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델은 아니지만 옷에 몸을 맞추려 여러 번 도전한 경험이 있다. 숨 쉴 틈도 없이 타이트한 원피스나 스키니진을 보고 결의에 찬 한숨을 쉬어 배를 있는 힘껏 안으로 집어넣고는 몸을 살살 달래며 옷 안에 입장하려 노력한다. 간신히 44사이즈 원피스의 지퍼가 채워지거나 구하기도 어려운 22인치 청바지의 단추를 여밀 수 있으면 그날은 아주 기뻤다. 옷이 나를 받아 주었어! 옷에 들어갔다! 만세! 생각해 보면 내가 옷을 선택해야 하는데 옷이 나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내 몸에 대한 주도권을 옷에게 넘겨준 거였다.
정말 마른 것보다
달콤한 맛은 없을까
날씬해지고 싶은 일반인인 나 같은 사람도 작은 옷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을 했는데, 빅투아르처럼 마르는 것, 33사이즈 옷이 낙낙하게 맞는 것이 아예 직업인 사람의 고통은 차마 헤아릴 수가 없다. 얼마 전 사망한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마치 전교를 내리듯 ‘모델은 괜찮은 옷걸이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다. 헤로인 시크, 그러니까 마약에 찌든 듯이 눈이 풀리고 넋을 잃은 표정을 유행시킨 케이트 모스는 너무나 말라서 20세에도 12세 어린이로 오인 받곤 했다는데, 그 역시 악명 높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마른 것보다 더 달콤한 맛은 없다.’ 그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었을까. 해외에서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한국인 모델 최소라는 런웨이에 서야 하는 시즌이 되면 아예 3주나 되는 그 기간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밝혔다. 물은 마시지 않으면 곧 죽을 테니 그건 마시지만 음식물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그에게 역시 ‘프로페셔널’이라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젊음으로 버티고 있는 그의 몸이 무대에서 내려올 때가 되면 얼마나 상해 있을지 나와 아무 관계도 없는 생판 남인데도 그의 건강이 걱정스러웠다. 여러 번 썼듯이, 거식증을 비롯한 식이장애가 실제로 여성들을 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간 너무나 많은 여성들을 잃었다. 이제 한 명의 여성도 더 잃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식이장애는 그저 아름다워지고 싶었던 여성들을 역병처럼 지금도 죽이고 있다.
2007년 22세의 우루과이 모델 루이셀 라모스가 식욕 감퇴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패션계에 말라깽이 모델을 쓰지 말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모델은 옷걸이에 불과하고, 일반인에게도 유명 브랜드 ‘아베크롬비’의 대표가 사이즈를 다양하게 갖추라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우리 옷은 날씬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맞서는 세상이니 당연히 그러한 움직임이 사그라 들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6개월 만에 그의 동생인 모델 엘리아나 라모스 역시 언니와 동일한 사인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이셀은 런웨이에서 갑자기 쓰러져 숨졌는데, 살을 빼기 위해 상추와 칼로리 제로 콜라만 마시고 있었고, 체질량지수(BMI)는 세계보건기구(WHO)가 규정한 '아사 상태'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으니 사실상 루이셀의 사망 원인은 아사로 보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2010년경에는 한국의 패션모델도 섭식장애로 자살했다. 사망 당시 22세였던 모델 김유리는 176cm에 52kg로 표준 체중에서 13kg나 모자랐는데도 "1mm의 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다이어트의 괴로움을 호소했다. 경찰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너무나 깡말라 허벅지가 남자 발목 굵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거식증이 심각해지면 뇌까지 쪼그라든다고 하며, 빅투아르 역시 프랑스의 엘리트 대학에 응시할 정도로 명석했지만 끝없이 다이어트를 하며 자신을 학대했던 8개월의 모델 생활 동안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 뇌 위축 증상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거식증 등의 식이장애는 오늘날 초등학생 사이에서도 널리 퍼지고 있는데, 갑작스레 원인을 알 수 없이 사망한 프랑스 모델 이사벨 카로 역시 13살 때부터 거식증을 앓아 왔다. 사망 당시 이사벨은 키 165cm에 몸무게 30kg였는데도 체중 증가에 대한 염려로 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그러면서 거식증 퇴치 캠페인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지만 결국 죽고 만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사벨의 거식증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그의 어머니가 딸의 죽음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참상이 이 정도라면, 식이장애가 등을 떠밀어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여성들이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말라도 행복할 수 없어
데뷔하자마자 유망한 모델이 되어 ‘올해의 보석’이라는 찬사까지 받았던 빅투아르가 패션계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갖은 노력으로 47kg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옷에도 들어갈 수 있었기에 전능감을 한껏 누렸다. 패션쇼에 서고 디자이너들과 일하는 것은 처음에는 창의적인 작업에 참여한다는 흥분을 주었지만 이내 패션계 종사자들이 모델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마네킹 혹은 옷걸이로 취급하여, 빅투아르가 이 직업에 가졌던 환상은 모두 박살이 났고 뒤이어 모멸감이 밀려왔다. 그 자리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모델 중 경력이 긴 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빅투아르는 모델의 현실에 대한 충고를 듣게 된다.
