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고발 1. "며늘애가 그러라고 하디?"(상)

생각하다결혼과 비혼

결혼고발 1. "며늘애가 그러라고 하디?"(상)

사월날씨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남편이 시부와 통화하던 중이었다. 나와 남편은 그날 저녁에 시부모와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그와 관련해 무언가를 정하는 통화였을 것이다. 그때 별안간 거실에서 격양된 남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이가 그러라고 해요?!” 남편의 항의 섞인 대답으로 인해 나는 간접적으로 시부의 발언을 알게 되었다. 어떤 문제였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만큼은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있다.

상세 내용이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그만큼 사소한 일이었을 테다. 그토록 사소한 일상에도 시부모는 며느리 탓할 구석을 만든다. 당신들 마음에 차지 않는 결정일수록 그렇다. 명확한 이유가 있어도 자꾸만 허공의 며느리를 노려본다. 남편에게 급한 일이 생겨 시부모를 조금 늦게 찾아뵌다고 하는 경우에 반사적으로 ‘며느리가 늦게 가자고 한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 당시 전화를 끊은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후, 얼마간 어리둥절했던 것 같다. 일단 시부가 말한 ‘그러라고’의 내용이 내가 낸 의견이 아니어서 잠깐 억울하다가, 곧이어 설사 내 의견에서 시작된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런 말을 듣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 발언이 전제하는 것

요새도 종종 그렇지만, 결혼 초에 시부모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분들의 말에 깔려 있는 전제가 나의 그것과 몹시 달랐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고에 기초해서 나온 말인지 차례로 짚어가다보면, 내게는 너무나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에 도달하곤 했다.

마찬가지로 위 발언은 두 가지 잘못된 사고를 전제로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먼저, 부부가 함께 내린 의사결정이 오로지 며느리의 생각에서 나온 거라는 전제다. 부부의 일은 당연히 나와 남편이 합의하여 결정하고 진행한다. 하지만 시부모에게 부부 간 합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시부모가 당신들의 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분들에게 아들은 며느리 의견을 전달하는 허수아비일 뿐인 걸까?

이보다 더 심각한 두번째 전제는 며느리가 자신의 생각을 시부모에게서 감추려 든다는 고정관념이다. 즉, ‘며느리는 시부모를 멀리 하고 싶어한다’, ‘며느리는 남편을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이미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며느리혐오

사회적 약자를 특정 범주로 묶은 후, 집단의 특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그러한 편견을 바탕으로 구성원을 억압하는 것을 혐오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 전제들은 며느리혐오이다. 크게는 여성혐오의 일종이다.

조카들과 함께 찾아뵙겠다는 새언니의 전화가 꾸준히 와도 엄마의 반응은 늘 변함이 없다. 그럴 때마다 “얘는 우리집에 진짜 오고 싶은가? 뭐 때문에 이럴까? 하여간 희한한 애야”에서 그치고 만다. ‘며느리는 시부모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은 바뀌지 않는다. 새언니가 본인 시가에 오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럼에도 엄마 생각과 달리 자주 오려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보통 며느리답지 않게 예외적으로 ‘희한한 애’일 뿐이다.

고정관념에 들어맞지 않은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고정관념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혐오는 한정되고 차별적인 틀로만 상대를 바라보게 만든다. 만약 며느리가 선입견과 일치하는 행동을 한다면 편견은 강화될 것이고, 거기에서 어긋나는 행동은 가볍게 예외로 치부할 뿐이다. 며느리 개인, 나아가 일반적인 며느리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의 변화로는 쉽사리 이어지지 않는다.

개인적 차원에서 편견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착한 며느리'의 탈을 쓴 어마어마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 피땀 흘려 편견에서 빠져나오더라도 며느리는 들인 수고만큼의 보상을 결코 받지 못한다. 순종적이고 착한 노예로 인정받을지 몰라도 노예 자체에서 벗어날 순 없다. 혐오는 그런 식으로 부서지지 않는다.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당장 내게 꽂히는 편견을 해결하고 싶었다. 더이상 “며늘애가 그러라고 하디?”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자꾸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시부모 눈치를 보게 될 것 같았다. 아주 사소한 일에서까지 며느리탓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상기시키는 말이니까. 더불어 시부모를 좋아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거였다. 뭐든지 내 탓으로 몰고 가는 상대에게 호의를 갖기는 무척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괴롭고 피곤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시부모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기로 했다. 처음부터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임시방편으로라도 당장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게 중요했다. 시부모와 만나는 자리에서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남편이 통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합의한 의견을 내 탓으로 돌리는 시부의 모습에 놀라고 서운했다고, 앞으로는 어떤 사항이든 우리 부부의 결정으로 봐주시면 좋겠다고 말이다. 다행히 시부모는 나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그 후

그걸로 나는 만족했다. 시부모 생각이야 어떻든 내게 불쾌한 말을 하지 않는 점만으로 제법 마음이 편안했다. 일상화되고 만연한 편견이 한순간에 없어지기는 쉽지 않을 테고, 그분들이 그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 자체를 좋은 징조로 여겼다. 장기적으로는 행동 변화가 의식 변화까지 이끌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조금은 품고 있었다.

그러나 희망이 컸던 걸까. 시간이 흐른 후, “며늘애가 그러라고 하디?”가 변형되고 발전된 형태로 다시 등장했을 때, 나는 시부모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믿은 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고 말았다. 그건 훨씬 더 큰 위협으로 나타났다. 과연 구조적 혐오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이 글은 <결혼고발 2. "며늘애가 그러라고 하디?"(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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