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부가 있다. 둘은 모두 직장을 가지고 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여자는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한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재료와 자신 및 가족의 입맛, 그리고 건강을 고려해 메뉴를 정했다. 샐러드와 크림 파스타. 집에 가는 길에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 마트에 들러 샐러드에 넣을 방울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 그리고 맥주를 사 가지고 오라고 한다. 맥주는 남편이 좋아하는 걸로 고르라는 말도 남겼다. 여자는 집에 도착해 요리를 시작한다. 여자가 요리를 거의 마칠 때 즈음 남자가 도착했다. 여자는 남자가 사 온 방울토마토와 치즈로 요리를 마무리한다. 여자는 또 남자에게 미리 준비해 둔 접시와 포크, 나이프 등을 가리키며 식탁을 차려 달라고 한다. 그렇게 맥주를 곁들인 식사가 끝이 나고 설거지는 남자의 차례이다. 남자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여자는 아침에 설거지를 해 두었던 접시를 다시 찬장 속 제자리로 넣어 정리한다.
이 부부 중 더 많은 노동을 한 것은 누구일까? 여자는 요리를 했고 남자는 장을 보았다. 이후 남자는 상차림과 설거지를 했고 여자는 뒷 정리를 담당했다. 대략 비슷한 양의 일을 한 것 같다. 그럼 이것으로 이 부부는 가사노동을 제대로 분담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답은 ‘아니다’이다.
정신적 가사 노동
우리는 ‘물리적’ 노동은 빼놓지 않고 계산했지만, ‘정신적’ 노동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는 퇴근시간이 다 되어 가면서부터 오늘의 저녁 메뉴를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족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건강을 위해 어떤 것이 좋을지를 감안해 메뉴를 정하고 나서는 집에 남아 있는 재료는 무엇인지, 그래서 어떤 것을 더 사야 할지까지 계산해 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필요한 식재료에 대해 확실히 전달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남편이 돌아올 시간을 대강이나마 맞추어 요리를 시작했으며, 식사에 필요한 종류의 식기와 수저가 무엇인지도 준비해 두었다. 또한 식사를 마친 후에는 설거지를 마친 그릇과 접시 등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여자는 어디에 어떤 식기가 있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다.
이런 것들을 ‘정신적 가사 노동’이라 한다. 말 그대로 계획하고 관리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해당 일의 제반사항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회사로 말하자면 관리자 급이나 맡을 일들을 위에서 예로 든 가정에서는 여자가 담당하고 있다. 저녁 한 끼를 위하여 가족의 입맛, 건강 상태, 가정의 재정 상태, 가정 내 구비되어 있는 물품 등 모든 것을 감안하여 결정을 내리고 시행 및 관리했다. 여기에서 남자는 그저 시킨 대로 하는 직원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집안에서는 부장님이나 과장님이 평사원이 하는 일까지도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실질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 결국 이 부부 사이에는 가사 노동에 대한 엄청난 불균형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정신적 가사 노동’이라는 용어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84년의 일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모니크 헤코(Monique Haicault)가 1984년, 학술지 <노동사회학 (Sociologie du travail)>에 기고한 논문에서 소개했지만 안타깝게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아마도 당시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물리적’ 가사 노동의 불균형이라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가 가사노동 중 ‘정신적’ 노동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5월부터였다.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인 엠마(Emma)가 소셜네트워크에 ‘물어보지 그랬어(fallait demander)’라는 제목의 웹툰을 올린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제 프랑스에서 이 ‘정신적 가사 노동(charge mentale ménagère)’라는 용어는 더 이상 생소한 것이 아니다.
정신적 가사노동의
실재를 인정하라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가정의 성평등이 실현되었다거나 그에 가까워져 간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이상과는 꽤나 먼 곳에 있다. 프랑스 통계청에 의하면 2010년, 프랑스에서 여성의 가사 노동 시간은 평균 일주일에 세 시간 26분이었다. 남성의 경우는 두 시간으로 여성이 집안일로 보내는 시간이 약 1.5배 더 많았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는 그저 물리적 노동만을 대상으로 한 수치에 불과하다. 실제로 설문에 응한 여성 중 38%가 남편이나 동거인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 그 일을 얼마나 잘 해내는지 지켜본다고 답했다. 결국 프랑스 여성의 가사 노동 분담은 통계 속 수치보다 더욱 높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아직 프랑스 통계청에서 이후의 조사 결과를 내어 놓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8년 동안 프랑스 가사 노동에서 특별히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프랑스에서도 이러할진대, OECD 국가 중 물리적 가사 노동마저도 성별 불균형의 정도가 가장 높은 한국에서 ‘정신적 가사 노동’을 논하기에는 아직은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계속해서 명절 증후군과 명절 후 가파르게 높아지는 이혼율이 주요 사안으로 떠오르는 현실을 생각할 때, 한국에서도 이 ‘정신적 가사 노동’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더더욱 시급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