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수리점 방문을 몇주째 미루다 온 참이었다. 기계를 잘 모르는 젊은 여자가 무시당하거나 바가지 쓰기에 딱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쪽에서 어떤 설명을 하든 나는 무얼 물어야 할지 모를 터였다. 내 대기번호가 불리고, 접수대에 다가가 백팩을 열었다. 백팩이 날 더 어려보이게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 시선 때문에 실용성과 편안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고장난 컴퓨터 하나 맡기는 데 참 신경쓸 게 많은 삶이다. “전원이 안 들어오는데요,”라 말하며 컴퓨터를 꺼내는 사이,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뭐가 안 되는데요?
중년남성의 퉁명스럽고 고압적인 말투가 날아왔다. 뭐가 안 되긴, 전원이 안 된다고 방금 말했고, 설명을 이어가려는 중이었다. 예상한 일이어도 기분이 상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화면이 어떻게 되는지, 인터넷 검색으로 어떤 조치를 취해봤는지 설명하는 도중, 남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 자는 미묘하게 달라진 태도로 물었다.
“결혼하셨어요?”
“네.”
“어려보이시는데...”
“동안이에요.”
그렇게 그 대화는 끝이 났는데, 나의 재치있는 대답 때문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의 존재를 알자마자, 그는 건조한 사무직 직원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이제 겉으로나마 나를 인간 대우 해주는 것에 나는 또 분개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남편을 존중하는 태도고, 나는 주인 있는 물건 취급을 당하는 것뿐이니까.
결혼해서 좋은 건 없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대답을 망설인다. 어디서부터 얼마만큼 말해야 할지, 상대를 보며 가늠한다. 좋은 점, 있습니다, 있는데, 그게 참 좋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안전
집수리가 필요할 때, 인터넷을 설치할 때, 이사견적을 낼 때, 그러니까 낯선 이의 집 방문이 불가피할 때마다 여성이 느껴야 하는 불안은 고스란히 여성 개인의 비용이다. 평일 낮에 여자 혼자 있는 집이라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거나 집 앞 골목과 계단, 도어락 앞에서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건 나의 에너지를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곳에 소모해야 한다는 억울함까지 동반한다. 이 사회가 여성에게 안전한 곳을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아니, 애초에 그럴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국가에서 지불했어야 할 비용(교육, 치안, 처벌 등)을 여성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 공포, 분노, 슬픔이 대체한다.
남편 회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오래된 빌라에서 살던 때, 우리가 사용했던 저렴한 인터넷은 속도가 엉망이었다. 더러 아무 이유 없이 와이파이를 쓸 수 없었다. A/S를 받기로 한 날, 나는 비좁은 집에 남성 수리기사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고, 시간 맞춰 남편이 집에 들르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시간 훨씬 전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사님이 곧 도착한다는데 내가 하던 일이 있어서 바로 못 갈 것 같다’고, ‘그래서 집 비밀번호를 알려줬으니 당신은 그냥 나와있으라’는 말에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럼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내가 집을 나선 후에 비밀번호를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나는 다급히 현관문의 보조장치를 잠그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다 결국 수리기사와 집 문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린 순간, 평소에도 귀갓길의 뒤통수가 서늘하던 복잡하고도 고요한 빌라촌의 현관에서 나는 깨달았다. 남편은 내가 아무리 설명하고 이해시켜도 영영 알지 못할 감각이 있구나. 머릿 속에 ‘이러이러한 상황에서 아내는 두려울 수 있다’는 걸 입력해 놓아도 저 구석진 곳의 공포까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구나. 그리 다정한 남자가 이리 무심할 수 있구나.
집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의 귀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면서 나는 우리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들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생생한 장면 속에서 내가 실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성공한다 해도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를 대처법들을 강구한다. 그리고 끝은 늘 무력하다. 내 안전을 남편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 절망스럽다.
