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호들갑 떠는 게 늘 싫었다. 뭐하나 내 뜻대로 할 수 없던 십대 시절에 “그때가 좋을 때다” 소리를 듣는 것도, 겨우 스물 한 살이 된 동갑내기들이 “우리는 헌내기야”라며 자조적인 코드를 만들어 공유하는 것도, 함께 활동해 온 동료를 ‘친구’라고 소개하면 “아 둘이 동갑이야?”라는 질문이 돌아오는 것도 늘 어이 없었다. 스물 아홉살의 겨울, 아빠는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흥얼거리며 놀리듯 서른 살이 되는 소회를 물었지만 내 안에 그런 것이 있을리가.
모두가 나이를 먹고 있다
줄곧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나이 듦’을 진심으로 체감했을 때 조금 당황했다. 청소년 캠프의 스태프로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복도에서 한 참가자가 나를 보고 배시시 웃으며 “선생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는 지나갔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고 눈이 마주친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완전히 처음 받아보는 시선이 거기 있었다. 내게 허락받고, 칭찬받고,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어린 사람의 눈빛. ‘어, 나 어른이구나. 영향력을 갖고 있구나.’ 이 자각 이후로 나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의식하지 않고 눈 앞의 삶에 충실한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단기적이고 나이브한 처방이었다. 나이 듦은 사회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실재이고, 스스로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다가는 자칫 미디어에 휩쓸려 젊음을 페티쉬화 하거나 대세에 휩쓸려 고루한 규범을 흡수하게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돌아봤을 때 나이 듦은 매 한 번뿐인 새로운 경험이고 도전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왕에, 나답게 잘 나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후 계획을 체계적으로 짜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나이에 대해 내 나름대로 고민하기를 꺼리지 않게 되었다. ‘생활동반자법’도 이 측면에서 재고해볼 수 있다. 지금의 나에게는 자립의 이슈와 연관된 제도이지만 나이가 더 든 뒤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돌봄의 문제, 고립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한국 사회에서 생애주기에 따라 주어지는 미션들은 대체로 가족을 통해서 해결된다. 예를 들자면 부모에 의한 양육, 결혼을 통한 독립, 자녀에 의한 부양. 이런 사회에서 가족 밖 개인으로 나이든다는 것은 때마다 가족이 아닌 다른 해결책을 생각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5년 전의 내가 자립에 드는 경제적 비용을 친구와 함께 집을 구하는 것으로 해결했듯이,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네트워크가 줄어들 때도 같은 방법을 꾀해보는 것은 합리적이다. 물론 그런 계산만으로 똑 떨어지는 문제는 아니지만.
독립적인 여성들의 동반생활
나는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든 뒤 함께 사는 여성들의 삶이 담긴 컨텐츠를 찾아보았다. 책 <마흔 이후, 누구와 살 것인가>(캐런, 루이즈, 진 지음, 심플라이프)는 십년 째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세 명의 여성이 직접 겪은 내용을 솔직하게 옮긴 실용적인 책이다. 이 책의 세 저자는 미국 베이비부머 세대의 전문직 여성들, 즉, 혼자 살 능력이 충분히 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혼자 사는 대신 셋이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그래선 안 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차근차근 준비하려던 동거 계획은, 운 좋게 완벽한 조건의 집을 발견하며 빠르게 실행에 옮겨지고, 세 사람은 법적, 재정적 자문을 거쳐 협동주택을 위한 협약서를 작성하고 동반생활을 시작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갈등으로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달기’를 꼽는 이 평화로운 동반생활은 꾸밈 없는 서술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으로 보였다. 세 사람은 함께 살기를 택함으로써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을 아름답고 큰 집을 얻었고, 서로의 친지들을 함께 초대해 더 즐거운 인간관계를 누리게 됐고, 생활비까지 절약한다. 성공적인 동반생활의 노하우는 서로의 사적인 경계를 지켜주고, 일방적인 의존을 지양하는 것, 그리고 최악의 상황까지 반영된 협약서를 작성함으로서 서로를 마음놓고 신뢰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책에는 이들이 실제로 논의과정에서 고려했던 이슈들과 그 답들, 이사과정에서 만든 물품리스트들, 갈등이 예상되는 상황에 활용된 시시콜콜한 농담들까지 고스란히 담겨있어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감정적으로 세 사람이 어떻게 통합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는지 종합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이 내게 지침 수준의 답을 준 건 아니다. 저자들과 나는 상황과 처지가 너무 다르다. 이 동반생활은 플러스를 더하는 계산 같은데 나와 내 주변의 경우 마이너스를 분담하는 계산에 가깝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은 영역을 공유한다. 우리집에서 이 모호한 영역은 적당히 느슨하게 굴러간다. 서로가 사다놓은 식재료들을 적당히 먹기도 하고, 설거지를 누가 몇 번 했는지 세지 않고, 누군가 가사 일을 더 하면 언제나 감탄을 금치 않는다. 6년 째 함께 살다보니 어느새 적응하게 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나와 달리 같은 집에서 여러명의 하우스메이트를 경험한 친구는 생활에 있어서 민감한 지점은 서로 다르니 갈등은 필연적인데, 민감한 지점 자체보다는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조율에 참여하는 편인지 아닌지가 동반생활의 합에 있어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의 모양이 제각각이듯, 이 ‘조금 먼 가족’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KBS1에서 방영했던 <박원숙의 같이삽시다>는 배우 박원숙이 또래 여배우들과 남해에서 함께 사는 과정을 찍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비슷한 처지의 출연진들이 서로에게 공감하며 함께 공통의 우려(건강, 외로움)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이가 실감나게 안마의자가 존재감을 뽐내는 집안에서 낮잠을 자다가도 장작불을 피우기나 고장난 기계를 고치는 일도 척척해내는 중장년 여성배우들의 생활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드라마 속에서 ‘엄마’ 아니면 ‘시어머니’의 얼굴로만 봐와서 그런지 이들의 그냥 얼굴은 더 각별한 구석이 있다. 이 생활에서도 속 깊고 편안한 사람, 야무지고 너그러운 사람, 철없지만 귀여운 사람, 자기주장이 강하고 눈치도 빠른 사람들이 각자 자기 역할을 맡고 있다. 캐런, 루이즈, 진의 사례처럼 구조화 되어있지는 않지만 구성원들이 서로의 성향을 이해하며 부족함을 문제로 삼기보다 함께 자연스럽게 채워나갈 때 만들어지는 편안한 공기를 볼 수 있는 영상물이다.
나다운 할머니가 되려면 일단 오늘 나답게 살기
결국 한국이든, 미국이든, 세상 어디에서든
- 자신에 대해 잘 이해하고
- 서로의 역할을 알고
- 그에 맞춰 경계를 합의하며 적절한 관용을 즐길 수 있다면
나다운 삶을 위한 가족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것이 공통의 법칙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 의지할 수 있고 의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은 있는 힘껏 스스로의 삶을 독립적으로 잘 꾸려나가는 것이다. 1인분의 개인으로서 자신의 위치와 경계를 알고, 욕망을 알아가는 것. 생활동반자로서 나의 나이듦은 이런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지금은 친구와 함께 살면서 나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얼마나 탄력적인지 탐구하고 또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개인으로서 발밑을 다지는 시간이구나 싶었다. 지금 결혼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흔한 협박은 미래의 불확실한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 지금 종속적인 관계를 만들어 둘 것을 종용하는데, 동반생활이라는 선택은 내게 나중에도 행복하기 위해 지금 행복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답은 없지만 스스로 답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이 경로가 나는 마음에 든다. 그리고 지금도, 혼자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