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탈혼기 3. '잠깐만 맞춰주자'고?

생각하다결혼과 비혼탈혼

A의 탈혼기 3. '잠깐만 맞춰주자'고?

Jane Doe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늦은 새벽이었다. 다음 날 회사에 가려면 빨리 자야 했다. 하지만 나는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난장판이 된 집을 당장 치우는 게 맞는 것인지, 이 상황을 그대로 두고 집에 돌아온 그가 반성하게 해야 하는지. 지금 생각하자면 꽤 하찮은 고민이었다. 일단 나는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 꼴을 계속 보고 있으면 또 화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렸다. 나는 웅크린 채로 대체 무엇이 이렇게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했다.더 이상 양보할 수 없었다. 책임져야 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된다. 거기에 무책임한 어른을 하나 더 책임지고 산다는 것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지금과 달라져야 했다.

그가 내 애인이었다면 그 때 당장 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애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와 결혼했고, 그는 나의 법적인 가족이 되었으며 곧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그냥 뒤돌아서면 되는 가벼운 관계가 아니었다. 확실히 이런 관계, 이런 문제는 내가 처음 겪는 종류였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문득,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곁의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장 전화를 들었다. 연락처 목록을 보았다. 연락처 목록에있는 300명이 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낼 문자를 몇 번 썼다가 지웠다. 확실히 나는 이 일에 대해 떠들 용기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때, 그가 가족이라고 여겼다. 내가 내 입장에서 그의 잘못을 이야기 하는 것은 내 얼굴에 침 뱉기이며, 결국 모든 싸움은 양쪽 모두의 잘못으로 생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일에 대해 입을 닫기로 했다.

곧 창밖으로 새소리가 들려왔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출근할 준비를 했다. 문득 내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엉망이었다. 내가 엉망이면 아이도 힘들다는 말들이 떠올랐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 상황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마음이 이럴 때 우는 것이 아이에게 좋을지, 아니면 울지 않는 것이 좋을지 헷갈렸다. 하지만 역시, 누가 볼까 무서워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폭력은 인지하기에 힘이 든다

퇴근 후, 돌아온 집은 어제 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말끔해져 있었다. 그는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어제 같은 일은 없을 거야.

그는 반성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눈물을 쏟았다. 아무에게도 어제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쁜사람이 아니라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그를 위해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그는 나를 안아 다독였다. 나는 참았던 것들을 토해내듯 울었다. 잠시 후 내가 전정되자 그는 내게 약속했다.

나도 회사를 좀 알아볼게. 그리고 나중에는 A가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될 수 있을 만큼 내가 잘하고 싶어. 조금만 기다려줘.

하지만 그는 끝내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툼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은 그가 유서를 쓰고 소리를 질렀다. 또 어느 날은 그가 방에서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어느 날은 길에서 큰 소리를 냈으며, 억지로 손목을 잡아 끌고 갔다. 그는 매번 사과하고 반성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더 다정하고 더 친절해졌고 평소보다 열심히 집안일을 했다. 금방 원상태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대충 그런 날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점점 더 잦아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모두 폭력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나는 그게 폭력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히, 그에게 얻어맞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명절

그런데, 그와의 결혼으로 생긴 새로운 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첫 명절,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집에 먼저 가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이 일이 유구한 전통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때 상당히 부지런한 ‘개념녀’였다.

“B,혹시 명절 전날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까?”

“없는 것 같아. 우리 집은 작은 집이니까. 뭐 일단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지 뭐.”

그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곧 그는 전화를 나에게로 돌렸다. 

“그래, 새아가. 명절 전날에는 우리는 작은집이라서 크게 할 일이 없단다. 그냥 저녁이나 함께 먹고 명절날에 보자꾸나.”

그의 집에서는 딱히 명절 전날에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을 듣자, 나는 우리 엄마와 아빠가 떠올랐다. 우리 집은 3대째 장남인 큰집이었다. 분명 두 분은 나 없이 그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가요? 그러면 낮에는 저희 집에 가서 일 좀 돕고 저녁에 뵐게요.”

“뭐? 너희 집에 간다고? 둘이 같이?”

“아마 같이 갈 것 같은데. 저희 집이 큰집이라 할 일이 좀 있거든요. 저녁 전에는 끝날 거예요. 그럼 명절 전날 저녁에 뵐게요.”

