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로봇공학과를 졸업하고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비교적 안정적이고 연봉도 나쁘지 않았다. 업무도 숙달되었고 사람들과도 적당히 잘 지냈다. 그렇지만 이직을 생각하면 내세울 만한 기술이란 건 없었다. 개발팀, 영업팀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거래처를 관리하는 게 주된 업무였기 때문에 수현이 쌓아온 기술이라고 해봤자 지금 회사에 특화된 지식이었다. 학부 전공이 취업할 때 도움이 된 건 분명하지만, 전공 지식을 활용할 일은 많지 않았고 점점 공학과 멀어졌다. 매니저로서의 기술을 떠올려봐도 전문적인 수준이라 하기 어려웠다. 이 회사를 나가면 쓸모없어질 경력은 아닌지 종종 고민했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하는데 수현은 부장까지는 기본으로 생각하는 남자 동기들과 달리 자신이 없었다.
남편이 베트남으로 발령 났을 때 수현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남편을 생각하면 축하할 일이었다. 새로 생기는 지사의 관리직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에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오르는 자리였다. 수현 자신의 입장을 고려해봐도 늘 커리어에 대한 불안이 있었고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던 것도 아니었다. 특출난 인재가 아닌 이상 평범한 직원으로서 여성은 평범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는 회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당분간 일을 쉬면서 재충전도 하고 미루어놓았던 자질구레한 문제들도 처리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회사를 떠나서 어디서 일을 할 수 있을지, 더군다나 언어도 문화도 익숙하지 않은 타지에 가서 일을 구할 수는 있을지,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지는 것도 아쉬웠지만 가장 고민되는 건 역시 일자리였다. 일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수현은 상상한 적 없었다.
남편은 지사장 제안을 받은 것과 둘의 이주에 관하여 “어떻게 할까?”라고 묻는 형태로 말을 맺었지만, 결론은 나 있었다. 그 기회를 차버리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란 걸 남편도 수현도 알고 있었다. “당신도 거기 가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라며 남편이 다정하게 말했지만 수현이 가진 고민의 깊이와는 맞지 않았다. 수현은 이미 베트남 이민 카페와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검색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래도 똑같은 일상에 변화가 생긴다는 은은한 흥분이 수현을 감싸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쪽은 축하, 한쪽은 걱정
동료들은 대부분 축하를 건넸다. 남편 발령 때문이라 하니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상사도 금방 납득했다. 커리어보다는 가정을 지키는 게 중요하지, 세상의 진리를 말하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자 직원들은 노골적으로 수현을 부러워했다. 자기도 몇 달만이라도 회사 안 다니고 쉬고 싶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렇지만 베트남에 뭐가 유명하고 뭐가 맛있다고 늘어놓는 그들의 말에는 경쟁자가 하나 사라진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명랑함이 깃들어있었다. 거기 가면 일할 만한 데가 있냐고 걱정스레 물어오는 것은 주로 여자 선배들이었다. 자기도 이직 생각을 때때로 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고, 하물며 해외라면 네트워크도 부족할 텐데, 하고 말끝을 흐리는 그들에게서는 남의 인생에 훈수를 두거나 초 치고 싶지 않은 조심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수현은 애써 희망적인 이야기들로 그들을 안심시키고는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평소보다 두 시간 더 오래 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보아도 마땅한 일이 없었다. 베트남어에 능통하지 않은 수현이 전공이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업무는 전무했다. 이런 게 경력단절이구나, 컴퓨터 앞의 수현은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관심 가는 구직 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수현의 경력이 인정되지는 않으나 흥미가 가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요리였다. 완전히 새로운 분야지만 기본적인 교육을 받으면 일단 시작할 수 있었고 수현과 비슷한 나이 또래 여성들도 꽤 많이 시작하는 것 같았다. 수현은 요리에 자신 있는 편이었다. 수현이 지금껏 쌓아온 경력과는 달리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도 구미가 당겼다. 요리 일이라면 혹 다시 거주지를 옮기더라도 지금처럼 경력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외로움은 나의 몫
이사한 직후에는 수현도 정신이 없었다. 남편이 정신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빴다. 새로운 지사를 꾸리다 보니 자잘한 일들에 손이 부족했고 수현은 남는 노동력으로서 수시로 동원되었다. 게다가 그 지역에 괜찮은 동네를 살피고 부동산을 돌며 살집을 알아보고 지역 커뮤니티를 찾고 검색하는 일 또한 수현의 몫이었다. 간신히 집을 계약한 후에는 짐 정리를 하고 주변에 시장과 음식점과 교통수단을 파악해야 했다. 이웃과 인사하고 휴대폰을 개통했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몇 달이 훌쩍 지났다.
