중의 30대 초반 여성 변호사 제인의 몸 속으로 들어가 제인으로서 제 2의 삶을 살게 된다. 마침 그레이슨이 새롭게 일하게 된 로펌의 변호사였던 제인은 무거운 여자이지만 무척이나 명석하고 유능해 뎁은 난생 처음 똑똑해진 기분에 놀라워한다. 사랑하는 그레이슨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싶지만 천상의 질서를 해하는 일이므로 그럴 수 없고, 일단 제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하기로 결심한 뎁은 제인이 지니고 있던 칙칙한 정장들을 처분하고 화사한 옷들을 장만하며, 제인이 방치하고 있던 머리카락과 피부 등 용모를 단정히 손질한다.

같은 로펌에 근무하는 변호사 중에는 킴이라는 늘씬한 금발 미인이 있는데, 가끔 이기적으로까지 보일 만큼 개인주의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계산하여 실리를 따지는 킴은 미인이라는 이유로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경우도 왕왕 겪는다. 그러나 그녀는 착하거나 순해야 한다는 압박을 전혀 받지 않는다. 그러나 제인은 킴이 결코 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변론을 언제나 자청해서 맡으며, 사무실의 직원들 하나하나에게 마음을 쓴다. 킴이 귀찮고 이득이 되는 것이 없어 맡으려 하지 않는 사건들을 정의감에 넘쳐 자청하여 담당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 애쓴다. 제인은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까지 지녔으며, 주위 사람들을 언제나 편안하게 해 준다. 무거운 여자이지만 아름답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제인은 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하고 그 드레스를 사러 가는데, 메이커에서 아예 자신처럼 무거운 여자를 위한 사이즈는 제작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개한 제인은 이것을 재판에 회부해 승소를 얻어내고, 의류 메이커는 항복하고 결국 다양한 체형의 여성을 위한 옷을 생산하게 된다.

다정하고 활기차고 지혜로운 제인의 모습은 언뜻 무척 보기 좋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킴에 비해 제인은 무거운 여자라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역할을 해내야 한다. 킴은 그냥 변호사로서 맡은 일만 잘 하면 되지만, 제인은 사무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주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해 주거나 시간을 내어 사람들을 도우리라는 기대를 받는다. 이것은 무거운 여자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성 역할 강요다. 무거운 여자들은 단지 둥글고 풍성하다는 이유로 모성이 갖는 미덕을 지녔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뭘 믿고 저러냐는 경멸을 받게 된다.

'왕언니' 소리는 그만

무거운 여자에게 사람들이 칭찬이랍시고 하는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는 말도 그러한 기대를 내포하고 있다. 부잣집 맏며느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가부장제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다. 지혜로우면서도 여성답게 집안을 이끌어가고 남편을 내조해야 하며, 다산하여 아들을 낳아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 남성을 위협하지 않을 만큼 현명하며 뛰어난 인품으로 가족들을 너그럽게 보살펴야 한다. 가끔 칭찬이랍시고 무거운 여자에게 주로 중년 이상의 어르신들이 이야기하는 ‘애 쑥쑥 잘 낳게 생겼다’는 말 역시 가부장제에 기여하리라는 기대다.

풍성한 몸집만큼 온화하리라고 기대 받는 무거운 여자들에게 사람들은 쉽게 ‘맏언니’ ‘맏누나’ ‘왕언니’ 등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당당히 요구한다. 무거운 여자가 인간으로 인정받으려면 그토록 많은 것들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무거운 여자도 그냥 여자일 뿐이다. 그 여자를 경멸하면서 동시에 그 여자가 풍성한 몸집이니 마땅히 잘 해내리라 기대되는 감정 노동까지 베풀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의 주문 때문에 무거운 여자들은 오늘도 이중으로 고통 받고 있지만, 우리의 이러한 고통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씁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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