내 계획을 들은 뒤 B의 엄마는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의 엄마는 작은 소리로 알았다는 대답을 했고 전화는 끊겼다. 그 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예의가 아닌 것 같구나

그날 저녁 집에서 만들어 놓은 것들을 챙겨 그의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다들 꽤나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아무리 반갑게 대한다고 한들 내 마음이편하지는 않았지만, 뭔지 모를 불편함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최대한 웃는 얼굴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대하는 그의 동생이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동생과 나는 그와의 결혼 전부터 함께 어울리던 사이였다. 그의 동생은 나를 퍽 좋아했고, 많이 따랐다. 하지만 그날 그의 동생은 마치 나를 처음 본 사람처럼 어색하게 대하고 있었다. 반면 그의 부모는 내게 평소보다 더 과하게 다정한 눈치였다. 나는 그의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C,요즘 무슨 일 있었어? 좀 피곤해보이네.”

“아뇨. 하나도 아닌데요.”

평소와는 다른 냉랭한 말투였다. 곧 이어 옆에서 그의 아빠가 내게 말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아무리 평소에 편하게 지냈어도, 어른들이 듣고 계시는데 그렇게 반말을 하고 이름을 막 부르면 되겠니?”

“네?”

나는 당황했다. 그의 동생은 나보다 6살이 어린 학생이었고, 꽤 오랜 시간을 아는 사이로 지내왔다. 나는 그의 동생에게 갑자기 존댓말을 해야 할 이유를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그 조금 어긋난 것 같았던 그 느낌은 조금씩 확신이 되어 돌아왔다. 그의 엄마는 그를 두고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리고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새아가, 요즘 세상에 뭐 그런 게 있냐고 하지만 어른들은 다르지 않겠니. 아무리 생각해도 명절에 시집 간 여자가 먼저 집에 갔다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구나.”

나는 순간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내 앞에서 저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 불과 몇 달 전 상견례 자리에서 집 문제며 생활비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요즘 세상에 남자와 여자가 어디 있냐며, 자신도 여자지만 평생을 교직에서 일하며 살아왔다고 당당히 말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그의 엄마가 설득 가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가 명절 전에 혹시 해야 될 것이 있냐고 여쭤봤는데 분명 없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래, 그게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내가 너희 집에 우리 아들까지 다 같이 다녀오라는 말은 아니었잖니?”

“그래서 일단 명절 당일에는 분명 여기에 먼저 오기로 했는데도 그게 문제가 되는 건가요?”

내 질문에 그의 엄마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난 그때 그의 엄마가 당황한 이유가 내가 틀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건데 그의 엄마가 당황한 이유는 내가 말대꾸를 하는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그의 엄마는 다시 내게 말했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원래 여자는 결혼하면 이제 원래 살던 그 집 사람이 아니다. 너희 가족들은 좀 개방적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지역은 원래 이게 맞아. 옳고 그름을 떠나 그렇게 살아왔어. 네가 우리 집에 들어온 이상 너도 그 것을 따라야 하지 않겠니?”

“네?”

“이제 부모님께서도 너를 포기하셔야지. 내 딸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곤란하다, 이 말이다. 그럼 집에 가서 푹 쉬고 내일 보자꾸나. 내 말 명심하고, 알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엄마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황급히 인사를 하고 그와 함께 그의 가족들 곁을 빠져나왔다. 

어쩔 수 없잖아

내 표정이 좋지 않자 그가 물었다.

“엄마랑 무슨 얘기 했어?”

“....”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건데 이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어?”

“내가 그런 소리를 듣고도 멀쩡해야해?”

“뭐?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나는 그에게 그의 엄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는 어쩐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자신의 엄마는 올바른 사람이고, 평생을 교직에 계시며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온 사람이라고 소개해 왔던 그였다. 그는 내 말을 듣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나도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인지 몰랐어.”

“그래, 몰랐겠지.”

“저... 그런데 그건 어쩔 수 없잖아.”

“...뭐라고?”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렇게 살아오신 분인데 어떻게 순식간에 생각을 바꿔? 그냥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닌데 좀 받아주고 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미안해. 정말, 그런데 자주 보는 거 아니잖아. 이럴 때만 잠깐만 맞춰주자, 응?”

말문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기가 막혔다. 내게 어째서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너무 억울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길에서 눈물이 나서 엉엉 울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는 나를 안아주며 등을 두드렸다. 일단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나는 대충 울음을 그치고 그와 함께 우리 집으로 발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분명 그날, 그 길바닥에서 혼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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