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살인자가 될 뻔 했다.
내 소중한 친구를 죽이고, 부부강간까지 일삼은 남편이라는 작자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피는 피로 갚아야 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날카로운 칼을 하나 쥐었고, 친구 만나러 나가는 일도 없이 집돌이로 집에 있는 남편을 해하기 위해 오래 전에 뛰쳐나온 신혼집으로 돌아갔다. 합의 이혼을 위해 법원에 출석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칼자루를 꽉 쥐고 현관문을 열었다. 치가 떨리도록 죽이고 싶었다. 이 인간의 생명 같은 것은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 인간이 쓰는 산소도 아까웠다.
그런데 일 년에 한번 친구를 만날까 말까 한 이 인간이 웬일로 집에 없는 거였다. 맥이 탁 풀렸다. 그대로 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있다가 벽장에서 장도리를 꺼내 온 집을 두들겨 부수기 시작했다. 컴퓨터 본체 안의 하드디스크를 깨부수고, 그릇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다 박살내고, 스쿠버다이빙용 수트를 다 칼로 갈라 버리고, 집이 난장판이 될 때까지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두들겨 부수었다. 그 와중에 남편이 귀가하면 그에게 난도질할 준비도 충만히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과연 두 사람 중 누구의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내가 온 집안을 폐허로 만들 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폐허가 된 집에서 숨을 몰아쉬다가 나는 원룸으로 돌아갔고, 칼을 골목에 버렸다.
괴로워서 울었다
가정법원에서 만난 남편 - 이제 곧 남이 될 – 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누가 회계 전공 안 했다고 할까봐, 내가 부순 집기들을 원래 가격과 감가상각을 고려했을 때 중고가격을 일목요연하게 리스트로 정리해 손해액을 계산해 가지고 왔다. 그 종이를 받아 든 나는 깔깔 웃었다. 내가 당시 다니고 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부부 상담을 해 주었던 목사님이 함께 법원에 와 주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내가 위자료로 받을 돈에서 그의 손해액을 제했다 한들 손에 잡히는 대로 살림을 두들겨 부순 일을 잘한 일이었다. 그 행위는 내 마음 속에서 어떤 상징적인 의식이었던 것 같다. 망한 결혼을, 파편밖에 남지 않도록 내 손으로 죄다 두드려 부숴서 돌아갈 다리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두 사람만의 오붓한 세간을 죄다 부숴서 내 망혼을 두들겨 부순 일종의 한풀이였다. 그래서 그가 손해배상을 청구하든 말든 아무렇지 않았다. 부부 상담을 해 준 목사님은 펄펄 뛰는 그에게 그날 집에 없었던 것을 천운으로 알라고, 집에 있었더라면 그 부서진 세간들 대신 네가 큰 해를 당했을 거라고 침착하게 말하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 말이 맞았다. 그가 집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죽이고 말았을 거였다.
이혼 절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이혼하기 싫어서 눈물이 쏟아진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큰 희망을 가지고 뜨겁게 사랑하여 결혼했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주물렀다 놨다 하는 남편의 기분에 휘둘리며 괴로워했던 시간들과 내 곁을 떠난 소중한 개,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았던 결혼식, 그런 기억들이 떠오르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마 내 인생을 내 손으로 조진 게 괴로워서 울었을 것이다.
같은 시간대에 이혼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부부들이 대기실에 가득했는데, 그 중에는 울기는커녕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심지어 곧 이혼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손을 잡은 채 연인처럼 속삭이며 농담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위장이혼인가? 싶었지만 이제 곧 남이 될 사람들의 분위기는 모두 비슷했다. 어떤 것과 닮은 분위기였는고 하니, 마치 졸업식 날의 교실 같았다.
물론 학교를 떠나는 건 아쉽지만 영원히 하급 학교 교실에 머무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급우들과 헤어지게 되지만 상급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게 될 테니까.그런 시원섭섭함이 대기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다들 부드럽고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아무리 서로 죽이고 싶은 원수 같은 부부사이였다 하더라도 이제 곧 그 인연이 끝나니 일종의 수험 기간을 함께 한 동창생 같은 마음으로 서로 좋은 낯을 하고 헤어질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결혼준비는 그렇게나 신경 쓸 게 많더니 이혼은 너무도 쉬웠다. 판사가 앉아 있고 부부 각각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이혼 의사가 있냐, 라고 물어 그렇다고 말하면 즉시 이혼이 성립되었다.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혼인이 주는 괴로움은 그렇게도 컸는데, 막상 그걸 해소하는 데는 담배 한 대에 불 붙이는 시간만큼도 걸리지 않았다. 학창시절에는 다소 불량스럽게 놀았지만 회사에서는 늘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자기 정체를 성공적으로 숨기고 있던 그는 이제 본체가 다 들통 났으니 갱스터 힙합룩 비슷한 옷에 호일 퍼머를 하고 나타났다. 내가 알고 있던 남자와는 너무나 달랐고, 아마 그게 본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에도 역시 나는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나를 돕기 위해 함께 와 준 사람들이 ‘죽일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후일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런 인간 때문에 내가 피를 손에 적시고 살인자의 낙인이 찍혀 평생을 감옥에서 썩거나 할 가치가 없는 인물이었다. 죽일 가치뿐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함께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남들처럼 살아 보고 싶다는 나의 허황된 꿈과, 가부장이 나를 지켜 주는 보수적인 결혼 제도에 안착하고 싶다는 안일한 소망이 나를 그토록 눈멀게 한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심각해 회사도 더 다닐 수 없어 퇴직하고 말았다.
