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싱크대를 향해 행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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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싱크대를 향해 행진하기

유의미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바로 가사노동이다. 물 한 잔만 마셔도 컵을 씻어야 한다. 음식을 배달시켜 먹어도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내 컵까지 씻고 내 쓰레기까지 버려야 한다. 컵이 저절로 싱크대에 들어가 씻는다거나 쓰레기가 제 발로 현관 밖으로 걸어나가는 일은 없으니까. 오늘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어제 저녁에 먹고 식탁 위에 올려둔 치킨 뼈를 치웠고, 콜라병을 납작하게 눌러 봉투에 넣었다. 아침에 마신 주스 컵과 시리얼 그릇을 설거지하고 속옷과 수건을 빨아 널었다. 냉장고에 있던 날짜 지난 요구르트와 반쯤 남은 케이크를 버렸다. 밥을 새로 하고 즉석 짜장 소스를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먹기도 대충 먹고 청소도 대충 하며 최소한의 것들만 하고 사는데도 퇴근하고 두 시간 정도는 훌쩍 간다. 저녁 먹은 그릇도 아직 안 씻었는데 말이다.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고 살고 싶었다. 

내 삶의 어떤 영역에서는 그런 게 가능했다. 수업을 가기 싫으면 결석하고 과제를 내기 싫으면 안 내면 그만이었다. 그 결과를 내가 책임지면 되는 거다. 독립 초기에는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눈 딱 감고 미루며 살았다. 내 첫 자취방을 떠올리면 여전히 코끝에 담배 찌든 내가 맴돈다. 그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환기를 제대로 시키지 않아 내 모든 옷에서는 언제나 담배 냄새가 났다. 세탁한 옷과 세탁할 옷이 뒤섞여 늘 두더지처럼 옷을 파헤치며 입을 옷을 골라 꺼내 입었고, 수건이 없을 때면 주변에 손에 잡히는 티셔츠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일주일 전 라면을 끓여 먹고 국물도 안 버린 냄비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도 냄새가 나서 무심코 냄비를 열었다가 처음 만나는 끔찍한 광경을 봤다. 더는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할 수가 없었다. 무엇도 저절로는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 냄비는 거기에 있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걸 갖다 버려야 할 사람은 오직 나였다. 눈을 가려도 코를 막아도 곰팡이와 구더기는 내가 갖다 버리지 않는 한 거기에 존재한다.

사실 가사노동은 원래 저절로 어떻게 되지 않는다. 

나는 그동안 가사노동을 피하려고만 했다. 주부들의 노동이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내 문제라는 생각은 안 했다. 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고, 가사노동을 독박 쓸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여자애 방이 이게 뭐니.’ ‘이래서 어떻게 시집가려고 그래.’ 같은 말들이 날 설득할 수 없었던 건 물론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별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일단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하는 건 탈락인데, 그 대안으로 제시할 어떤 미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남들의 반대로 하는 것에 그쳤다. 다들 결혼을 하거나 집을 사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은다면, 나는 그런 미래를 꿈꾸지 않으니까 돈을 안 모아도 되겠거니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내 입장은 늘 ‘남편 내조할 것도 아니고, 가정을 꾸릴 생각도 가능성도 없으니 가사노동은 안 배워도 되겠네’였다.

어떤 일이든 안 하던 사람이 하면 어려운 법이다. 처음에 요리를 했을 땐 만져본 적도 없는 칼을 사용하는 게 너무 무서웠다. 켜본 적 없는 가스레인지를 켜는 일도 그랬다. 가스레인지를 처음 켜면 불이 잘 들어오지 않고 가스 냄새만 나는 몇 초가 있다.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싶어 그게 그렇게 무서웠다. 요리하는 모습을 옆에서 본 적이 없으니 어디 흉내도 낼 수가 없었고, 어떤 요리에 대충 뭐가 들어가는지조차도 몰랐다. 카레 먹을 때 당근을 골라내고 김밥 먹을 때 오이를 골라내니까 그런 건 알지만, 싫어하는 재료만 알면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사는 일부터가 미션이었다. 펜이나 책 같은 물건만 사봤지 양파나 감자처럼 형태가 불안정한 물체를 사본 적이 없었다. 흙도 묻어있고, 털도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면 되는 건지, 그럼 가방에 이걸 넣고 집에 가져가야 하는 건지부터 고민이 되었다. 그리고 한 개를 사면 몇 인분을 요리할 수 있는 건지 가격이 대충 얼마인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물론 인터넷에 검색하면 되지만 검색도 뭘 좀 알아야 할 수 있는 거다. 채소의 이름을 알아야 하고, 먹고 싶고 만들고 싶으면서 가능해 보이는 요리의 이름이라도 알아야 한다. 뭐가 좀 쉬운지 알아야 뭐부터 시작할지 아는데, 레시피도 각양각색이고 내 눈엔 다 어려워 보였다.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니까 뭘 검색할지조차 모르는데 언제 하나하나 다 검색하나 싶어 막막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청소도 똑같다. 청소를 처음 하는 사람은 검색할수록 미궁으로 빠진다. 사람들이 팁을 줄수록 처음부터 기본이 안된 나를 혼란으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에 못 따라간 수업을 평생 못 따라가는 것과 똑같다. 욕실 세제, 주방 세제, 세탁 세제 등 세제의 종류도 많은데 다 사야 하는지, 그럼 욕실이나 주방을 제외한 그냥 방은 뭐로 닦아야 하는지, 락스 같은 건 위험해서 만지면 안 된다던데 만지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청소를 하는지 같은 문제 말이다. 어떤 글에서는 베이킹소다와 구연산을 사용하라고 하고, 어떤 글에서는 그걸 사용하면 안 되는 곳을 알려주고, 섞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섞지 말라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뭘 잘못 알고 청소를 하다가는 더 더러워질 것 같았다. 애초에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고려한 정보는 흔하지 않고, 일은 서툴면 서툴수록 어렵다. 그릇을 물에 담가놓는 걸 몰라서 매번 힘들게 손톱으로 밥풀을 떼어야 하고, 숟가락을 씻다가 옷에 물이 다 튀는 사람에게 ‘막간을 이용해’ 설거지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사실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하면 배울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잘 못 하는 분야를 탐구하는 일은 자괴감과 마주하게 만든다. 이미 뒤처진 분야라면 일단 외면하고 싶었다.

