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불덩이
결혼한 지 두 달쯤 지났을까 싶은 어느 날, 나는 별안간 집에 있던 노트를 아무렇게나 펼쳤다. 그리고는 생각나는 모든 걸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무지 소화되지 않던 것을 울컥 토해내는 심정으로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 어느샌가 심장 깊숙이 잔뜩 꽂혀있는 말들을 하나하나 종이 위에 꺼냈다. 두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며느리로서 시가에서 받은 부당하고 모멸적인 대우와 며느리의 위치를 똑똑히 알려주던 일상의 말들을 모두. 결코 ‘막장 시가’는 아니라서 호들갑 떨 만한 일도 아니고, 내 얘기를 듣는 이도 “아이고, 그렇구나”, “어휴, 그렇지 뭐”하고 눈썹 한 번 내린 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테지만, 내게는 분명코 영혼을 상하게 만드는 ‘보통의 며느리 대우’를 말이다.
남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하고, 남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해를 받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 표현을 시가에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려가지 않는 불덩이가 명치쯤에 거북하게 얹혀있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깊은 이해를 받아야 했던 것 같다. 너무 많아서 다 적을 수 있을지 모를 지경이던 불덩이들은 의외로 노트 두 쪽에 다 담겼다. 아주 사소한 일까지 빠짐없이 기록하는 동안, 나는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다.
불덩이가 응축되어
그 즈음까진 적응기라 여겼다. 한순간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였지만,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과 서로 맞춰가는 시기겠거니 하려 했다. 그러나 첫 두어 달의 충격만큼은 아니어도 비슷한 일들은 모양만 바꿔가며 반복되었고, 나는 남편을 포함하여 함께 적응기를 보내는 사람들 중 어쩐지 가장 많은 고민을 하는 역할이었다. 시가의 모든 불합리하고 억압적인 기대들은 아무리 남편을 통해 우회하더라도 정확히 나를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황당함이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이미 내게 가득한데, 더 진이 빠지게 만드는 건 시가의 요구가 왜 부당한지를 남편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그게 끝나면 갈등을 최소화할 대응 방법을 남편과 같이 궁리하고, 남편의 실행을 곁에서 지켜보고, 결과적으로 후폭풍을 같이 맞는 것까지 포함한 일련의 과정을 되풀이하며, 예의 그 불덩이는 더 이상 커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점점 더 밀도가 높아져 갔다.
그때 나는 글을 썼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으로, 이 응축된 불덩이를 정갈한 문장으로 만들지 않으면 그 뜨거움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그렇게 글을 썼다. ‘결혼고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리높여 말하고자
한 편의 글을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뒤 공감과 응원만큼 비난도 적잖이 받았는데, 그중에서 ‘글의 제목을 「결혼고발」이 아니라, 「내 시부모 고발」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댓글을 나는 종종 떠올렸다. 어쩜 이리 완벽한 오독이 있을까. 꼭 그 댓글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더 많이 말하고 싶었다. 이건 방식이나 강도만 다를 뿐, 모든 기혼여성이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맞닥뜨리는 일이라고. 불운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이 어리석거나 나쁘거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겪는 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나를 괴롭히는 결혼제도의 속성 자체를 탐구하고, 구조의 문제와, 구조에 영향받는 개인의 잘못을 낱낱이 짚어내고 싶었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넘어가는 모든 일들이 끔찍하게 차별적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전의 내가 몰랐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내 일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혹은 내가 잘 하면 괜찮을 거라고 무턱대고 낙관할 뿐, 애써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나처럼 막연한 희망과 오만(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어느 정도 포함된 마음)으로 결혼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알고 선택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가부장적 결혼제도가 며느리에게 예비해놓은 고통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구조를 부수는 시작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핀치>에 연재를 시작했다.
글을 쓰며 늘 염두에 두었던 스스로의 주의사항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개인적인 하소연이나 개인적인 해결에서 그치지 않기. 현상 뒤의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그걸 바꿀 만한 실마리를 찾으려 애쓰자는 것.
한 가지 추가하자면, ‘시가에 대항하는 며느리’ 서사 또한 경계했다. 부드러운 말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잘못을 지적하는 ‘현명함’이든 논리정연한 주장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똑똑함’이든 명확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단호함’이든, 뭐가 됐든 그것까지 며느리의 책임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가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갈등을 해결하는 것도 남편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남편이 맡아야 할 역할이다. 그렇기에 시가 vs. 며느리의 구도가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것, 남편은 중간에 뒷짐 지고 서서 짐짓 난감한 체하다가 엄마 앞에서는 엄마 편을 들고, 그 후에 아내와 둘이 있을 때 아내를 토닥이는 게 정답처럼 통용되는 데 반대한다. 나는 시가와 어떻게 갈등을 조율할지 고민하는 첫 번째 사람이 며느리가 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한다.
자유로운 사랑을 위하여
⟪현남 오빠에게⟫ 중 단편 소설 ⟨당신의 평화⟩를 쓴 최은영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부장제는 사랑의 반의어라는 벨 훅스의 말을 자주 생각한다. 가부장제에 복종하면 복종할수록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나는 벨 훅스의 말을 자주 생각하는 최은영의 말을 자주 생각했다. 결혼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그래도 이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을, 하루의 끝에 하루 동안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함께 쉬고 싶은 마음을 빼놓을 순 없다. 사랑하는 이를 더 마음껏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가부장제가 아닌 다른 게 필요하다. 일단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가능한 대안이 한 발짝 다가와 있다. 프랑스나 독일 등의 시민 결합을 모델로 하여 결혼제도가 아니어도 서로를 보호하고 부양할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성소수자나 비혼자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기혼자에게도 생활동반자법은 매우 효과적인 대안이다. 여성이 더 이상 며느리도, 아내도 아닌 세상. 그저 나 자신으로 존재하며, 일상을 함께 꾸리고 싶은 사람의 ‘동반자’라는 이름으로 충분한 세상. 그리하여 여성이 더 자유롭게 살고,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