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생활일지 7. 생활동반자법은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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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생활일지 7. 생활동반자법은 시대정신

백희원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보스턴피플의 탄생

때로 직관이 먼저 일을 한다. 슬슬 2018년이라는 말이 입에 붙기 시작하던 늦겨울에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었다.

그리고 한 달 뒤에는 그 아래 이런 문장을 덧붙였다.

이 두 문장으로 인해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여성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멤버를 중심으로 다섯 명이 모여 ‘보스턴피플’팀을 만들었다. 보스턴피플이라는 이름은 회원 김주온이 19세기 미국에서 함께 사는 여성들의 관계를 “보스턴결혼”이라고 불렀던 데에서 따와 지었다. 막상 주온은 빼고 네 사람이 만나 봄에 맛있는 식사를 하며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그 전에 긴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여성 간의 동거생활이라는 소재가 금세 우리를 연결시켜주었다. 동반생활의 일반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삶이 미래로 무탈히 이어질 것 같은 안정감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 후 우리는 매달 만나서 아래와 같은 활동들을 차례대로 해나갔다. 

  •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스터디와 워크숍
  • MEAL 프레임워크를 활용한 활동 전략 도출 “2020년 생활동반자법 입법통과를 목표로”
  • 개인을 위한 가족과 기본소득 워크숍 공개 진행 @청년허브 N개의 공론장
  • 팟캐스트 ‘우리에겐 조금 먼 가족이 필요해’ 기획 및 녹음 (발행 준비 중)

2014년 진선미 의원이 생활동반자법 법안 발의를 시도한 뒤로 제도적인 차원의 논의는 없었지만 2016년 무렵 부터 다시 이를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례로 지난 해 말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동반자등록법을 요청하는 게시물에는 6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알려진 해외 사례들을 살펴보니 생활동반자법 입안에 꼭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시민연대협약(PACS) 제도처럼 국가에서 입안하고 성공적으로 주류화 된 제도도 있지만, 독일의 경우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은 구청에 혼인신고를 한다는 점을 활용해 자치구가 먼저 파트너십 증명제도를 도입했다. 첫 번째로 도입한 시부야구를 비롯해 일부 지역에서만 유효하지만 점차 확장되어 나가는 추세다.1) 

최근 한국에서의 유의미한 사건은 지난 9월 진선미 의원이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취임했다는 것이다. 진 장관은 취임식에서 변화된 가족 환경에 대응해 다양한 가족을 위한 정책적 기반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변화의 단위는 국가 뿐만이 아니다.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와 녹색당·정의당·장애여성공감·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참여연대 등은 <직장 내 ‘성소수자 가족’ 친화적 정책 만들기> 협약식을 맺기도 했다. 내 곁의 동료가 변하는 것이야말로 실질적인 환경의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모양의
생을 살 것인가

이런 사실들을 하나씩 알아가며 나는 동반생활일지의 연재를 시작했다. 매 글은 생활동반자법안의 필요성을 다루었지만 동시에 내 생애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을 던지기도 했다. ‘사랑의 맹세 대신 우정의 약속으로 가족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한국에 사는 여성에게 가족 안에서 착취와 싸우거나 가족 밖에서 소외당하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걸까?’, ‘나는 어떤 모양의 집에서 어떤 모양의 가족 관계로 살고 싶은가?’, ‘출산과 육아에 대해 비혼 여성으로서의 나는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전통적인 가족 밖에서 여성은 누구와 관계맺으며 어떻게 자신으로서 나이들어갈 수 있는가?’ 

개인을 위한 가족과 기본소득 워크숍을 진행중인 BIYN 회원 신아. 사진 임효진

이 과정은 가부장제 아래에서 주어진 선택지 대신 내 삶을 기준으로 스스로 선택지를 발명해내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관련 자료들을 찾아볼 수록 이미 가족구성권의 보장을 주장하는 ‘가족구성권연구소’, 여성생애주기를 연구하는 ‘옥희살롱’, 비혼여성 생활공동체 ‘비혼들의 비행’에서 운영하는‘비비 문화예술협동조합’, ‘언니 네트워크’와 같은 조직들이 존재하며 앞서 같은 질문을 이야기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 개인의 삶에서 길어낸 질문들이 공통의 것임을 확인하며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공통의 질문을 정책적으로 바라보면 곧 사회적 수요고, 법과 제도는 그에 맞춰 변화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시도 중인 이 일이 모두를 위해 실현되리라는 단단한 희망이 자리잡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여성들이 누구와 살고 싶은지, 어떤 형태의 삶을 꾸리고 싶은지를 제약없이 상상할 수 있었으면, 또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면 하고 더욱 바라게 되었다. 그런 세상을 조금 더 빨리 우리 앞으로 당겨오는 일을 나의 사랑하는 동거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여경’이 쓴 보스턴피플팀 두 번째 모임 후기 중)

