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부당하게 며느리탓을 듣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안심하던 차였다.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나는 시부모의 한층 더 강력하고 교묘해진 반감을 맞닥뜨렸다.
아들, 너 자꾸 그러면 고부사이만 어색해진다.
다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이었다. 다시 화자는 시부, 청자는 남편이다. 지난번과 다른 게 있다면, ‘며늘애가 그러라고 하디’는 내용의 당사자인 며느리가 없는 곳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이번 발언은 고부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는 점이고, 공통점은 역시나 발언의 맥락이 기억에 없는 점이다. 시부는 늘 남편을 팔불출이라 부르니까 아마 그런 비슷한 언행에 대한 반응이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정확한 뜻이 궁금해 찾아보니, 팔불출의 사전적 정의는 몹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단지 아내에게 잘하는 남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문자 그대로 바보라고 부르는지는 정말 몰랐다. 남편에게 잘하는 아내는 칭송받을지언정 결코 희화화되지도, 비하되지도 않는데 말이다.)
참 아리송한 발언이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한다’에서 ‘고부사이가 어색해진다’로 건너뛰는 얼토당토않은 전개는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걸까. 단 한 마디의 말인데, 그 안에 담겼을 모든 전제와 흐름이 목에 걸린다.
차례대로 살펴본다. 아들이 ‘며느리를 위해’ 시부모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치자.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는 며느리만을 위한 게 아니라 부부관계를 위한 것이고 함께 가정을 꾸리기로 약속한 사람들 간의 합의로 보는 게 맞다.
이때, 시모가 아들이 ‘며느리편’을 든다며 서운해한다. 늘 생각하지만, 아들이 누구를 편든다는 말은 굉장히 이상하다. 아들의 애정을 사이에 두고 시모와 며느리가 싸운다는 생각,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긴다는 생각 자체가 기이하기 그지없다. 제발 아들을 독립된 성인으로 분리시키면 안 될까. 아들은 누구 편을 드는 게 아니다. 그저 본인 가치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입장을 정한 후 의견을 개진하거나 행동할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부모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본인이 담당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생각의 차이를 좁히거나 마음을 돌봐주는 일이 시부모의 아들로서나 며느리의 남편으로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성실히 수행하면 된다.
지금까지의 전개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가장 불합리한 대목은 바로 지금이다. 시부모는 아들이 며느리편을 들어서 생긴 설움을 어디에 푸냐면, 행동 주체인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그렇게 ‘만든’ 며느리다. 이 모든 게 아들을 ‘뺏어가서’ ‘조종하는’ 며느리탓이다. 편견에 근거하여 며느리탓을 하고, 그게 그대로 며느리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는 것. 내가 이해한 며느리혐오의 핵심이다.
그러고는 며느리에 대한 반감을 ‘고부사이가 어색해진다’는 교묘한 언어로 포장한다. 사이가 어색해진다니. 그게 아니다. 시부모가 일방적으로 며느리를 미워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권력 차를 가리고, 약자가 겪는 압박을 지워버리는 문장이다. 요새는 시부모가 며느리 눈치 보는 세상이에요, 아들 얼굴 보려면 며느리에게 잘해야 돼요, 며느님 말 안 들으면 쫓겨나요, 이런 말들을 정녕 약자의 말이라 볼 수 있을까? 이를 아무 거리낌 없이 ‘며느님' 앞에서 하는 것만으로 이미 권력이다. 혐오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며느리는 시부모를 싫어할 수 있을진 몰라도 혐오할 수는 없다. 대등한 구도로 갈등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고부갈등이 아니라 며느리혐오가 정확한 명칭이다.
