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효란 무엇인가
남편과 연애하는 5년 반 동안 나는 그를 효자라고 생각했다. 효자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진 않았지만, 좋은 아들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리고 그 점을 높이 샀다. 고운 마음씨와 배려 깊은 성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까칠하지만 내게만은 다정한 사람보다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을 선호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효자와 결혼하면 고생한다는 식의 풍문을 들을 때면 내심 의아했다. 부모에게 마음 쓸 줄 아는 성품의 사람이 배우자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자신 있게 ‘애인은 효자지만,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답했었다. 결혼제도라는 맥락 안에서 발현되는 효자의 모습을 사전적 의미로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답을 묻는다면, ‘그리 효자도 아니면서 나를 힘들게 했다’ 정도가 되겠다.
효자라서 그래?
결혼 초기 남편은 거의 매일같이 부모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효자다.) 서로의 부모에게는 한 달에 한 번 연락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나 남편은 가끔씩, 오늘은 내가 시부모에게 전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은근히 내비쳤다. 그가 우리의 원칙을 잊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시부모가 며느리 전화를 자주 못 받는 아쉬움을 자꾸만 아들에게 표현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시가의 ‘아쉬움으로 포장되었으나 엄연한 압박’을 아주 약간만 걸러 내게 전달하곤 했다. (효자니까.) 나와 함께 만든 합리적인 기준 대신 부모 압력에 못 이겨 내게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부탁’하는 남편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효자라서 이런 걸까?
그래, 전화 한 통이야 별 것 아니니 그냥 원하는 거 해드리자 싶을 때도 있었지만, 실은 결코 별것 아닌 게 아니다. 며느리의 안부 전화를 기대하는 심리는 철저히 강자의 권력확인욕구이고, 그걸 채워주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심정이 즐거울 리가 없다. 게다가 나는 내 부모에게도 용건 없이 전화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지라 얼마간은 억지로 노력하여 시부모 안부 전화를 챙겨도 봤지만, 늘 뒷맛이 씁쓸했다. 나 스스로도 (남편에게는 없는) 상대 부모에 대한 연락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그게 늘 마음의 짐이지만, 그래서 전화를 하면 또 그것대로 스트레스라는 걸 남편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 달에 한 번, 남편이 먼저 내 부모에게 전화하면 나도 시부모에게 전화하는 원칙을 만든 것이다. 이 모든 정황을 뒤로하고 내게 ‘부드러운 제안’을 하는 남편. 참고로 남편은 단 한 번도 내 부모에게 단순 안부전화를 건 적이 없고, ‘한 달에 한 번 서로 부모에게’라는 기준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현재 안부전화는 각자 알아서 자기 부모에게만 하고 있으며, 남편의 안부전화 빈도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다소 낮아졌다.
남편의 사촌 결혼식과 내 친구 결혼식 일정이 겹쳤을 때다. 시간이라도 다르면 둘 다 참석해보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날짜, 같은 시각에 장소는 서울과 부산. 그때 갑자기 남편이 내가 십년지기 친구가 아니라 본인 사촌동생 결혼식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입장 바꿔 본인이었다면 내 사촌 결혼식에 참석했을 거라며, 평소답지 않게 억지를 부렸다. 내가 아는 남편의 가치관과 너무 달라 의아해하다가 곧 짐작 가는 걸 물었다.
당신, 부모님이 나 안 가는 걸로 한 소리 하실까 봐 그러죠?
그러자 남편은 말없이 고민하더니 이내 수긍하였다.
가부장제적 효의 실체
그 순간 나는 효라고 불리는 것의 실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남자가 겉보기에 효자 노릇을 하는데, 알고 보면 단지 갈등을 만들기 싫어서, 그 갈등을 대면하고 처리해야 할 자신의 임무가 피곤하고 번거로워서 아내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 효는 명분일 뿐, 실상은 본인 편의가 목적이다. 부모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한 자신의 에너지는 조금도 쓰지 않은 채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이런 남성을 효자라 부르는 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비겁한 모습을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통념이 남성의 행동을 포장해준다. “효자라서 그래.” 주변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부당한 상황에 처한 여성의 입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가부장제는 이런 남성에게 정당한 핑계를 부여한다. 남편에게는 강력한 명분이 있다. 시부모가 원한다는 것. 시가에서는 아들보다도 며느리의 효도를 바란다. 정확히 말하면, 며느리의 노동을 아들의 효로 치환한다. 그래서 변함없이 이들은 효자다. 아내를 착취하여 대리효도를 하는 것조차 남성의 덕이 된다. 이 사회는 언제나 남성에게만은 참으로 관대하다.
