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여자가 되면 20. 저는 복권이 아니올시다

생각하다

무거운 여자가 되면 20. 저는 복권이 아니올시다

김현진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사람들은 뚱뚱한 여성에 대한 찬사를 보낼 때, 아니 모든 여성에 대한 칭찬을 할 때 그 모든 언사가 외모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예쁠 때나 못생길 때나, 뚱뚱할 때나 날씬할 때나, 지긋지긋한 그런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을 듣고 또 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온갖 희한한 칭찬을 수집하게 되었다. 

이거 말곤 할 얘기가 없나

예쁘고 날씬할 때는 “아니, ‘페미니스트 하시는 분이 의외로!’ 예쁘시네요! ” 하는 말을 칭찬이랍시고 들었다. 그 말은 ‘나는 평소에 페미니즘을 외치고 다니는 여성을 남성에 굶주린 꿀꿀거리는 멧돼지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말을 한 남성이 스스로도 모르게 드러내 버린 자신의 속내를 깨닫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그런 말을 하면 우리가 기분 좋아할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아니, 페미니스트치고는 굉장히 예쁘시네요! 이런 말을 하고서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반응을 기대하는 것일까? “감사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 공격적인 여성들 틈에 둘러싸여 저의 여성성은 말라 죽고 말았을 거예요!” 라고 표창장이라도 주기를 원하는 걸까? 자매품도 물론 존재한다. “아니, 사회 운동 하시는 분 치고는 꽤 미인이시네요! ”

나는 지금 내 한 몸 먹여 살리기도 바빠 특별히 사회 운동에 매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한때 글로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고 싶어 심장이 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 알게 된 남성들은 전혀 악의 없는, 너무나 해맑은 얼굴로 나에게 그렇게 외치곤 했다. ‘운동’ 하시는 분 치고는 미인이세요! 그럴 때면 언제나 되묻고 싶어졌다. 그러면 ‘운동’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생겼느냐고, 내가 어떻게 생겨야 ‘운동’하는 여성으로 인정해 줄 거냐고 캐묻고 싶었다. 그 다음에는 또 이런 남성들이 있었다. 아니, 전혀 ‘글’쓰는 여성분 같지 않으세요. ‘글’ 쓰는 여성분 치고는 미인이시네요! 내가 그런 말을 듣고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메바로군요.

하긴 옛날 영국에서도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서프러제트’들을 불곰처럼 못생기고 무시무시한 존재로 묘사하곤 했으니, 남성들에게 주체적인 여성을 칭찬하는 역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발언이 아닐 테다. 그들이 좋아하는 여성의 주체성이란 소위 ‘주체적 섹시’ 정도랄까. 나는 외국에 나가서 생활해 본 기간이 길지 않고 영어 실력이 짧아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많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스몰 톡small talk' 실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냥 나누는 야구나 날씨, 하찮은 일상에 대한 화제를 이어 나갈 때 한국 남성은 여성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일러스트 이민

안 긁은 복권

물론 여성들도 남성들의 외모에 대해 속닥거리며 소위 ‘얼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남성들은 오로지, 어떤 여성이 그 자리에 합류했을 때 그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정육점에 통으로 된 고기가 입하되었을 때, 솜씨 좋은 푸주한들이 한 명은 앞다리를 맡고 다른 한 명은 뒷다리, 도 한 명은 머리를 맡는 것처럼 그들은 여성의 신체를 솜씨 좋게 분리해 평가한다. 다 좋은데 다리에 알이 좀 배겼네.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좋았을 텐데 살짝 아쉽네. 오 가슴, 자연산 D컵, 좋아 좋아. 근데 코는 살짝 수술한 것 같은데? 요즘 수술 안 하는 사람 어디 있어, 괜찮아 괜찮아(누가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할 권리를 부여한 것인지?).

이런 사람들이 무거운 여성을 볼 때 꼭 빼 놓지 않고 해 주는 ‘위로’는 바로 “우와! 바탕이 참 미인이세요! 살 빼면 진짜 대박이겠다! 완전 안 긁은 복권이세요! ” 라는 말이다. 흔히 연예인들 중 살이 쪄서 미모가 살에 묻혀 가려져 있다가 혹독한 다이어트를 통해 본래의 예쁜 이목구비가 드러나 뚱뚱한 시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끔 변한 사람들을 ‘안 긁은 복권’이라고 한다. 즉석복권이 당첨복권인지 확인하려면 은박 부분을 긁어서 벗겨내야 하듯 살을 긁어내어야 진정한 ‘그 사람’이 드러난다는 거다. 그러니까, 복권을 긁기 전의 무거운 여성은 아직 인간조차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너 은박(살)좀 노력해서 벗겨 내 봐, 그러면 당첨 복권일 것 같은데? 노력 좀 해 봐!

복권 같은 소리 하네

그런데 어째 여기서 그 당첨액의 수령인은 해당자인 무거운 여성 같지 않다. 왜 무거운 여성의 인생은 안 긁은 복권처럼 시작되지 않은 인생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 관대한 마음씨, 업무 능력,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관찰하거나 혹은 관찰할 성의도 갖지 않은 채 우리 여성들 역시 무거운 여성에게 무심코 살을 빼라고 독려하며 다정한 농담조로 넌 살 빼면 정말 예뻐질 거라며 ‘안 긁은 복권’이라고 말했던가?

무거운 여성은 복권이 아니다. 어떤 여성의 삶도 복권이 아니다. 은박을 긁듯 살을 갉아내고 나서야 진짜 자신의 인생이 시작된다는 미디어의 음모에 그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고통 받아 왔는가? 우리만이라도 무거운 여성을 ‘복권’이라고 부르지 말자. 누가 그런 언사를 쓰거든 ‘요즘은 그런 말 쓰는 것 아니라더라’하고 경쾌하게 말해 주자. 외모에만 집중하지 말고 무거운 여성이 가진 장점과 특성을 발견하고 여성에게는 외모에 대한 칭찬만이 의미가 있다는 사회 분위기를 우리들만이라도 바꾸어 그 여성만의 재능과 성품을 칭찬하자. 안 그래도 여성을 밟고 찍어 누르려고 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칭찬을 해야 한다. 더욱 더! 아직 부족하다. 더, 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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