결혼 후 나는 남편의 존재로 반쪽짜리 안전을 획득했다. 비록 남편이 곁에 있을 때만 온전히 발휘되는 반쪽짜리지만, 그마저도 내게 요긴하고, 그래서 슬프다. 남편과 같이 있는 나는 배달음식도 시켜먹고, 밤늦게 귀가할 수도 있지만, 바꿔 말하면, 혼자인 나는 몇 초 더 긴 눈맞춤, 주춤대는 몸동작이 풍기는 불안을 견뎌야 한다. 에어컨 설치 일정을 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으로 애써 맞추고 있노라면, 나는 마치 한 인간의 몫을 해내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내가 너무도 취약하고 모자란 존재로 느껴진다. 남편은 절대 느낄 일 없을, 자기부정적이고 소모적인 감정들.
원래 여성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 같은 사회의 일원이라면 동등하게 지급받아야 하는 것, 그러나 남성에게만 주어지고 여성은 빼앗기는 것, 안전. 그걸 결혼을 통해야 부분적으로 획득할 수 있도록, 남성의 품에 안기면 해결되도록(하지만 그 남성이 그 여성에게 안전할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 사회의 안전과 치안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경제력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내게 나를 지키려는 방어기제다. 예전엔 이런 회피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 애썼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내 일부로 인정하고 상대와의 관계에 해를 끼치지 않는 수준으로 관리하는 데 만족한다. 그래서 먼 미래뿐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혼할 경우까지 염두에 두는 건 현재 결혼생활 만족도와 큰 상관이 없다. 아직은 계산이 복잡하지 않다.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은 대출이고 월세를 내고 있으니, 이 집이 사라지면 보증금도 월세도 사라지는 것이고, 결혼 후 생긴 엄청난 저축이나 이렇다할 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후 처리래봤자 집안 물건들만 적절히 나누는 것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주거 문제로 걱정이 많던 어느 날, 우리는 남편의 청약저축에 납입하는 금액을 매달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늘리기로 결정하였다. 공공 임대든 분양이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가산점 경쟁이 치열하지만, 그게 유일한 대안이라서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야 했다. 그런데 가만, 내 청약저축은 매달 2만원인데. 지금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내 몫의 금액까지 늘릴 수는 없고, 금액을 나누는 건 당첨에 불리하니까 최대한 한 쪽에 모는 게 맞겠지만,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그러고보니 대출은 누구 이름으로 받아 꼬박꼬박 이자를 갚고 있는지, 신용카드는 전월 실적을 맞추기 위해 누구 것을 몰아서 써주는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누구 신용등급이 올라가는 중인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현재 혹은 미래 소득이 많다는 이유로, 아니면 그저 관습적으로, 경제적 문제에 있어서 남성을 대표로 내세우는 건 그만큼 여성을 주변적 위치로 내모는 것 아닌가. 그로 인해 남성이 획득하는 유무형의 자산은 과연 얼만큼일까. 이렇게 일상에 녹아들어 흔적없이 사라지지만 분명한 경제력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들을, 이별하는 순간 우리가 정말 나눌 수 있을까.