양파가 동그랗게 잘려서 슬펐거든요

다른 일로 심리 상담을 받던 어느 날, 나는 지나가는 말로 양파가 동그랗게 잘려서 슬픈 이야기를 했다. 무슨 레시피를 보다가 거기엔 양파가 길쭉하게 잘려 있는데 내가 하면 계속 동그랗게만 잘렸던 것이다. 거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가사 노동이 보이지 않아서 진짜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에 많은 시간을 쏟는 게 아까웠다. 과제도 해야 하고 팀플도 해야 하고, 심지어 나는 성명서도 쓰고 피켓도 만들어야 해서 가사노동을 할 시간이 없었다. 가사노동은 수많은 급하고 중요한 커다란 일들에 밀려 저 끝에 있었고, 그 와중에 빨래나 청소가 급해서 하고 있으면 괜히 불안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텐데 나만 집안일 따위를 하면서 시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랐다. 늘 학교 공부를 일등 하는 자랑스러운 딸이어서, 실내화라도 빨려고 하면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등 떠밀렸다. ‘너는 그럴 시간에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게 도와주는 거야.’ 나만 많이 들어본 대사는 아닐 것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살던 집에서 설거지도 해본 적이 없고, ‘그럴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박혀있었다. 정확한 대화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상담 선생님이 말했다.

나를 돌보는 노동이 그렇게 꼭 시간 낭비만은 아니에요.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는 말의 그런 근거를 처음 들어봤다. 그리고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내 입에 들어갈 음식을 내가 만들고, 내 몸에 닿을 옷을 내가 세탁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심지어 즐거운 일이었다. 그건 내 오랜 고민의 열쇠가 되었다. 당시 삶은 내 뜻과 관계없이 흘러가고 나는 그냥 떠밀리고 있으며, 그래서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의욕도 없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인생 내내 떠밀려왔고 또 앞으로도 평생 떠밀려갈 생각에 그렇게 사는 건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몰랐다. 나는 평생 바빴고 스케줄러가 꽉 차서 정신이 없었고 제발 잠을 좀 자고 싶었다. 대학에 들어가고도 취업을 하고도 바쁜 건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빨리 관에 들어가 관 뚜껑 덮고 평생 자고 싶었다. 인생은 단거리 달리기인 척해놓고 마라톤이었다. 처음부터 마라톤이라고 말해줬으면 페이스 조절을 했을 텐데, 조금 뒤면 결승선이라고 해서 전속력으로 달렸더니 세상은 ‘어, 미안. 한 바퀴 더 남았네.’ 하는 거다. 그럼 뭐해? 난 이미 체력을 소진했다. 그렇다고 더는 못 뛰겠다고 할 용기는 당연히 없었다. 난 지쳐있었지만, 끝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할 용기가 없어서 그랬다. 그런 나에게 가사노동은 ‘뭐가 됐든 다 때려치울래!’가 아니라 ‘잠시 물 좀 마시고 올게요.’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서운데 무엇도 열심히 하기는 싫고 일단 가사노동을 해보기로 했다. 그건 도망치지를 못해서 도망치지도 못하는 나에게도 덜 부담스러운 탈출구였다.

