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원
같은 부문에 속한 옆 팀들과 다 같이 회식을 가면 나에게는 여자 선배가 두엇 더 생겼다. 물론 회식 자리에서 그들과 같이 있을 수는 없었다. 신입 ‘여’사원인 나의 자리는 그 모임에서 제일 높은 사람의 옆자리 혹은 앞자리에 배정되었으니까. 그래도 회식의 끝에는 여자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1차가 마무리될 즈음 그들은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나를 무리에서 빼냈다. 집에 보내주기 위해서였다. 과장님한테 잡혀 새벽까지 술을 마셔서 힘들어 죽겠다는 남자 동기들을 다음 날 아침에 마주할 게 눈에 선한 나는, 동기에 대한 미안함과 그럼에도 집에 갈 수 있다는 기쁨, 나를 챙겨주는 선배들에 대한 고마움, 동시에 여자라고 이렇게 열외가 되어도 괜찮은가 하는-매사 남자보다 뒤떨어지거나 기여도가 적음으로 인해 스스로 차별의 근거를 제공하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생긴-의문으로 약간은 복잡한 마음이 되어 귀가하곤 했다.
그런데 그저 술 마시고 당구 치러 간다는 2차, 3차에서 얼마를 쓰는지, 왜 그렇게 큰돈을 쓰는지 추측이 가능해지자 다른 의문이 생겼다. 1차가 끝나고 여자들이 다 같이 집에 가는 건 우리를 위한 걸까, 남자들을 위한 걸까? 우리가 빠져나오는 걸까, 빠져주는 걸까? 선배들의 힘으로 집에 일찍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어쩌면 남자들을 위한 배려였기 때문에 용인된 건 아닐까?
알탕 연대
이은아(1999)의 연구1에 따르면, 남성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 조건으로 성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남성만의 놀이문화를 통해 서로 공모자가 되는 과정에서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데, 이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성경험의 공유다. 남성들이 사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는 게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친밀감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 남성 놀이문화라는 것에는 성구매를 뜻하는 남자들만의 2차를 비롯하여,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만나는 모든 여성에 대해 성적 대상화하며 같이 낄낄거리는 것까지 포함될 것이다. 그러니까 남성 연대, 속된 말로 ‘알탕’ 연대는 이 연대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명확히 구분한다.
그날도 그렇게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집에 가던 중이었다. 강변북로를 갓 탔을 무렵, 갑자기 내 사수인 남자 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야, 어디야? 팀장님이 너 찾으신다!
집에 가고 있다는 말에 그는 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강변북로에 진입했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지금 당장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내가 계속 거절하자 그는 강한 명령조에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이럴 때 점수 따야 되는 거야. 너는 다른 여자들하고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지.
마지막 말은 아주 거슬렸지만 점수는 따고 싶었다. 정말 이게 점수 따는 방법이라면.
기사님, 다시 아까 거기로 가주세요.
2차 장소는 노래방이었다. 가게를 들어서는데 예상치 못하게 생소한 분위기였다. 실내는 어두컴컴했지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라는 게 단박에 느껴졌고 직원들은 머리에 토끼귀를 달고 있었다. 어리벙벙한 채 과장이 일러준 방을 찾아 들어갔다. 그 방에 토끼귀를 단 직원이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곳이 아주 어색했고 조금 위축되는 것 같기도 했다. 팀 사람들은 나를 딱히 반기지도, 반기지 않지도 않았다. 나를 부른 과장만 내가 자신의 말에 복종했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며 나를 팀장에게 들이밀 뿐이었다. 팀장은 내가 있어도 모르고 없어도 몰랐다.
낄 수가 없다
가부장제란 ‘물적 기반을 가진 일련의 사회적 관계로서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남성들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하게 하는 위계적 관계’라고 정의된다(Hartman, 1976; 박선영, 2004에서 재인용2). 그리고 거의 모든 직장에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남성들 사이의 유대감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여성은 그 과정에서 배제된다.
