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기일까지 시간은 빠르게 지나 겨우 3일 정도만 남았던 때였다. 아직 내가 보낸 반소장에 대한 답변 서류는 오지 않았다. J는 가능하면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일상에 집중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을 고르고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봤다. 무엇보다 조정실에서 B와 그 변호사를 마주할 자신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잠시 회사 밖으로 나와 편의점에 들렀다.
나는 담배 한 갑과 300원짜리 라이터를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근무시간이 한창인 낮이었다. 난 누가 볼까 회사에서 최대한 멀리, 하지만 너무 멀어지지 않을 정도의 공터를 찾아 나섰다. 인적이 드문 골목, 나는 간신히 서서 불을 붙였다. 머리가 아팠다. 분명 이제 시작이건만 그 시작부터 나는 위태로웠다. 그때였다. 내 사건을 담당하는 사무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네, 여보세요.”
“A님, 지금 상대가 조정기일을 연기했는데요. 이 주 정도 더 뒤에 조정 기일이 다시 잡힐 것 같습니다.”
“네?”
나는 조정일에 맞춰 이미 병원에 갈 일이 있다며 반차를 내둔 상태였다.
“자주 있는 일입니다. 다시 일정 맞춰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겨우 3일 남았는데 이렇게 일정을 막 바꿔요?”
잡아놓은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다. 게다가 잔뜩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화가 났다. 반면 사무장은 이런 상황은 아주 익숙하다는 듯 담담한 말투로 내게 또 한 번 통보했다.
“원래 어느 쪽이건 마련할만한 증거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좀 더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면 조정을 미루려고 합니다. 워낙 흔한 일이어서요.”
“그럼, 미룬다고 해서 저 쪽이 불이익을 받거나, 제가 좀 더 유리해지는 건 없나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미룰 수 있는 일이에요. 다시 잡히는 일정은 이 쪽에서 결정할 수 있는데 혹시 언제가 좋으신지... 아 혹시 너무 바쁘시면 안 오셔도 됩니다.”
이 일이 아무런 조건 없이 일정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미룰 수 있는 일이었다니. 일정을 맞추어 조정한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서 내가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제대로 삼키지도 않은 것이 거의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불씨를 털어버린 뒤 회사로 몸을 돌렸다. 나는 다시 그 지겨운 기다림을 다시 시작하러 가야 했다.
지겨운 기다림
조정기일을 다시 잡는 것은 내겐 꽤 어려운 일이었다. 다시 그 날에 맞춰 휴가를 내야 했고 변호사의 다른 소송 일정과도 충돌이 없어야 했다. 간신히 다시 일정을 맞춰보니 꼬박 3주 뒤였다. 그렇게 똑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다행히 이번에는 내 일이 지독하게 바빴다. 일에 치어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면 아이가 나를 반겼고, 한두 시간 함께 책을 읽거나 놀고 난 뒤에는 아이가 잠에 든다. 아이가 잠들면 나는 다시 일어나 늦은 저녁을 먹은 뒤, 다른 사람들의 소송 사례나 이혼 소송에 관련한 글을 찾아다녔다. 누군가 조정을 경험해본 적 있는 사람들의 조언 같은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찾은 글은 어느 사무실에서 고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케팅 회사의 허술한 광고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잠깐 어린 시절 보았던 이혼 드라마 <사랑과 전쟁>을 떠올렸다. 조정위원장인 노년의 배우 할아버지가 근엄한 표정으로 “4주 후에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그 장면을.
‘생각해보니 설마 조정이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닌 건가. 그럼 또 B를 봐야 한다는 뜻인데...’
한숨이 나왔다. 변호사는 바빠 보였다. 고작 몇 푼 되지 않는 작은 소송을 하면서 그를 괴롭히는 것이 딱히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친구 J는 이제 변호사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나는 컴퓨터를 끈 뒤 다시 아이 옆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전화기를 붙잡고 몇 번이고 검색어를 바꿔가며 비슷한 내용을 찾아다녔다. 이런 날들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B는 이번에는 조정일을 미루지 않았다. 답변 서류도 제출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 서류에 대한 반박할 자신이 없어서 답변을 내지 못했으리라 생각하며 넘겼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조정기일
변호사와 나는 배정된 조정실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다시 한 번 반소장과 내가 낸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A님, 혹시 양육비는 혹시 얼마로 정하셨죠?”
“50만원이요. 이혼할 때 그렇게 정했는데, 혹시 더 늘릴 수도 있을까요? 사실 월 50만원이라는 돈은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변호사는 내 질문에 딱 잘라 말했다.
