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인싸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시부모는 평생 결혼을 안 하겠다고 완강하게 주장하던 외동 아들이 생각을 바꾼 것이 너무나 기뻤던 데다 며느리감이라고 데려온 내가 목사의 딸이라는 것에 점수를 많이 주어서, 식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에 조금도 터치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웨딩 촬영도 회사 옥상에서 삼각대를 세워놓고 했고, 면사포도 쓰지 않았다. 몸에 꼭 맞는 드레스만 입었다. 머리를 올리지도 않고 길게 빗어내려 꽃장식만 하나 꽂았다.
풍성하게 퍼지거나 질질 끄는 트레인이 달린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이 결혼식날 도우미의 손길 없이 혼자서 화장실에 가거나 생리대를 갈거나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간편한 드레스를 골랐다. 몸에 좀 부담스럽게 피트되는 드레스였지만, 이제 결혼까지 해서 완전한 ‘정상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쁨에 흥분해 밥까지 잘 먹지 않았고 결혼식 전까지 레몬 디톡스 다이어트를 해서 내가 한창 몸 관리할 때인 48에서 50킬로그램을 한창 밑도는 46킬로까지 체중이 빠져서 만족스러운 핏이 나왔다.
원래 결혼식 시작 전에 양가 어머니들이 화촉을 켜는 것이 관례인데, 나는 손을 잡고 입장할 아버지가 없으니 시아버지에게 단상에 오르셔서 양쪽 화촉을 다 켜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리고 영화 <노팅힐>의 감성적인 주제가 <She>를 현악 4중주단이 연주하는 가운데 남편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 차례를 기다렸고, 현악 4중주단이 <미션 임파서블>의 주제가를 연주하자 어머니와 함께 성큼성큼 웨딩 로드를 걸어 들어갔다. 무슨 음악인지 알아들은 지인들이 웃음을 참느라 한참 입을 막았는데, 절대로 결혼 못할 것 같던 내가 결혼한다는 일종의 농담이었다. 퇴장 시에도 <캐러비안의 해적> 주제가가 연주되어 하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결혼식에 오신 내가 평소 존경하는 여성분들은 나에게 우는 신부도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좋다고 활짝 웃기만 하는 신부도 처음이고 그렇게 끊임없이 신랑을 만지작거리는 신부도 처음 보았다며 농담을 하셨다. 폐백은 생략했고, 내가 당시 회사 사보 담당자였는데 일을 대체해줄 만한 인력이 없어 고민 끝에 신혼여행은 여유 있을 때 가기로 미뤘다. 드디어 ‘인싸’들의 세계에 들어왔다! 나는 드디어 다 가졌고, 그 오랜 투쟁 끝에 비로소 정상인의 트랙에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릴 때 들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때는 어른들 말씀을 들었어야 했다. 그를 처음 보자마자 어머니는 쟤는 아닌 것 같아, 하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 연세가 있는 어르신들은 누군가의 얼굴만 보고도 대강 그 인상에서 인성을 짐작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우려는 이후 사실로 드러났다. 회사 대표님 역시 너 설마 쟤랑 결혼할 건 아니지, 제발 그러지 않는다고 말해줘, 라고 거의 나에게 애원하듯 결혼을 다시 생각하라고 타이르셨다. 나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말렸다.
그러나 나는 그때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 같은 상태였다.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그를 위해서 그 좋아하는 술도 끊었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 고속으로 결혼을 하게 되는 로맨스의 신화 주인공이라도 된 양 한껏 그 상황에 빠져 있었다. 좋은 직장, 괜찮은 남편, 이제 내 인생은 탄탄대로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좋은 아내 자격이 없었던 것 이상으로, 그에게는 좋은 남편 자격이 없었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려면 그 사람과 최소 네 계절은 지내 본 다음에 결정하라고들 하는데, 나는 이렇게 좋아하게 된 사람이 처음이니 그딴 건 다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아직 서로를 잘 모른다면 먼저 결혼하고 이후에 연애를 하면 될 게 아닌가? 이렇게 로맨스 신화에 깊이 중독되어 있는 나를 조금씩 정신을 차리게 한 건 결혼 후에 슬슬 변한 그의 모습이었다.
막상 뚜껑 열어 보니
깊이 연애를 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는 연애가 귀찮고 싫어 소위 ‘오피’ 성구매를 많이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것도 대학생 때부터 시작해, 어디 사창가에 가고 싶을 때면 친구들이 모두 그에게 연락할 정도로 홍등가에 대해 빠삭했다는 것이다. 성구매를 자주 하게 되면서 단골 아가씨들만 찾게 되었는데, 그 중에 어떤 연상의 여성이 그에게 연애감정을 품어 한동안 동거까지 했다는 거였다. 그가 느지막하게 일어날 때 즈음해서 먹을 수 있도록 그녀는 밥상을 봐 주고 출근했고, 생일에는 손수 갈비찜 등 직접 만든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려 주기도 했다고 그는 건조하게 회상했다. 나중에 그와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누나 나 벤츠 한 대만 사줘, 라고 했더니 그는 사채 조금만 더 쓰면 되니까 사줄게, 라고 까지 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물론 나는 성구매를 반대하지만, 이미 눈에 콩깍지가 한창 쓰인 데다가 지금 성구매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했다는 건데 뭐 어때, 하고 그 사실을 아주 너그럽게 넘겼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어리석었던 건 그렇게 밥 먹듯 성매매를 한 남성은 여성을 볼 때 가격으로 판단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였다. 여성을 돈으로 사는 일에 능숙한 남성들은 적정가를 매기는 데에 아주 익숙하다. 얘는 얼마짜리, 쟤는 얼마짜리. 내가 성판매 여성이 아니라 아내였다고 한들 그런 값을 매기는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었다.