고부갈등이란 단어가 사라져야 할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발화자인 시부의 행방을 찾아본다. 막상 발화자는 당신이면서 ‘고부’라는 단어 뒤에 숨어 본인은 쏙 빠진 채 경솔하고 질투 많은 여자들 간 감정싸움으로 만드는 중이다. 상황을 중재하는 척하지만, 그 말을 입밖으로 내어 가부장제 질서를 확립하고 가부장으로서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은 건 다름 아닌 시부다. 시모 vs. 며느리라는 고전적인 프레임이야말로 사라져야 할 여성혐오의 산물이다. 시부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은 채 새로 들어온 종을 복속시키려는 것이든 시모가 집안 내 서열에서 유일하게 본인보다 아래인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든 왜 꼭 이럴 때만 여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는지 모를 일이다.
알아서 잘하라는 경고
앞선 ‘며늘애가 그러라고 하디’의 연장선이나 며느리에 대한 반감이 훨씬 더 적나라해졌다. 시부모 마음에 안 드는 결정이 며느리 의견이라고 의심하는 게 전자였다면, 소극적인 며느리탓을 넘어 이제는 적극적으로 며느리를 미워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이제 거슬리는 행동은 아들이든 며느리든, 누구 의견인지 중요하지 않다. 설사 아들 의견이라 하더라도 너희가 계속 이런 결정을 내린다면 화살은 며느리에게 꽂힐 거라는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한다. 아들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며느리를 향한 말이다. 미움받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하라는 경고성 메시지. 며느리가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여보, 난 괜찮으니까 아버님 어머님 뜻대로 해요.”라고 굽히도록 종용하는 메시지다. 며느리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다.
혐오는 강자의 지배 수단이다. 결국, 며느리탓과 반감의 목표는 시부모 입맛에 맞게 며느리가 행동을 수정하도록 굴복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도 매우 효과가 좋은 방안이다. 나 또한 시부의 말을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위축된 게 사실이니까.
미워할 준비는 되어 있다
처가에서 장모가 설거지할 때 사위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어도 아무도 사위를 미워하지 않는다. 반면, 시모가 설거지하는데 며느리가 TV를 보고 있으면 모두가 그를 미워할 것이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 부당한 감정이라고 인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렇다. 습관적이고 자동화된 반응이고, 우리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학습되어왔다.
며느리라는 존재는 쉽게 일반화되고, 쉽게 반감을 산다. 언제든 며느리를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세상으로 보인다. 며느리에 대해서는 일상화되고 구조적이고 시대보편적인 반감이 존재한다. 얼마 전, SNS에서 ‘며느리밑씻개’라는 이름의 풀과 그 유래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밑씻개’는 용변을 본 후에 닦는 용도의 물건을 일컫는데, 이 풀은 줄기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 피부에 닿으면 쓰라린 상처를 낸다는 것이다. 얼마나 며느리가 미우면 이토록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짓을 상상해낸 걸까. 게다가 이 반감은 절대 비밀스럽지 않다. 식물에 이름을 지어서 부를 정도로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합법적인 반감이다.
이밖에도 며느리를 미워하는 말들은 차고 넘친다. 아들이 건강에 문제가 생겨도, 살이 쪄도/빠져도, 돈을 못 벌어도, 심지어는 바람을 피워도 모조리 며느리탓이 된다. 오죽하면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람에게 아들 잡아먹었다는 꼬리표를 붙일까. 여성이 비합리적인 누명과 부당한 책임 전가로 고통받는 동안, 책임에서 자유로운 건 남성뿐이다.
통제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 너 자꾸 그러면 고부사이만 어색해진다”라는 말을 들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시부모의 행동을 바꾼 게 아니었다. 생각을 바꾼 건 더구나 아니었다.
나의 정중한 호소가 효과적이면 좋았겠지만,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타인이 아니라 내 행동만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이미 내 앞에 준비된 미움을 피하고자 노력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지키는 일에 더 힘쓸 것, 부당한 대우를 거절할 수 있도록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을 것, 그리고 가부장제에 통제당하지 않고 내가 나를 통제할 것. 개인적 차원에서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지만, 며느리혐오에서 벗어날 첫걸음은 내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