'이혼녀'
이 일련의 사건이 내게 남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이후 몇 년간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병행한 뒤에야 비로소 조금씩 사그라들어, 내게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이렇게 길고 상세하게 써내려 갈 수 있게 된 것은 5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겨우 가능해졌다. 이전에는 내 소중한 개를 결국 내가 지키지 못해 내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죄책감과 괴로움에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술과 마구 섞어 마셔야 겨우 두어 시간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고 글쓰기를 계속해 에세이집 <육체탐구생활>(박하)과 <가장 사소한 구원>(알마) 등을 냈고 각종 매체에 기고를 쉬지 않았지만 내내 너무나 가슴이 찢겨나간 자리가 벌겋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는 노래가 있듯이, 상처받은 가슴을 다른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지 눈을 돌려 찾아 헤매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돌싱, 즉 ‘이혼녀’, 그것도 한국 사회에서 돈 없고 빽 없는 이혼녀로 살면서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랑은커녕 만인의 노리갯거리가 되기 딱 좋은 일이었다. 건드려도 뒤탈 없는, 그래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하며 푹 찌르고선 아유 아니면 말고, 하는 남자들이 세상에 그득했다.
더구나 30대가 되니 조금이라도 괜찮은 남자들은 모두 결혼했고, 결혼을 미처 못한 남자들은 다 결혼을 못한 이유가 있었고, 나처럼 한번 결혼해 본 남자들은 모두 천년 묵은 여우처럼 영악했다. 20대 때부터 늘 하던 생각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선택할 때는 나는 이런 여자가 좋고 저런 여자가 좋고, 하는 식으로 고르지만 여성이 남성을 선택할 때는 마치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서 그나마 아직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골라내는 것과 비슷해 보일 때가 많다. 여기 곰팡이가 한쪽에 슬었지만 떼어 내고 먹으면 돼, 아직 완전히 썩지는 않았으니까 대강 먹을 수 있어! 하는 식으로 아예 배를 굶을 수는 없으니까, 그냥 눈 딱 감고 덜 썩은 음식물을 골라내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야, 더 썩은 것도 많아, 하고 스스로를 타일러야 하는 점도 비슷하다.
벽
불행하게도 100% 이성애자인 내가 다시 사랑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식이조절과 운동을 병행하며 165CM에 50KG대의 체중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점차 애쓰고 싶지 않아졌다. 강박증처럼 몸을 관리하던 내가 아예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혼녀는 완전히 공공의 발닦개처럼 취급됐다. 총각이나 이혼남은 물론이고 유부남들까지 약간만 틈을 주면 손을 뻗쳐 왔는데, 이혼녀가 되니 아예 이것들이 작업에 힘을 기울이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너도 알 거 다 알잖아? 어른끼리 왜 이래 쿨하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손길부터 뻗쳐왔다. 철벽을 치면 이혼녀 주제에 비싸게 굴지 마라, 하는 조롱이 따라왔다. 점차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게 되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몸 관리는커녕 사람들을 만날 때 꾸미지조차 않게 되었다. 내가 파리 끈끈이로 보이는지 별 희한한 날벌레들이 이혼녀를 무슨 자유이용권처럼 취급하면서 들러붙었고, 나는 스트레스로 더욱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몸에 지방이 붙었지만 발 한 번 닦고 가려고 혈안이 된 남자들 때문에 지친 나는 오히려 그 살들을 몸에 두르고 뭐랄까,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롭게 내 몸에 토실토실 돋아나기 시작한 살들은 마치 부드러운 지방으로 된 갑옷 같았다. 그 갑옷을 입으면 내가 무슨 공공재인 것처럼 만지고 더듬는 사람들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뚱뚱하다고 비웃음거리가 될 거란 걸 알았지만, 당장 사람을 발닦개 취급하는 인간들에게서 너무나 지쳐 있던 그 와중에는 뭐가 됐든 좋으니 그들과 나 사이에 약간이라도 벽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부드럽고, 물렁물렁하고, 허여멀건한 지방으로 된 벽.
그 벽이 있으면 그들은 나에게 손을 대지 않고 밖에서 침을 뱉거나 하며 그 벽을 비웃었다. 당장은 비웃거나 말거나 그렇게, 살로 된 보호막이 있는 것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부드럽고 통통한 그 벽은 비웃음이나 조롱을 마치 에어백처럼 사뿐하게 흡수했다. 그 벽이 기하급수적으로 부피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긴 했지만 이놈 저놈에게 손 타면서 고생할 일이 당장 없다는 것에 일단은 만족이었다. 하지만 살로 된 그 갑옷은, 결국 너무 부풀어 오른 나머지 그 안에 들어 있는 나를 질식 상태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