개인과 사회를 연관짓는 방식의 발명

첫 머리에 적은 두 문장이 가진 개연성도 어느 새 명확해졌다. Girls can do anything은 역량에 대한 문구다. 역량이라고 하면 개인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역량은 자질과 기술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과 매칭될 때만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그리고 No one left behind는 포용적인 사회가 어떤 환경을 보장해야 하는 지에 대한 윤리적 원칙의 최저선을 제시하는 슬로건이다. 누구도 후순위로 밀려나지 않는 환경 위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은 무엇이든 해내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런 그림이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BIYN이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며 늘 말해온 것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개인이 자율적인 삶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사회안전판으로서의 기본소득. 이는 “개인과 사회를 연관 짓는 방법의 발명”2)이라는 질적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진 않겠지만, 기본소득은 노동과 소득의 고리를 끊고 다른 관계성으로 시장 혹은 사회와 관계 맺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위한 기본소득을 주제로 발표 중인 BIYN 회원 박유형(스밀라). 사진 임효진

그리고 가족의 모양을 들여다보는 일은 앞에 적었듯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양에 대한 개인적인 성찰인 동시에 이 사회가 누구에게 유리하게 조직화되어있고 어떻게 그것을 재생산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이성애 가부장제 4인가족 모델은 정규직 남성 중심의 노동시장과 그를 지원하는 사회안전망, 여성의 그림자노동과 연결되어 있다. 20년 전 IMF 사태 때 정규직 일자리가 사라지는 데 대한 한국사회의 대응은 일터의 여성들을 위기상황의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사회가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정부와 기업의 실책으로 인한 파괴의 상당부분은 개인들의 가정사 안에서 보이지 않는 희생들로 내밀하게 곪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요는, 사회와 가족은 연동되어 조직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노동시장과 소비시장, 공공섹터 역시 어떤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정규직의 시대는 정말 옛말이 되었고 급기야 프리랜서의 시대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고용형태 뿐 아니라 일의 방식도 리모트 근무, 프로젝트 베이스의 협업 등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소비는 점점 소유보다 경험에 가까운 것으로 변화한다. 행정은 실제로야 어쨌든 어쨌든 시민이 직접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거버넌스 모델을 구축하는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족은? 개인과 가족이 맺는 관계도 이런 사회에 부합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나? 새로운 노동에 걸맞는 새로운 고용보험 제도(혹은 기본소득)가 필요하듯, 새로운 가족을 인정하는 법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언론에서 연일 다루는 1인 가구와 고령화라는 인구집단의 변화는 대안이나 새로운 방법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현상에 가깝다. 더 중요한 것은 정상가족에 복무하기를 요구받는 여성들의 인식과 생각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사회를 바꿀 주체들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시민으로 인정되고, 존중받는가의 문제는 개인이 서로 의지하고,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관계가 인정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김순남, 2017)

3년 전, 기본소득 운동을 하면서 법을 너무 바꾸고 싶은 나머지 “법이 해온 일, 해야 할 일, 못하는 일”이라는 강연을 기획한 적이 있다. 강연자였던 법사회학자 홍성수 교수는 법과 제도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며 ‘좋은 법이 나쁜 사회를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좋은 사회가 나쁜 법을 이길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할까?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끔찍하게 나쁜 사회라는 것을 실감하면서부터 역설적으로 나는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좋은 여성들의 사회를 전에 없이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좋은 사회의 힘으로 나쁜 법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미 생활의 측면에서는 뒤떨어진 제도를 어떻게든 극복해보려는 노력을 나의 친구와 함께 피치 못하게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동반생활일지의 2편과 3편에 담았다. 자, 그럼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boston.people@biyn.kr로 연락주시길. 

1) 백시우, 진재훈(2017) "비혼인 생활공동체의 인권 신장을 위한 시민결합제도 도입방안 연구 : 한국 사회의 변화와 해외 사례 연구를 중심으로", 2017 인권논문 수상집, 국가인권위원회

 2) 박유형(2018) “기본소득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기본소득”, <기본소득 말하기 다시 기본소득 말하기> pp.7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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