마음이 분주하면서도 외로운 건 신기한 일이었다. 회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남편과 달리 수현은 하루종일 한마디도 안 하는 날도 많았다. 수현이 심심함과 외로움과 우울감 사이에서 헤맬 때면 남편은 회사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줬다. 주된 내용은 이주해올 수 있었던 우리가 운이 좋았다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비슷한 제안을 받은 동료들 중에 자녀가 중학생 이상이면 학업 때문에 이주를 포기하거나 혹은 남자 혼자 단신 부임을 한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는 같이 있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아이가 없는 것도 이럴 때 좋다는 말을 덧붙이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본사에서 일하다가 해외로 발령 간 여자 동료는 딱 한 명 있는데, 그는 남편과 뜻이 맞지 않아 거의 포기할 뻔하다가 막바지에 엄마가 같이 가는 걸로 극적인 타결을 보았단다. 원래도 주중에는 엄마에게 아이를 맡겨왔기 때문에 커리어를 위해 엄마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라며 아내를 위해 혼자 살기로 한 그의 남편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남자와 달리 여자가 발령받은 경우에는 왜 남편이 아이와 같이 살며 케어하는 선택지가 없는 거냐고 수현이 묻자 아무래도 아이가 엄마를 따르니까라고 시작하는 남편의 답을 들으며 수현은 머리가 아파왔다.
이미 끊긴 경력, 이미 끊긴 네트워크
기본적인 요리 교육을 마치고 수현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한국 음식점을 작게 운영하는 사장을 소개받았다. 요리 일은 비교적 나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지 가끔 의문이 들었던 기업에서의 업무와는 달리 바로 눈앞에서 기쁘게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보는 게 좋았다. 연봉은 전과 비교해서 반의반도 안 되지만 남편의 승진으로 가정 소득은 오히려 늘었다. 그만큼 남편과 수현의 연봉 차이는 벌어졌다. 어쨌든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주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하루에 같은 시간을 일해도 어찌 이렇게 다른 액수의 돈을 받을 수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경력의 대부분을 쌓았던 이전 회사에 생각보다 애착이 강했구나 새삼스레 느끼고 있었다. 남편보다 오랜 시간을 부대끼며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연락이 소원해진 지는 오래였다. 가끔씩 수현은 경력만이 아니라 삶이 단절된 것 같은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수현의 열 가지 사실들
- 거주지 선택에 있어 남편의 커리어를 더 중시하는 것은 전통적인 성 역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이유가 바탕이 된다. 물론 둘 다 성차별적 요소에서 비롯된다.1
- 그 결과 아내는 경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남편의 경력에 우선순위를 둘수록 아내의 수입이 줄어든다.1
- 여성은 ‘tied mover’(직장을 떠나는 게 이득이 아니어도 떠나게 되는 사람) 혹은 ‘tied stayer’(다른 지역에 더 좋은 기회가 있어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가 된다.1
- 여성이 남편을 따라 이주하여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면 기존 직장에 특화된 기술은 단절될 수 있다. 일자리 정보에 관한 네트워크가 부족하고, 새로운 지역에서 가정이 적응할 수 있도록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직장을 찾는 시도 또한 제한된다.2
- 여성은 거주지를 선택할 결정권이 적기 때문에 어떤 노동 시장에서든 구할 수 있는 직업, 즉, 지리적으로 유연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1. 회사에 상관없이 쉽게 옮길 수 있는 기술을 쌓는 직업에 들어가는 전략을 사용한다.2
- 고용주는 여성의 이주를 낮은 생산성, 더 낮은 연봉을 받을 각오의 신호로, 남성의 이주를 높은 생산성의 신호로 여긴다.2
- 이주로 인해 아내의 소득은 줄지만 남편의 소득이 증가하기 때문에 총 가정 소득은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2
- 그럼으로써 가정 내 성별임금격차가 증가한다.2
- “남자 외교관들은 맞벌이라 하더라도 부인이 그만두고 따라나서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해외 발령을 받은 여자 외교관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살고, 남편은 한국에 남는 경우가 대다수다. 여자 외교관들은 어머니, 보모와 함께 ‘3각 체제’를 이뤄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3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원치 않는 경력 단절을 겪은 여성들의 경우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진단했다. 사회적 네트워크라는 것은 정신건강에서 매우 중요하다. 직장, 가족, 이웃이 함께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환경 유해요소 중 가장 위험한 요인으로 소음, 오염, 공해 등을 제치고 ‘고립’을 1위로 손꼽았다.”4
참고문헌
1. Blau, F. D., & Kahn, L. M. (2017). The gender wage gap: Extent, trends, and explanations. Journal of Economic Literature, 55(3), 789-865.
2. Cooke, T. J., Boyle, P., Couch, K., & Feijten, P. (2009). A longitudinal analysis of family migration and the gender gap in earnings in the United States and Great Britain. Demography, 46(1), 147-167.
3. 노지현 (2013). 남자 외교관들 “세종로 외교부가 여자로 가득찼다”. 동아일보, 10월 29일.
4. 한지혜 (2016). '이주민들의 도시', 세종시의 진짜 '자살률'을 말하다. 세종포스트,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