아내의 노동으로만 가능한 효
대리효도의 나쁜 점은 아내를 갈아 넣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아내의 시간과 노력, 감정노동이 있어야만 아들의 대리효도가 가능해진다. 부모와 자주 만나고 연락하고 같이 여행을 가고 생일상을 차리고 명절에 오래 시간을 보내는 이런 ‘효도항목’에 아내의 노동이 들어가지 않는 게 있나. 만약 아내는 참여하지 않은 채 위 목록을 남편 혼자 수행한다면, 그래도 그는 효자라고 불릴지 궁금해진다.
아내가 대리효도를 거부하면 그때부터 시가와 갈등이 시작된다. 이때 남자에게 가장 쉽고 깔끔한 해결책은 아내가 모든 걸 시부모에게 맞추는 것이다. 그래야 본인에게 불똥이 튀지 않고, 중간에서 힘들여 조정할 필요도 없다. 부모에게도 면이 서고, 아내를 휘어잡지 못한 약해빠진(좋은 말로 해도 팔불출인)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다. 효도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가부장의 자존심도 세우고, 그러면서도 본인 심신이 매우 안락할 테니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당신이 이번만 참아줘, 이해해줘.”라는 말은 이러한 경위로 나온다. 어느새 화자가 간곡히 부탁하는 위치에 서고, 상대는 거절하면 비정한 사람이 되는 교묘한 화법이다. ‘너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하다’와 같은 말. 여기에는 권력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강자에게는 누구도 감히 참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아내가 참아주고 이해해주는 한, 남자는 이득만 볼 뿐, 어떠한 손해도 입지 않는다.
그리하여 남자가 효자라서 아내를 힘들게 한다는 것은 부모와 아내 사이를 조율할 의지가 없음을 뜻한다. 며느리로서 기대되는 부당한 요구들에 대해 부당하다는 인식이 없으며, 설령 있더라도 본인이 부모와 논쟁하고 부모를 설득할 생각까진 없다. 부모에게는 착한 아들인 척, 아내에게는 효자인 것처럼 굴지만 실상 자신의 원가족과 새로운 가정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게으름과 이기심, 이것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효의 실체다.
효자는 없다
남성이 가부장제적 효도를 수행함으로써 의도하든 아니든 얻는 게 있다. 새로 꾸린 가정에서의 굳건한 가부장제가 그것이다. 남편 쪽 가족의 가부장제에 아내를 편입시키고 굴종하게 만듦으로써 새 가정에서도 물 흐르듯이 가부장제적 가치를 이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가부장제의 최대 수혜자는 언제나 가부장, 바로 남자 자신이다. 아내는 시부모에게 맞추고 배려하고 희생하면서 동시에 남편에게도 맞추고 배려하고 희생하게 된다. 대단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번만 우리 부모님 좀 봐달라고 아내에게 요구하는 남자는 이미 아내가 그 자신을 참아주길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효가 부모를 위한다는 건 착각이지만, 만약 그렇다고 치자. 부모를 위해 아내를 고통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효가 있다면,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은 어디 있는가. 제 손으로 만든 가정을, 남자들이 늘 말하는 것처럼 ‘책임’진다는 게 정녕 이런 것인가.
이제 나는 안다. 시부모의 가부장제적 사고를 비판하는 나에게 “우리 부모님 욕하지 마요!”라 했던 과거 남편의 대응이 효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걸. 본인을 탓하는 것 같은 불편함, 문제해결에 대한 부담감, 책임회피를 원하는 비겁함이었음을. 나는 더 이상 남편을 효자라 하지 않는다. 결혼제도 안에서의 의미라면 효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사전적 의미라면 여기에 효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