두 번째로 내가 허술했던 것은 그가 과거에 소위 ‘일진’이었다는 거였다. 그에게는 아무런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학창시절에 일진들이 왕따를 시키거나 부당한 짓을 할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편이었지만 말했다시피 콩깍지를 쓰고 있던 시절이라 그가 즐겁다는 듯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그저 듣기만 했다. 찜찜한 기분을 다 옛 일이잖아, 하고 억지로 타일렀지만 계속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 불편함을 아주 중히 여겼어야 했다. 중고교 때 소위 ‘일진’으로 활약하면서 그의 어머님은 돈봉투, 즉 촌지를 가지고 학교를 하루를 멀다 하고 방문해야 했는데 그건 그가 싸움이나 삥 뜯기 같은 걸 해서이기도 하고, 만만하고 착한 아이를 보면 콕 찍어서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그런 순한 아이들 중 멋진 브랜드 상품을 사 입은 걸 보면 그는 야 이거 좋아 보이는데, 좀 빌리자, 하고 짧으면 두어 달, 길면 1, 2학기 정도 자신의 낡은 물건을 내주고 대신 그 아이의 것을 빼앗아 닳고 닳도록 애용한 뒤 휙 하고 도로 던져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찍은 아이 한 명에게 매점이며 학교 앞 분식집이며 온갖 심부름을 다 시켰다며 킬킬거렸다. 그때 한창 유행했던 브랜드 제품을 갖기 위해 다른 사람 집에 널려 있는 빨래건조대에서 비싼 옷을 훔쳐 온 적도 있다며 그는 무용담을 말하듯 이야기했다.
위험! 위험!
물론 내 마음은 꺼림칙해졌다. 한 명을 꼽아 괴롭히고, 물건을 교환하자며 빼앗고, 그런 일들은 내가 가진 도덕 기준에서 완전히 불합격이었다. 게다가 그런 행동을 반성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당했던 급우들을 자식들 귀여웠지, 하는 식으로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처럼 이야기하는 것에 거부감이 치밀었다. 원래라면 이 남자는 내가 결혼은 커녕 상종조차 안 할 인간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떠올려 보면 그 생각이 나에게 당장 도망치라고 본능적으로 또 다른 나 자신이 보내는 경고신호였다.위험! 위험! 하고 그토록 많은 사이렌이 울렸는데도 나는 어리석게 억지로 스스로를 달래며 어리고 철모를 때 일이잖아, 지금 안 그러면 됐지, 하며 성구매와 학교폭력 경력에서 애써 눈을 돌렸다. 절대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나에 대해서도 부위별로 나눠 등급을 매긴 후 값을 계산할 사람이었고, 약한 한 사람을 찍어 자신의 시중을 몇 학기나 들게 했던 것처럼 여성에게도 얼마든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로맨스에 눈이 멀었던 나는 그런 사실에서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이성애자 여성들에게 연인이나 남편을 고를 때 절대 위의 저런 일들을 겪은 사람은 확실히 거르길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성구매 경험이 있는 남성과 학창 시절 ‘일진’이었던 경험이 있는 남성. 전자는 아까 말했듯 여성을 돈으로 환산하는데 능하고, 후자는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전혀 없다. 이 둘이 합쳐진 남성과 결혼했으니 내 앞길도 따끔따끔한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거의 그가 나를 죽일, 혹은 내가 그를 죽일 뻔한 사건이 아직 남아 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결과로 받아야 했던 처벌이 아직도 한창 남아 있었던 것이다.
착각
공기업은 철밥통일 거라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지만 공직이다 보니 나는 때마다 서울 시의원 요구자료나 국회 요구자료처럼 본래 업무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한 사업당 투입된 인원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야근과 주말근무는 거의 일상이 됐다. 특히 회계를 담당했던 그는 거의 언제나 각 팀에서 가지고 오는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 초과근무를 해야 했다. 나 역시 월간지를 만드느라 한 달이 숨가쁘게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어떤 원칙을 정해 놓고, 그에 따르지 않는 것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마이 웨이를 고수해 부모님마저 아들이 살아 있는 것으로 만족할 지경이었다.
원래 어른들을 좋아하는 성격인 나는 생전 집에 연락하지 않는 그 대신 그의 부모님에게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 통화나 문자를 통해 연락해서 오늘은 일이 어땠다, 어제는 뭘 해서 먹였다, 건강은 어떠시냐, 교회 일은 어떠시냐, 하고 살갑게 안부를 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습된 노예근성이지만 모아둔 돈 한 푼 없는 나를 기꺼이 어여삐 보아 준 그 분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쁘게 그런 일들을 했다. 사실은 결혼식보다도 식전에 미리 회사 점심시간에 잠시 근처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을 때 결혼했다는 실감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창구의 구청 직원의 축하합니다, 하는 말에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면서 나는 혼인신고서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게 그때의 나에게는 ‘인싸’신고서처럼 느껴졌다. 물론, 엄청난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