이때 나는 가정경제가 남편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과정이 무척 자연스러웠다는 데 새삼 놀랐는데, 여기에는 남편의 생애 소득이 나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많을 것이라는 ‘합리적’ 예측이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상상하는 것이다. 내가 회사에서 처음 발령받은 부서가 남성 15명에 여성 2명으로 구성된 곳이 아니라, 여성 15명에 남성 2명인 팀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내가 관찰할 수 있는 롤모델이 월등하게 뛰어난 능력을 갖추거나 존재감 없이 버티는 단 두 종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상사가 나를 여자로 보거나 성희롱하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가끔 생각한다. 사장부터 모든 임원진이 여성이고, 어느 회사에 가도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였다면. 결혼한 남성은 희귀하지만, 결혼하고 애가 둘씩 있는 여성은 대우받는 조직문화였다면. 그 많은 여성들과 어울려 일하고, 출근해서 당연한 듯 책상에 가방을 놓으며 그 자리가 내 자리라는 걸 어떤 부적절감도 불편함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내 커리어는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까. 그런 사회에서 남편의 커리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남편이 버는 돈을 함께 쓰는 데에는 분명 편안한 점이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서 경제력을 빼앗는 다양한 사회적 장치들이 없다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기회와 평가로 임금노동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남성의 경제력을 나눠 쓸 수 있어서 결혼이 좋다고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딸의 학업에 덜 투자하는 가정환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취업 시 불이익, 조직 내 성폭력과 정의롭지 않은 해결, 남성연대문화로 인한 배제, 여성의 결혼/출산/육아에 대한 차별, 가사와 육아노동의 여성책임의식 및 경제적 가치폄하를 포함하는 남성중심사회가 남성은 점점 더 부유하게, 여성은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든다. 그렇게 여성의 자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여성을 결혼에 종속시킨다.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 이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경제력을 의존한다는 건 내 삶을 저당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행동반경, 개인의 자유와 독립은 자주 돈에 의해 좌우된다. 나는 결혼이 아니어도 여성이 자립할 수 있고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동일능력 동일커리어가 보장되는 사회가 절실하다. 그래서 여성이 원할 때 결혼하고, 원할 때 이혼하고, 원할 때 원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고, 원하면 혼자서, 혹은 원하는 사람과 아이를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외 실질적 혜택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기혼은 기득권이 맞다. 여자와 남자의 결합은 현재 국가와 사회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가족제도다. 둘씩 짝지어 결혼을 하고, 그 사이에서 아이를 낳길 바라는 국가는 기혼에게 배타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전세자금대출의 한도를 높이고, 이자율을 낮추고, 임대 및 분양 주택에 신혼부부를 높은 비율로 할당하는 주거 복지 외에도 재산 분할 및 상속의 권리, 세제 혜택, 의료 의사결정권, 공공보험에 배우자를 포함하는 일까지, 기혼에 대한 제도적 혜택은 광범위하고도 정밀하다. 생애과제를 수행했다는 사회적 인정과 같은 인식적 혜택을 뒤로 하더라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결혼제도 안에서 내가 가장 안심하는 부분은 내가 선택한 사람이 나의 법적 보호자가 된다는 점이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내가 아플 때 수술동의서에 서명하고, 중환자실에 출입하고, 장례를 치른다는 것. 내가 의사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의 의사를 가장 잘 알아줄 사람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확신에 나는 안도한다. 우리가 운명공동체라는 사실 또한 가끔 위로가 된다. 내 일을 내 일처럼 여겨주는 이의 존재도 무척 소중하지만, 내 일이 바로 네 일인 사람과 함께 통과하는 삶은 외로움을 한결 덜어준다.
결혼제도가 아니어도
결혼해서 얻는 것, 위 목록을 짚어보며 나는 오랜 의문에 대한 한 가지 힌트를 얻는다. 여성착취의 긴 역사를 돌아보며, 여성들은 이토록 불리한 환경을 왜 견뎌온 것인지 의문을 품곤 했다. 적어도 가부장적 결혼제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답을 얻은 것 같다. 지금 이 사회는 안전과 경제력을 포함하여 여성이 결혼을 통해 얻는 이점들을 볼모로 잡고 있는 모양새다. 애초에 여성에게 삶과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을 박탈해놓고, 그것들을 줄 테니 결혼하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렇게 여성이 부당함을 견디게끔, 결혼제도로 걸어들어가게끔 사회제도가 설계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반드시 결혼을 통해야만 하는 건가. 결혼제도가 여성에게 매우 부당함은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 말해온 바다. 우리는 결혼제도 없이도 법적, 사회적 안전망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 성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안정된 주거 환경을 갖고, 성별에 따라 임금 차별 받지 않고, 여자 혼자서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질문은 이어진다. 법적 보호자이자 운명을 나누는 삶의 파트너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지 않나. 반드시 여성 1명, 남성 1명의 이성애자 커플이 아니더라도, 혹은 로맨틱하거나 섹슈얼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꼭 둘씩 짝짓지 않더라도,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법적 보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 국가의 복지 혜택을 받는 범위 안에 들어가는 것. 누구나 ‘정상’가족이 될 수 있는 것. 이런 사회라면 여성이 가부장적 결혼제도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