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족 구성원 누구도 빠짐없이 행복한 명절을 오래전부터 꿈꿔왔다. 명절마다 여성이 남성의 친족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하는 일련의 부당함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고, 그런 집안 문화 속에서 어머니를 위한 나의 제안들이 처음엔 시도되는 듯하다가 머지않아 지지부진, 결국 익숙한 기존 방식으로 빠르게 회귀하는 걸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행복한 명절은 내게 현실의 절실한 과제였다. 딸의 입장에서 내 아버지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내가 며느리 당사자로서 맞닥뜨린 상황은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첫 번째 명절
결혼 후 첫 명절, 시가에 가서 하룻밤을 지냈다. 결혼 초부터 시부가 강조하고 요구해온 사항이었다. 일 년에 단 두 번 있는 명절만큼은 시가에서 하룻밤을 자는 것. 외아들을 독립시키고 쓸쓸하실 시부모를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 부모도 자식 둘을 모두 독립시킨 쓸쓸함은 마찬가지여도 딸인 내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은 일단 차치한다) 그러나 왜 실제로 닥쳐야만 그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 걸까. 아니, 나는 왜 그게 어떤 모습으로 실행될지 미리 추측하지 못했을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예상했어야 했다.
시가를 방문하니 시모는 잡채니 갈비찜이니 하는 명절음식을 준비하였고, 당연히 집안은 깨끗이 정리된 상태였다. 장보기, 요리, 집 안 청소, 이부자리 준비 등 명절을 위한 모든 노동이 시모에 의해 이루어졌을 거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물론, 시부도 마냥 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대다수 남자들이 보통 하는 정도로 옆에서 손을 보태고 거드셨겠지. 명절노동을 계획하고 주도하는 관리자인 엄마를 나와 아빠가 보조 일손으로서만 도왔듯이. 우리가 도착하자 시부는 계속해서 티비 앞에 앉아 있었고, 시모는 우리 줄 과일과 간식을 내놓기 위해, 그 이후에는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내내 부엌에 서 있었다.
시가에 들어서기 전, 남편과 약속한 게 있었다. 내가 부엌에 있을 땐 반드시 남편도 같이 부엌에 있을 것. 부엌일을 나보다 더 많이 하거나 “어머니,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저 뭐 할까요?”라는 말을 더 자주 할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당신 집 부엌에 서서 거실에 있는 당신을 보며 이 집안의 노예가 된 기분만은 느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금 내가 시가 부엌에 있는 건 남편과 함께 그저 자식 부부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중이라고 스스로 합리화라도 하고 싶었다.
시모는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분이 아니다. 본인 입장에서 나를 최대한 배려해주시는 분이고, 아주 기본적인 것만 기대하시는 ‘보통’의 ‘좋은’ 시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다. 부엌에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 부엌일을 어떻게 하는지가 여자와 아내로서의 임무에 관한 평가대상이 되는 것, 남편과 시부모의 시중들기를 으레 기대받는 것, 일을 안 할 땐 나를 배려해주는 시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 노동강도나 여부와 관계없이 시가에서 며느리로 존재하는 모든 순간이 모멸적이다.
시가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놓았지만, 그 집 안에서 나의 당부는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자연히 부엌에서 시모를 도왔고, 남편이 근처에서 서성일 때면 그런 남편이 한가해 보이는지 시부가 자꾸만 남편을 티비와 컴퓨터 앞으로 불러내었다. 그리곤 이런 게 안 된다, 저것 좀 봐줘라 하시는 아버지의 요청을 그 자리에서 뿌리치지 못하는 남편은 그저 ‘착한 아들’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뿐이었다.
다양한 대안의 시도
첫 명절을 보내고 이대로는 안 된다고, 다른 모습의 명절로 바꿔야 한다고 다짐했다. 시가에서 내가 불편한 시간을 보내서만이 아니었다. 그날은 내가 지금껏 보내왔던 수많은 명절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명절노동에서 나와 시모를, 그 집안의 모든 여자를 해방시키고 싶었다.
다음 명절에는 근교의 한 자연 휴양림을 예약했다. 낮에는 다 같이 근처 숲을 산책하고, 밤에는 시부가 챙겨온 프로젝터로 함께 영화를 보았다. 다음 날 아침, 맛집에서 식사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모의 노동을 줄였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시부모도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그분들이 원하는 건 자식 부부와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일 테니 충분히 명절을 즐기셨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감상은 약간 달랐다. 꼬박 이틀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시부모와 함께 있자니 나는 점점 시들어갔다. 말하고 웃을 에너지가 떨어져갔다. 복층 원룸이라 나와 남편은 위층에서 따로 잤지만, 잠드는 순간조차 시부모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고역이었다. 나만의 공간도,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시부모와 명랑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은 3~4시간이 한계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으로는 시내 호텔의 방 2개를 예약했다. 유례없이 긴 연휴였고, 많은 사람이 해외여행을 떠나자 호텔 측에서 가격을 낮춘 이벤트를 열었다. 그중에서도 명절 당일을 피한 날짜는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휴양림에서도 방을 따로 잡을 수는 있지만, 좀 더 완벽한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휴양림이 낮은 가격, 맑은 공기, 노동 적음(시모가 간식거리를 챙겨왔다.)의 측면에서 만족이었다면, 호텔은 가까운 거리, 노동 없음, 깨끗한 잠자리, 부대시설 이용 측면에서 더 나은 선택이었다. 높은 가격이 부담스러웠지만, 명절노동에서 여성을 해방시킬 수 있다면 뭐라도 시도해보고 싶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간단히 호텔 라운지에서 요기하고 밖에 나가 시내 구경하며 낮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모두 호텔 라운지에서 해결했다. 방에서 나와 걸어가기만 하면 깔끔한 뷔페가 차려져 있는, 그야말로 명절의 천국이었다. 전을 부치며 기름 냄새를 맡을 필요도, 다른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를 필요도, 설거지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밤거리를 거닐었다. 다음 날 아침엔 조식과 수영, 체크아웃 후 점심식사와 산책까지 완벽한 일정이었다.