내가 회식 장소에 다시 돌아간 건 과장의 설득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 끼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었다. 집에 일찍 가는 걸 세상 무엇보다 좋아하는 나지만 회식한 다음 날이면 퀭한 눈으로 조용히 인터넷 검색만 하며 앉아있다가 자기들만 아는 눈빛과 인사말을 나누는 그 무리에 나도 들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 무리에 들고 싶어서 점심식사 후 담배 피우는 자리에 같이 서서 그토록 싫어하는 간접흡연을 견디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건네는 술잔을 주는 족족 받아마셔도 봤다. 무엇보다 남자 동기보다 뭐에서든 뒤처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게 무거운 파일 나르기든 눈알이 빠질 것 같은 반복 서류 작업이든 출퇴근 시간이든 말이다. 그래야 그곳에서 인정받고 그곳에 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성 네트워크에 들어가기 위해 무수히 많은 여성이 노력했을 것이다. 누구는 매번 술자리에 빠지지 않은 채 끝까지 남기도 하고 누구는 룸살롱에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여성성을 부정하고 남성성을 수용하기도 한다. 여성적 외모를 없애고 남성적 언어를 구사하며 여자답지 않으려 자신을 통제하고 점검한다. 나도 군대 다녀왔냐는 놀림을 들을 정도로 ‘다나까’ 말투에 집착한 적이 있다. 조직 내에서의 성취 기준은 남성성이고, 여성성은 사회적 능력과 정반대에 있다는 걸 배우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성 개인은 남성과 같음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여성 집단과 구별되기를 바라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과 여성 집단의 경험을 부정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놓인다1.
그러나 여성은 결코 남성과 같아질 수 없다. 아무리 ‘다나까’ 말투를 써도 어느 정도는 프로페셔널해 보일 수 있으나 나처럼 말하는 남성에게는 붙지 않는 ‘차갑고 무뚝뚝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자리에 있어도 나는 그 자리에 속하지 않았다.
다 이유가 있다
이 사회는 비공식적 인간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생활에서도 이러한 네트워크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네트워크의 힘은 단순히 인간관계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성취와 직결되어3 곧 ‘능력’을 만드는 데 있다. 비공식 네트워크라도 안의 사람이 바깥의 사람보다 공식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조직 내의 주류가 바로 남성 네트워크라는 사실이다. 공식 위계에서 정보와 결정권을 가진 남성들은 비공식 네트워크 안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이를 이용하여 공식적으로 또다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끼리만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실제적 효과를 내는데 혹시 효과가 없더라도 폐쇄된 정보의 존재만으로 네트워크의 결속을 다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1. 그렇게 다져진 결속력으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힘과 권력 그 자체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할수록, 우리끼리 똘똘 뭉칠수록 커지는 힘.
남성 네트워크가 주류라는 것은 그것이 곧 사회생활의 기준이고 조직의 문화가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다섯 번씩 카페에서 커피를 사 오거나 휴게실을 들락날락하며 토막잠을 청하는 건 안 되지만 하루에 다섯 번 담배를 피우는 건 용납된다. 담배는 남성에게만 허용된 문화고 담배 타임은 남성 네트워킹이 이루어지는 자리니까.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이유는 구성원 모두에게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은아(1999)1의 연구로 돌아가면, 연구자는 이렇게 분석한다.
선배는 사회적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지 않는 한, 자신의 후배가 기회와 자원배분에서 유리하도록 돕고 그 대가로 충성을 받는다. 후배는 충성을 다함으로써 불안정한 미래를 인맥에 의한 등용으로 보상받는다. 이는 개인적인 호의를 넘어선 절대적인 관계구조다. 서로 보호막을 형성하고 안정을 추구한다.
네트워크는 직접적으로 승진기회나 유리한 자원을 제공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감과 동기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간접적으로 성취감과 성장가능성, 그리고 직무만족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참고
1. 이은아 (1999). 기업내 남성 네트워크와 여성 배제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 박선영 (2004). 페미니즘 시각을 통한 여성PR실무자 인식조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3. 장필화, 조형 (1992). 한국의 성문화 -남성 성문화를 중심으로. 여성학논집, 8, 127-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