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앞길 막는 사회 시즌 2 1. 여성에게 ‘워라밸’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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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앞길 막는 사회 시즌 2 1. 여성에게 ‘워라밸’은 가능한가?

사월날씨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죽으나 사나 한 회사에 충성하며 밥 먹듯이 야근을 일삼는 게 당연한 시대가 지나면서,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과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의 균형을 맞추려는 욕구가 주목받는 시대가 왔다. 학술용어로서만 기능하던 워크-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라는 단어가 일명 ‘워라밸’로 축약되어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고, 일자리를 평가하는 데 있어 주요 요소로 떠오른다. 워크work는 일, 그러니까 직장 업무, 유급 노동, 생산 노동을 의미하고, 라이프life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생활, 퇴근 후의 사생활, 가족과 보내는 시간 등을 뜻한다. 여기서 ‘라이프life’를 해석하는 데 있어 누군가는 삶이라 하고 누군가는 생활이라 한다. 그러니까 워크-라이프 밸런스란 일과 삶의 균형, 혹은 일과 생활의 균형이란 뜻.

일과 삶의 균형이란 언제 들어도 참 반가운 단어다. ‘그래, 사람들에게는 삶이 부족해. 특히 한국인들은 노동시간이 너무 길단 말이지, 휴가도 별로 없고 말야. 퇴근하고 취미 활동도 하고 여가 시간도 충분히 가져야 창의성도 높아진다던데. 사람이 행복해야 일에 더 몰입하고 직장에 대한 만족도도 높아지지 않겠어?’ 구구절절 동의하며 이의제기할 부분이라곤 없다. 

여성의 일이란?
여성의 삶이란?

그런데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 용어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여성의 일상에서 워크work는 무엇이고 라이프life는 무엇일까? 공간적으로 일은 직장, 삶은 가정이고, 시간적으로 일은 9시부터 6시, 삶은 6시 이후라고 나누어본다면 여성에게 ‘6시 이후’ ‘가정’에서의 활동이 단지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사생활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여성에게 가정은 또 다른 일터일 뿐이다. 아예 직장 자체가 가정인 전업주부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퇴근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하거나 직장에서 퇴근하여 다시 가정으로 출근해야 하는 여성에게 일과 생활이 정말 분리되는 속성일까? 여성의 하루를 일의 시간과 삶의 시간으로 똑떨어지게 나눌 수 있는 걸까?

『타임푸어』를 쓴 작가 브리짓 슐트는 이 시대 가장 시간이 부족한 직군으로 엄마를 꼽으며,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책임이 무겁기 때문에 노동 밀도가 높다고 분석한다.1 여성의 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 너무 많은 활동을 주어진 시간 내에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멀티 태스킹이 필요한 순간들이 잦다. 현대 사회 여성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뇌가 팽팽 돌아가는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의 노동은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는 점이다. 여성이 가사 및 양육의 핵심 수행자라는 사회적 규범에 따라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재생산노동이 여성에게 일차적으로 떠넘겨지지만 그게 일이라는 인식은 희박하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기둥에 몸을 기대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마켓컬리 앱에서, 쿠팡 사이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 게 업무라는 인식이 있나? 아침 먹고 나면 점심 뭐 먹을지 고민하고 점심 먹으면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게 전업주부의 애환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되어 있나? 마우스를 클릭하여 인터넷에서 생필품을 주문하고 아이 유치원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모두 워크work에 해당하지만, 그 시간과 에너지는 사회적으로 ‘일’이라고 인정받지 못한다. 직장인이라면 퇴근한 순간부터 회사 업무와 관련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며, 퇴근 시간 후에 업무와 관련된 연락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에는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어 있지만, 여성의 재생산노동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이 맘충이라는 말을 듣은 곳은 공원이었다. 벤치에 앉아 유모차를 흔들며 커피를 마시는 김지영이 일work의 영역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평일 낮시간에 유모차를 끌고 쇼핑몰이나 식품 코너에 있는 여성에게 남편 돈으로 놀고먹는 맘충이라고 욕하는 이들이 알려 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면, 어떤 여성이 회사에 있든 가정에 있든 마트에 있든 공원에 있든 실은 그들 모두 직장에 있는 셈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여성에게 워라밸이란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니라 일과 일의 균형을 의미하게 된다. 이 일과 저 일을 병행하기 위해 여성 개인이 얼마나 저글링을 잘 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단어. 

일러스트 이민


먼저 환경부터 바뀌어야

여성에게 중요한 건 피상적인 수준의 워라밸이 아니다. 아무리 기업에서 복리후생이나 육아에 대한 지원을 하더라도 그게 남성에게는 해당하지 않고 여성의 몫으로만 여겨진다면 여성의 일 부담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여성에게 돌아올 뿐이다.2 일찍 퇴근해서 집안일을 더 많이 담당하게 되거나 퇴근이 이르니까 가사 노동할 시간이 더 많지 않냐며 부당함이 정당화된다. 덜 피곤한 사람이 더 피곤한 사람을 배려하는 게 맞지 않냐거나 일 적게 하면서(돈 적게 벌면서) 불평하지 말라는 편향된 말들로 현재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다.

워라밸이 작동하는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여성은 결코 편안해질 수 없다. 근본적으로 차별적인 성 역할과 성 고정관념을 바꾸어야 한다. 연구자들 또한 개인의 워라밸을 위한 해결책으로 남성에게는 비효율적인 업무문화만 바뀌면 되지만, 여성에게는 가사 분담, 육아 분담, 돌봄 분담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3

국가는 일과 삶의 균형으로 저출생 문제나 양육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노동시장에서 받는 불이익을 해결할 의지는 없이 그럴 듯한 단어만 내세우며 여성에게 이중 노동을 부과하는 빛 좋은 개살구 전략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성 역할 관념을 부수고 남성에게도 같은 부담을 지우지 않는 이상 여성에게 진정한 워라밸은 없다.

참고문헌

1. 브리짓 슐트 (2015). 타임 푸어. 안진이 옮김, 더퀘스트.

2. 김양희 (2017). ‘일-가정 양립’보다 ‘삶의 균형’이다. 여성신문, 8월 2일.

3. 손영미, 박정열 (2014). 남녀의 일과 삶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인과변인과 결과변인의 차이연구: 기혼직장인을 대상으로. 한국심리학회지: 여성, 19(2), 16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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