샤를로트라는 그 모델은 굴지의 에이전시 소속이었으며 모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4년 동안 이 바닥에 있었다는 샤를로트는 젊은 여성들이 정말로 힘들게 일하지만 그 보상을 받기란 룰렛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보다 낮다고 말했다. 게다가 유명 브랜드의 모델로 계약을 체결한다 한들, 받은 돈은 대부분 에이전시에 돌아가며 그 외에도 모델이 소모하게 되는 음식, 택시 이용, 세탁비 등등 온갖 자질구레한 비용을 모델에게 청구하기 때문에 정산이 끝나고 나면 모델이 갖게 되는 돈은 전체 계약금의 1/10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명품 브랜드의 뮤즈로 발탁되면 큰 돈을 만질 수도 있지만,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선택받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외모가 아름다웠던 샤를로트는 샤넬과 랄프 로렌의 뮤즈가 되었지만 모델로써 커리어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파트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샤를로트는 빅투아르에게 이 바닥은 무자비한 전쟁이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빅투아르는 몸을 모델답게 잘 통제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여전했고, 그 총성 없는 전쟁에서 혹시 이길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뉴욕에 도착한 후 단 1그램도 몸무게가 늘지 않았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간 했던 노력의 결실로 보답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 거리를 걷고 있는데 고층건물이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빙글빙글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긋지긋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끝이야, 나 끝났어. 정신을 차려 보니 빅투아르는 보도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양실조로 거리 한가운데에서 기절한 것이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노력하고 있었건만 어느 디자이너의 오디션에서 빅투아르는 거절을 당하는데, 이유는 너무 말랐다는 거였다. 그 때문에 그 디자이너의 옷을 입으면 아무 느낌도 살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그가 모델로서 고를 수 있는 안전한 선택지는 계속해서 마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함께 숙소를 쓰던 두 모델들은 체중이 60kg에 육박해 에이전시에서 쫓겨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빅투아르에게 계속 그렇게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며, 너만큼 먹지 않으면 그건 사는 게 아니라고 걱정스레 충고하지만, 빅투아르의 눈에는 그저 그들이 모델이 되기에는 자기관리를 너무 못한 사람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 말랐건 어쨌건 음식을 먹었던 저들은 쫓겨났고, 음식을 굳은 의지로 극복해온 자신은 여러 패션쇼에 캐스팅되었으니까. 그리고 런웨이에 섰을 때 빅투아르는 자신을 비추는 조명 한가운데를 걸으며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마약 같은 환희와 고양감, 그리고 흥분을 느꼈다. 에이전시 사람들은 심지어 그를 위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초보 모델에게 이 정도로 패션쇼 캐스팅이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기뻐했다. 그러니 빅투아르에게 계속 마른 상태에 있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인 디자이너 두리 정의 쇼에 섰을 때 두리 정은 자신의 지난 컬렉션에서 500달러 한도 내로 원하는 것을 선물로 줄 테니 자유롭게 가져가라고 인심을 썼다. 그런데 178cm에 47kg인 빅투아르가 과연 이 옷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두리 정의 옷들은 작았다. 그가 여자들이 너무나 날씬하다 못해 마른 한국이라는 나라 사람이라는 것이 이 옷들의 사이즈와 과연 아무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지퍼 신드롬