“이 소송은 양육비를 이야기하는 소송이 아니라서... 음, 혹시 A씨 연봉이 어떻게 되시죠?”
“저요? N천만 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전 남편 소득은 어떻게 되나요?”
“...잘 모르지만 천만 원이 안 될 거예요. 세금 잡히는 일을 많이 안하기도 하고...”
내 대답에 변호사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그러면 거기서 더 받으시긴 힘들 거예요.”
“양육비 산정하는 표 보면 부부 합산 소득에 따라 양육비가 올라가잖아요. 저와 전남편 소득을 합치면 50만원 보다는 더 받아야 한다고 나와 있던데요.”
변호사는 나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A님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이 합산 소득의 70에서 80퍼센트 정도 되잖아요. 그렇다면 정해져 있는 양육비에서 그 비율만큼이 A님 부담, 그 나머지가 B 부담이에요. 예를 들어 지금 양육비를 100만 원으로 결정한다면, B 측은 30 – 20만원의 양육비가 나오겠죠.”
“네? 제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계산이 된다고요? 제가 양육을 전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양육비 산정에 반영이 되지 않는 건가요?”
“그 부분도 반영이 되긴 하지만, 그렇게 크진 않아요. 어쨌거나, 저 쪽에서 양육비 가지고 이야기 하면 오히려 골치 아파지는 것은 우리에요. A님 소득이 꽤 있기 때문에 양육비를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같이 하면서 조정을 유리하게 끌어보려고 할지도 모르거든요. 게다가 정황상 저 쪽에서 친권 양육권을 가지고 다시 이야기 하려고 할 것 같지도 않고, 그렇게 되지도 않겠지만, 조정을 유리하게 하겠다고 그 두 가지를 물고 늘어진다면 재판이 길어지거나 힘들 수도 있어요.”
나는 소득에 따른 양육비 정산표를 보았을 뿐 이런 기준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확실히 상대의 소득이 이런 식으로 아이 양육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처음 50만원이라는 양육비를 정했던 것도 그저 내가 생각하는 최저 선에서 B가 매달 낼 수 있을 만한 수준의 돈을 추측하여 정했던 것이니 말이다. 놀랍게도 상대의 경제 상황은 결혼 후에도 이혼 후에도 나에게,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나타나지 않은 B
곧 조정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B와 그 변호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와 변호사는 조정실에 들어갔다. 조정실에는 중년을 넘긴 듯 보이는 한 여성이 앉아있었다. 그는 잠시 서류를 살펴본 뒤 물었다.
“A씨, 맞습니까?”
“네.”
“자리에 앉으세요. 아직 상대편이 좀 늦는 것 같으니까. 좀 기다려 봅시다.”
그러나 결국 B와 그의 변호인은 그날 조정에 참석하지 않았다. 조정위원은 이런 일이 꽤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상대편이 나오지 않았으니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겠네요. 다시 일정을 잡아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일단 오셨으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좀 해보세요.
변호사는 서류에 있는 내용대로 상대가 거짓말을 한 부분이 있으며, 내가 B와의 결혼생활 동안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어필했다. 변호사는 딱히 B의 가족이 내게 저지른 일들과 B의 폭력에 대해서는 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조정위원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를 들춰보며 변호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이다.
그래요. A씨께서는 뭐 할 말 있으신가요?
순간 나는 어이없는 걱정이 덜컥 들었다. 내가 할 말을 다 또박또박 한다면 오히려 조정위원이 나를 보며 그러니까 이혼을 하게 됐지, 여자가 너무 다 따지고 드네,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게, 결혼 하자마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놀랍게도 나는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울먹이며 그 동안 B가 내게 했던 일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하며 운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서는 그랬다. 아마 이런 자리에서 지극히 사적이고 괴로운 과거의 기억을 말해야 하는 것이 처음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울먹이며 대답하다 드문드문 내 말이 끊기는 것을 본 변호사가 내게 휴지 하나를 내밀었다. 문득 테이블 위를 보았다. 경황이 없어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미 이 자리에서 나처럼 우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지 테이블 위에는 양 측에 휴지 상자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네, 알겠어요. 힘든 일이 있었겠죠.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일단 상대측 답변서도 아직 오지 않았고 해서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게다가 보니 상대측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일단 다시 조정이 잡히고 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조정을 마치겠습니다.
변호사와 나는 아무런 소득 없이 조정실을 나와야 했다. 그 시간 나와 B의 조정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조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양 옆으로 늘어져있는 각각의 방에서 각자의 상황이 복도에 퍼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돌아올 조정에서 B 그리고 어이없는 이야기를 적어놓은 그 변호사를 보며 이야기 할 자신이 점점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