내 삶의 기본인 의식주를 내가 결정하는 일은 열정의 빌미가 되었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그런 약간의 통제감이었다. 사실 한순간의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나는 서툴렀고 더러운 집안을 감당하지 못해 울고 집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밖으로만 나돌고 하던 시간을 꽤 더 보냈다. 그러나 긴 시간을 두고 변해온 지금, 예전을 돌아보면 꽤 드라마틱하다. 늘 외박하고 늦게까지 술 먹고 아침엔 컵라면으로 해장하던 예전과, 집에 꼬박꼬박 들어가고 더러워지기 전에 청소하며 먹을 것도 미리미리 사놔서 굶지 않는 지금은 내가 느끼기에 매우 다르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부드럽게 진행되니까 특별한 불편함 없이 내 삶이 예측할 수 있고 딱딱 맞아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청소를 해두니까 집에서 생산적인 일도 할 수가 있다. 과제나 일을 할 때 카페를 전전하지 않고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게 좋고, 더는 집에 있는 게 책상인지 밥상인지 쓰레기통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아니니까 책도 읽고 일기도 쓸 수 있다. 옷도 깨끗하게 빨아 입으면 외출할 때 기분도 괜찮다. 삶에 맞고 틀린 건 없지만 난 이런 삶이 편하고 좋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이제는 노동 중에 가사노동을 제일 좋아한다. 일단 기준을 내가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시킨 대로 이유도 모른 채 비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에 지쳤다. 얼마만큼 할지 어떤 방식으로 할지 직접 정하면 적어도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고 적절한 만큼씩 지치지 않을 정도로 할 수 있다. 그동안 무언가를 이런 방식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삶에는 늘 죽기 살기로 미친 듯이 해야 하는 일들만 있었고, 난 늘 의지와 열정이 없고 노력이 부족해서 원하는 바에 가 닿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건 달랐다. 내가 사는 곳과 내 삶을 원하는 만큼 가꾸고 정돈하는 일이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는 오직 과거의 나와 비교하면 되고, 무리한 요구는 나 자신과 타협하여 바꾸면 된다. 당연히 가사노동은 나의 안위를 돌보는 일이기에 엄청나게 무리해서도 안 된다. 무리하면 내가 병들어 버릴 테고 그건 목표에 어긋나는 일이다. 즉, 무리하지 않을 것이 대놓고 요구된다. 나는 내가 잘하고 있는지 측정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무리하지 않는지 체크해야 한다. 그동안의 내 방식과 완전히 반대였고, 난 그게 완전히 마음에 들었다.

다음으로 가사노동의 결과는 온전히 내가 누린다. 남의 가사노동을 대신해준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나는 혼자 사니까 음식을 해서 맛있어도 내가 좋고, 집이 깨끗해져도 내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한 일에 즉각적으로 기쁠 수 있고, 내가 잘할수록 그 기쁨이 커진다. 노력이 만족에 직결된다. 살면서 이렇게나 공정하고 이치에 맞는 일은 별로 없었다. 밤새 열심히 공부했지만, 카페인을 쏟아부은 뇌가 버티지 못해 시험을 망치거나, 조원들이 모두 힘을 합쳐 열심히 했지만, 발표자가 발표를 엉망으로 한다거나 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회사는 더했다. 팀원들이 모두 열심히 준비하든 말든 세부사항을 알지도 못하는 상사는 근거도 없이 느낌으로 컨펌을 냈다. 열심히 했다고 통과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해도 오히려 통과되기도 했다. 세상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돌아갔다. 오직 내 집만을 제외하고! 내 집은 오직 나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에 따라 정확히 만족을 도출할 수가 있는 완벽한 곳이었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조금 더 확실히 행복해질 수가 있었다. 창틀을 닦아 깨끗해진 게 아무에게도 티 나지 않아도 좋았다. 내가 그 사실을 알면 되었고, 단지 내 마음에 들 때까지 깨끗이 닦을 수 있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보여주기식으로 성과를 포장하는 건 더는 필요 없었다.

드디어 삶을 잘 산다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도 연관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반짝반짝 깨끗한 집을 우선으로 둘 것이고, 누군가는 필요한 물건이 떨어지지 않게 관리하는 걸 중시할 것이고, 누군가는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나에게 중요한 건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찾아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집안일의 체계를 잡을 수가 있었다. 비누를 살지 천연세제를 살지, 간편식을 주문할지 식재료를 주문할지, 막대 걸레로 좀 더 편리하게 청소를 할지 힘들어도 꼼꼼하게 손걸레로 닦을지, 오늘은 환기를 시킬지 실내 온도를 유지할지 하나하나 결정하는 과정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나에게 적절한 균형은 어디쯤인지 계속 스스로 물어봐야 했다. 그렇게 균형을 잡으면서 나를 잘 돌볼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나를 잘 돌보면서 막연한 불안감이 훨씬 줄어들었다. 처음부터 애인도 부모도 아닌 꼭 내가 해야만 했던 일이다. 나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는 이제 원하는 걸 더 잘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관계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내 삶이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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