어쨌든 빅투아르는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타이트한 원피스를 찾고 만족한다. 1g이라도 살이 찌면 맞지 않을 이 원피스가 있으면 47kg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서였다. 이것 역시 나도 흔하게 겪은 일이었다. 몸에 꼭 달라붙는 옷을 하나 정해 둔 다음, 그 옷에 들어갈 수 없으면 무조건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식이었다. 프랑스 여성들은 이것을 일컬어 ‘지퍼 신드롬’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냈는데, 몸무게를 재지 않는 대신 타이트한 청바지를 골라 놓고 그 청바지가 지퍼를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맞지 않으면 디저트를 얼마간 거르는 식으로 몸매 관리를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용어를 발견한 책에서는 프랑스 여성들이 체중에 좌우되지 않고 ‘지퍼 신드롬’으로 몸매를 관리하는 것이 너무나 우아하고 현명하다는 식으로 찬양을 아끼지 않았는데, 몸무게를 재는 것과 수시로 꽉 끼는 청바지에 들어가서 지퍼를 올려 보는 것 중 후자가 뭐가 그렇게 특별하고 우아할까. 안 맞는 청바지에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고 낑낑대는 모습은 누구나 흉한 것을. 빅투아르에게는 그 원피스가 47kg이 넘지 않도록 경고하는 일종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느 패션쇼에서는 무대 뒤에 쇼 후에 먹을 수 있도록 호화로운 음식으로 채워진 뷔페를 준비했다. 뷔페는 종종 있지만, 이 뷔페는 모델들이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황홀한 성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자마자 군침이 도는 따끈한 머핀 같은 것들에 모델들은 모조리 달려들어 잔뜩 먹어댔다. 빅투아르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나 놀라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쟤들은 저런 탈선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빌어먹을 작은 목소리가 한시도 나를 가만 두지 않는데. 그래서 조그마한 닭가슴살 한 조각을 먹은 후에도 완하제 한 판을 먹도록 나를 밀어붙이는데.
그러나 빅투아르의 의문은 곧 풀렸다. 잔뜩 먹은 모델들은 차례를 다투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소화되기 전에 먹은 것을 죄다 토해 내기 위해서였다. 여기저기서 구역질 소리가 났지만 모델들은 일종의 암묵적 약속으로 서로의 구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했다. 빅투아르는 그 날 뷔페에 달려들지 않았지만, 이내 다른 종류의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수면장애가 점차 심각해졌고, 살이 전혀 없는 등의 피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괴로움이 가시지 않았다. 척추뼈 하나하나가 다 느껴지는 바람에 어떻게 해도 편하게 누울 수가 없었다. 완하제 복용량을 늘려 보아도 언제나 뱃속에서 괴로운 복통이 멈추지 않았다. 아주 조그만 음식 한 토막이라도 먹으면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느낌 역시 빅투아르를 쉬지 않고 괴롭혔다.
그러나 포토그래퍼가 찍은 자신의 사진을 본 그는 괴롭지만 만족스러웠다. 사진에 나온 자신은 마르고, 창백하고, 날아갈 듯 가벼워 보였다. 사람들이 내 지방덩어리보다는 뼈를 보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다른 문제가 생겼다. 심각한 거식증을 앓는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솜털이 몸을 뒤덮는 것이다. 지방이 없어 추위를 견딜 수가 없는 몸이 체온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빅투아르 역시 늘 추위에 덜덜 떨었고, 어느 패션쇼에서 찍힌 사진에 온몸의 털이 모조리 있는 대로 곤두서고 닭살까지 돋은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 것을 보았다. 에이전시 사람들은 팔 제모를 권했지만 한번 제모를 시작하면 영원히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빅투아르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 계속 이어졌다. 오한이 들었고, 구토를 하며 신물을 쏟아내면서도 그는 뉴욕 패션위크를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대체 모델을 쓰자는 제안을 일축했다. 영양 부족과 스트레스로 고통 받고 있는 몸을 자신의 의지로 복종시키는 것이 자신이 프로가 될 것인가, 낙오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생각한 거였다. 빅투아르는 겨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였지만 콜라를 조금 마시고 런웨이에 서러 가면서 할 수 있다고 의지를 다졌다.