시부모는 가격을 염려하면서도 안락한 분위기와 맛있는 식사, 새로운 경험에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시모의 육체노동이 말끔히 사라졌고, 내가 시가 부엌에서 어쩔 수 없이 이등시민인 것을 재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부모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나는 분리된 공간이 보장된 점에 꽤 숨통이 트였고, 호텔에서 머무는 시간 자체가 즐거웠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부모에게 가부장제적 명절보다 더 좋은 경험을 제공한다면, 그분들도 굳이 기존 방식을 고집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시부모가 원하는 건
올해 설. ‘이제 명절마다 호텔 방 2개를 예약할 것’이라고 시부모에게 호언장담해놓았기 때문에 이번엔 어떤 호텔을 좀 더 저렴하게 갈 수 있을지 찾던 중이었다. 그런데 설을 앞둔 어느 날, 뜻밖의 상황이 생겼다. 시모가 지난 명절 이야기를 시작하자, 시부가 “당일은 아니었지만…”이라며 넌지시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었다. 이후 시모는 남편에게 설 당일에 만나고 싶다며, 아무래도 호텔은 당일에 가기 어려우니 이번엔 그냥 시가에 와서 떡국을 먹으면 어떻겠냐 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경험을 드려도 시부모에게는 아들 부부와 명절 당일에 만나는 것, 자식이 부모를 찾아뵙는 것, 여성이 남성에게 요리해서 대접하는 게 충족되어야 했다. 여성의 해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시모에게조차 그랬다. 이미 당신의 명절노동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는 탓일지도 몰랐다.
남편과 상의 끝에 시부모 요구에 부분적으로 맞춰보기로 했다. 설 당일에 만나서 떡국 먹기. 나는 대신 시부모를 우리 집에 초대하자고 제안했다. 시가 부엌에서 일하는 며느리보단 우리 집에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일하는 집주인의 포지션이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모멸감을 최소화하려 발버둥 쳤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내게 결코 편안한 방식이 아니었다. 막상 닥쳐보니 몸과 마음에 모두 무리가 되었다.
그렇게 내게 무리한 설을 보내고 나니 호텔에서 듣지 못한 말을 그제야 들을 수 있었다. “명절이 좋긴 좋네, 며느리한테 떡국도 얻어먹고.” 호텔에서는 “좋으시죠? 괜찮으시죠?”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뭐 그렇네.” 정도로 들었던 말을, 심지어 같이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훨씬 적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부의 기쁨이 듬뿍 든 자발적인 언어로 듣게 됐다. 매 끼니 호텔 뷔페와 사우나, 쾌적한 잠자리를 뒤로하고 단지 설 당일에 떡국을 대접했다는 이유로.
결국은 가부장제 수호
나는 그분들을 바꿀 수 없었다.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지 않는 방식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반기지 않는다. 구성원 모두 노동하지 않고 편안하게 즐긴다고 여긴 방식은 결국 거부당했다. 시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나의 감정노동은 분명 있지만, 호텔 명절은 합리적이고 평등한 명절 문화에 가까이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들은 가부장제 말고는 다른 어떤 삶의 방식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어떤 생각과 의견을 가진 사람인지, 나는 명절을 어떤 방식으로 보내고 싶은지, 나는 부부간의 관계가 어떤 게 바람직하다고 여기는지, 시부모와 어떤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싶은지에 관해 지난 3년간 최대한 표현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시부모도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라 간주했다. 그러나 결혼 초와 똑같은 태도, 지금껏 내가 표현해온 나의 의사는 하나도 입력되지 않았다는 듯이 여전히 가부장적인 태도와 가치로 나를 대하는 걸 보면, 게다가 나도 시부모와 생각이 같다는 걸 전제로 하는 말을 들을 때면(내 생각이 어떤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겠지.), 나는 절망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분들에게 나를 알릴 수도, 그분들을 바꿀 수도 없다.
앞으로 나는
그래서 이번 추석, 나와 남편은 항공권을 끊었다. 연휴 앞뒤로 휴가를 내어 빨간 날을 꽉꽉 채워 여행을 간다. 어쩌면 도피일지도 모른다. 평소 그토록 중시하는 대화와 합의가 아니니까. 다가오는 명절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더는 모르겠다. 시부모와 함께 보내는 명절이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에너지가 점점 줄어 든다. 갈등을 괴로워하는 성향 탓에 시부모와 원만한 관계를 만들려고 아직은 노력 중이나, 언젠가부터 나는 희미한 예감이 든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시부모와의 관계는 가부장제를 벗어나는 것인데, 몇 년간 변화의 미동조차 없는 시부모를 보면서 결국에는 내가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해답밖에 남지 않을 거란 예감이다. 아직 두려운 게 사실이지만, 그 지점에 언젠가는 도달하고 싶고, 또 도달할 것이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나에게 다정한 하루’ 작가인 서밤(@alreadytaken0_0)님이 추석 당일에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여성들이 모여 맛있는 한 끼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짧은 시간 안에 참가신청은 마감되었다. 지금 앞서 그 길을 걷고 있는 많은 여성을 보며 용기를 얻는다. 다음 명절에는 나도 그 모임에 참석하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