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있는 자리에 오른 여성을 보면 나는 자연히 그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을지 상상한다. 그리고 이어서 생각한다.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지금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었을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방송에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일부분을 편집한 44초의 짧은 영상은 이렇게 시작했다. “여성이라고 자꾸 안보 의식이 없다, 대북관이 없다 하는데 사실..” 뒷부분은 예상할 수 있듯이 강경화 장관의 안보 의식이 없을 수 없는 커리어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슴을 치게 만드는 말. “제가 남자였으면, 남자가 똑같은 프로필과 경험을 갖고 이 자리에 앉았을 때 계속 그 문제를 제기할까..” 검증된 커리어와 검증된 능력으로 정부의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이에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편견이 따라붙는다. 그것도 유치하게 ‘여자는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래’나 마찬가지인 비합리적인 악의. 영상은 그 후로 진행자의 무성의한 물음에 강 장관이 재치있게 응수하며 끝나지만 오래도록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다.
'여자치고는'
여성은 직장에서 개인으로 평가받기보다 여성으로 평가받는다. ‘여자라서’ 어떻고 ‘여자치고는’ 어떻고 ‘여자인데도’ 어떻고 저렇고 하는 익숙하고 지겨운 말들. 오로지 개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자유가 여성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무엇도 단순한 개성이 될 수 없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여성 전체의 특성에 재단당한다. 그리고 그건 덫이 된다.
여성은 꼼꼼하고 사려 깊고 부드럽게 소통할 줄 알며 모두를 고려한 의사결정을 하고 개개인의 사적인 일들도 살뜰히 챙기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살피고 조화롭다고 한다. 다 좋은 말처럼 보인다. 칭찬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여성적 리더십’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고 있다. 카리스마 있는 남성적 리더십에 대비되는 뜻이다. 남성적 리더십이 주도적이고 통제적이며 자신감 있고 공격적이고 모험심이 있으며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않은 채 불도저처럼 조직을 이끌고 팀원들의 감정적인 면을 돌보지 않는 것이라면, 여성적 리더십은 이른바 돌봄의 리더십이다.
직장에서 여성에게 돌봄의 언어를 붙이는 것의 부당함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여성적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여성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다. 여성이 여성적 리더십을 발휘하면 동료나 팀원에게 인간적으로 우호적인 평가를 받을 수는 있지만 유능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된다1. 그렇다면 여성이 남성적 리더십을 발휘하면 어떨까? 능력 있고 신뢰할 만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지만 그는 비호감이 된다. 여성이 ‘남성적’ 행동을 하는 것은 성역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1. 같은 리더 역할을 수행해도 여성과 남성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주도적인 여성 리더에게 자주 따라붙는 마녀나 독사와 같은 수식어들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남성은 남성적 리더십이든 여성적 리더십이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데 반해서 여성은 어떤 리더십 스타일을 취하더라도 비난받기 쉬운 불균형이 분하지 않을 수 없다1. 여성에게는 경쟁이 아니라 암투, 카리스마가 아니라 히스테리, 추진력이 아니라 독불장군, 야심이 아니라 욕심, 뚝심이 아니라 독하다, 리더십이 아니라 드세고 나댄다, 디테일을 챙긴다가 아니라 깐깐하고 사소한 데 집착한다는, 남성과는 분명히 다른 이중잣대가 사용되니까.
여성은 왜 두 배의 노력을 해야 하는가
그리하여 조직 내에서 여성은 모순된 특성들을 모두 갖추라는 요구를 받는다2. 흠 잡힐 데 없는 완벽한 상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이어야 하고 프로페셔널 하면서도 여전히 성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주도적으로 이끌면서도 섬세하게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 여성 개개인이 두세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부적절한 긴장과 감정노동을 요구하는 미션이다2. 이 불가능한 미션을 간혹 해내는 훌륭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여성만 지는 짐의 부당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나쁜 면은 따로 있다. 여성은 감정적이고 의존적이고 수동적이고 덜 유능하며 합리성이 부족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고 업무에 책임감이 없고 대범하지 못하고 위험 회피적이라 큰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공공연한 믿음. 고정관념은 내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해당되든 되지 않든 상관없이 위협이 된다.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은 자신의 행동 때문에 특정한 집단으로 분류되고 실망스러운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불안을 뜻한다3.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진행한 실험이 있다4. 참가자들에게 의사결정 과제를 낸 후, 그룹을 나누어 서로 다른 메시지를 주었다. 절반에게는 이 업무의 전임자가 여성이며 이상적인 담당자는 정형화된 여성적 특성-성장 독려, 이해, 직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는-을 갖춘 사람이라 말하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전임자가 남성이며 정형화된 남성적 특성-적극적, 자신만만, 성취 지향, 결단력-을 갖춘 사람을 이상적 담당자로 묘사했다. 고정관념에 노출된 실험 참가자들은 명백하게 영향을 받았다. ‘남성적’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은 여성은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특히 복잡한 결정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이 업무가 여성적인 것이라고 설명을 들은 여성이나 남성은 모두 좋은 성과를 낸 것과 상반되는 결과다. <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의 저자 터리스 휴스턴은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부정적인 기대는 사람을 주저하게 만들고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다. 의심을 억제하려는 노력도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다. 여성이 무언가를 입증하기 위해 불안을 느낀다면 실제로 능력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쪽수의 힘
그렇다면 편견을 없앨 수 있을까? 직장에서 많은 여성 동료와 함께 일하는 남성은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나 행동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한다5. 편견이 쉽게 깨지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접촉을 증가시킴으로써 약화시킬 수는 있는 것이다. 이른바 ‘쪽수’는 편견의 당사자에게도 힘이 된다. 네 명으로 구성된 팀에서 여성이 한 명 뿐이고 누군가 여성은 남성만큼 능력이 없다고 말할 때 여성은 불안을 느꼈지만, 팀의 50% 이상이 여성일 때는 그런 말을 들어도 개의치 않았다는 연구가 있다6. 전체적인 조직문화 면에서도 성차별 문화가 낮을 수록 직원들이 리더를 평가할 때 그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7.
그런고로 직장에서 여성에 대한 부당한 고정관념을 없애고 여성의 수를 늘리고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고통을 감내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사자로서 고정관념으로 인한 불안을 줄이는 데 도움 되는 팁이 있다면3, 하나는 불안을 아는 것이다. 나의 불안이 나와 상관없는 고정관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불안을 인정하면 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다른 하나는 중요한 결정이나 업무를 앞두고 15분간 시간을 내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핵심 가치와 그것들이 중요한 이유를 적어보는 것이다. 단순한 쓰기 활동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꼬리표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니 한 번 시도해볼 만 하다.
국가의 장관조차도 피해갈 수 없을 만큼 젠더 고정관념의 힘은 강력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끊임없이 떠들고 설치자. 여성이 직장에서 돌봄을 잘한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짐이고, 능력이 없다는 인식은 여성과 남성을 다르게 보는 부당한 편견이라고. 그 고정관념 때문에 더욱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라고.
참고
1. 안미영, 김혜숙, 안상수 (2005). 적대적/온정적 성차별주의와 전제/민주방식의 여성지도자에 대한 평가.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19(2), 17-38.
2. 주희진 (2005). 성 고정관념이 기업 내 여성 관리자 평가에 미치는 영향. 여성학논집, 22(1), 115-149.
3. 터리스 휴스턴 (2017). 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 문예출판사.
4. Bergeron, D. M., Block, C. J., & Echtenkamp, A. (2006). Disabling the able: Stereotype threat and women's work performance. Human performance, 19(2), 133-158.
5. 원숙연 (2007). 조직 내 여성관리자에 대한 평가의 젠더화된 작동원리: 이론적 탐색. 한국여성학, 23(4), 151-175.
6. Hoyt, C. L., Johnson, S. K., Murphy, S. E., & Skinnell, K. H. (2010). The impact of blatant stereotype activation and group sex-composition on female leaders. The Leadership Quarterly, 21(5), 716-732.
7. 김혜숙, 윤소연 (2009). 여성 리더의 특성과 효율성: 조직의 성차별 문화의 영향. 한국심리학회: 사회 및 성격, 23(1), 3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